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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서 지켜야 할 것Ⅱ(07-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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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833회 작성일 07-08-0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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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서 지켜야 할 것Ⅱ
엡4:30~32

어느 집 아들이 교회학교에서 성경 퀴즈 대회를 하다가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악처 세 명을 말하라고 하는데, 한 사람은 삼손의 아내 들릴라이고, 또 한 사람은 헤롯의 아내 헤로디아인 것은 알겠는데, 나머지 한 명은 누구죠?" 아들의 이 질문을 듣고는 아빠가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너는 네 엄마 이름도 모르냐?"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부부가 함께 호수가 있는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마침 예쁜 아가씨가 그들 앞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그 여자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쳐다보자, 아내가 남편을 꼬집으며 말했습니다. "당신, 만약에 이 호수에 저 여자와 내가 빠진다면 누굴 먼저 구할 거야?" 남편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당신, 요즘에 수영 배우고 있잖아!"

농담 속에 진담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농담이지만 악처와 사는 것처럼 자신의 결혼생활을 만족하지 못한 사람, 물에 빠져도 구해주고 싶지 않을 만큼 불행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부부사이뿐만 아니라, 소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 사이도 허다하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크리스천 작가였던 마크 트웨인이 이런 재미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뜻밖에도 그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어서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 안에 넣어 보았다. 그들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마침내 그들도 더불어 잘 어울릴 수가 있었다. 다음에는 장로교인과 감리교인, 침례교인을 한 곳에 있게 했다. 그들은 결코 잘 지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신자들이 얼마나 그들 사이의 교제를 소중하게 관리하지 못하는가 하는 모습을 풍자한 것입니다.

교회 분열사를 보면 별 희한한 이유들이 많습니다.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16세기에 생겨난 교파 가운데 '메노나이트 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옷을 입을 때 옷고름을 매듯이 옷을 끈으로 매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단추가 나오자 단추를 달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신자들 사이에 단추를 달고 다니는 것은 사치다고 하여 단추를 달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옷고름 파‘와 단추를 달아도 괜찮다는 ‘단추 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단추를 못 달게 하는 '메노나이트 파'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또 '형제교회'라는 교단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성찬식 대신 세족식을 합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목회자가 신자의 발을 씻어주는 예식입니다. 어느 형제교회 교단의 세족식에서 목사님이 습관적으로 교인의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서로 마주앉아 있기 때문에 목사님이 오른쪽을 잡으면 교인의 왼발이었던 것입니다. 세족식이 끝난 다음 그 교회의 한 집사님이 용기를 내어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왼발을 먼저 씻습니까? 오른발을 먼저 씻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도 없는 사실을 가지고 목사님께 따지는 것을 목사님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집사님은 '다음 세족식 때는 오른발을 먼저 씻어주겠지'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족식에도 목사님은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화가 난 집사님은 교인을 선동하여 교회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새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가 지금도 미국에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부끄러운 모습중의 하나도 교파분열 현상인데,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는 명칭의 교단만도 50, 6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분열로 몸살을 앓던 당시 영국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상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니......." 故한경직 목사님은 ‘교회가 서로 싸우지만 않아도 성장한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적은 숫자로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성도간에 아름다운 사랑의 결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화해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는, 우리가 전하는 평화의 복음은 그 누구에게도 감동과 설득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미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하나 됨의 이유와 방법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중요성 강조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이 주제로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역시 신자와 신앙공동체의 하나 됨에 중요한 덕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32절 다같이 읽음).

1. 인자(자비)와 긍휼
한 부부가 사네 못 사네 하며 상담자를 찾아 왔습니다. 화장실에서 치약 사용하는 것이 싸움의 씨앗이었습니다. 남편은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라 치약을 항상 밑에서부터 필요한 만큼씩 짜서 쓰고, 아내는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짜서 쓰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어 결국은 같이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치약 짜는 문제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번번이 치약 짜는 문제로 시작해서 성격차이, 교육수준, 가정환경, 부모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상담자의 한 마디에 해법을 찾고 돌아갔답니다. 상담자의 조언이 무엇이었을까요? "앞으로 치약을 두 개 놓고 쓰세요." 우린 이렇게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때론 심각하게 싸웁니다. 왜? 내 방법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내 방식만이 옳다고 그것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며 급기야는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자비(인자)와 긍휼’입니다. 자비와 긍휼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으로 성경에서 거의 같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긍휼이란 ‘사람의 불행을 회복시켜 주려는 고통스러운 심정’이란 뜻인데, 상대방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상대방과 같은 심정으로 보고 느끼는 것, 상대방의 심정을 공감해 보는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부모님의 마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랑받는 자녀로 사는 것은 바로 이 긍휼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비는 ‘상대방을 깊이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그렇게 여겨서 베푸는 혜택’(국어사전)이란 뜻으로, 이는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즉 상대방을 대할 때 부럽고, 인자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자비의 내적인 동기이고, 자비는 긍휼의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그래서 이 둘이 항상 함께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윤리의 대원칙은 하나님께는 받고, 남에게는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될수록 우리의 삶은 건강해지고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풍성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긍휼과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이 긍휼과 자비가 있는 곳에는 소통(疏通)이 일어납니다. 막힌 것이 뚫리고, 무너져서 하나가 됩니다. 우리 몸의 건강이든 우리의 관계든 막히면 병이 들고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양극화를 뽑고 있습니다. 계층간, 세대간, 부자와 가난한 자, 고용주와 고용자 등 심각한 갈등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거대한 담이 가로막혀서 서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도 여기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그 원인은 서로 간에 긍휼과 자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비난의 화살, 정죄의 화살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갈등과 분열을 넘어 진정으로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의 자비로우신 마음(긍휼), 자비로운 눈, 자비로운 귀, 자비로운 손과 발, 자비로운 혀를 닮아야 합니다(눅10: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참고).  

2. 용서
그런데 토마스 해리스는 「둘 다 옳다」라는 그의 책에서 사람을 네 가지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둘째,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다.”
셋째, “당신도 나도 모두 틀렸다.”  
그리고 넷째는, “당신도 옳고 나도 옳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당신도 옳고 나도 옳다.”라는 전제 아래 행동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긍정하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 때 서로가 기쁨을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세야말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태도이며, 이런 태도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부터 형성되어 온 잘못된 삶의 태도가 치유되고, 잘못된 관계 또한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용서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고 존중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 자존감을 갖게 되고, 높은 자존감을 가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수용의 폭이 커집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누구든지 용서할 수가 있고,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개와 고양이는 서로 앙숙관계입니다. 그래서 만나면 싸웁니다. 어느 인류학자는 그 이유를 ‘서로 신호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개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갑니다. 반면에 고양이는 기분이 좋으면 꼬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기분이 나쁘면 꼬리가 위로 올라갑니다. 이 둘은 표현 방식이 다르고, 다른 신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가 고양이한테, "I love you." 하면서 꼬리를 위로 올립니다. 그러면 고양이가 “me too." 해야 할 텐데, 오히려 "너는 왜 나만 보면 싸우자고 하느냐."며 개에게 "야옹~!"하고 덤빕니다. 그러니 만나면 허구한 날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와 고양이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신호만 고집을 했는데, 이제부터는 자신의 신호를 버리고 상대방의 신호로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꼬리를 위로 올리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쪽의 신호대로 꼬리를 낮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를 인정하다보니 소통이 이루어지고, 소통이 이루어지니까 서로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의 비결이고, 이 용서가 있는 곳에 하나 됨이 있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성도의 연합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이지만, 은사에 있어서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다양성(차이)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용서의 비결이요, 하나 됨의 비결입니다.

스티븐 코비는 용서하지 못한 삶을 독사에 물린 것에 비유를 했습니다. 독사에 물렸을 때 가장 먼저 할 일은 독이 몸에 퍼지기 전에 몸에 있는 독을 빼내는 것입니다. 나를 문 독사가 밉다고 그를 잡으러 다니다가는 독이 온 몸에 퍼져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지만 용서하지 못한 것은 독사의 독을 품고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적에게 보복하려 들지 말라. 그를 해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다치게 할 뿐이다. 싫어하는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단 1분도 허비하지 말라.” 아이젠하워의 말입니다. 또한 어떤 분은 “원한을 품는다는 것은 누구에겐가 던질 요량으로 불에 달구어진 석탄덩이를 집어 드는 것과 같아서 막상 화상을 입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중국의 삼국 시대, 조조의 아들인 조식은 당대의 빼어난 시인이었습니다. 조조는 그의 아들들 중에 조식을 몹시 아껴 그가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중신들의 반대로 결국 맏아들인 조비가 왕위에 올랐고, 왕이 된 조비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했던 아우를 몹시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조식은 죄수와도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마침내 조비는 아우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아우를 죽일 수 있는 빌미를 찾기 위해 며칠을 고심하다가 그를 불렀습니다. ‘네가 시를 잘 짓는다 하니, 내가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 시 한 수를 짓도록 해라. 만일 그러지 못하면 지금까지 너의 명성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여덟 걸음 째에 너를 참수하겠다.’ 조비의 말을 들은 조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니 일곱 걸음 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얼음처럼 냉정하던 조비는 이 시를 듣자마자 마음이 풀려 아우를 부둥켜안고 울고 말았습니다. 이 시가 그 유명한 「칠보시」입니다.

콩깍지를 태워 콩을 삶고 있네.
콩이 솥 안에서 울며 말하는 구나.
본래 한 뿌리로 태어났건만,
어찌 이다지도 들볶는 건가.

여러분,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나와 위치와 생각과 소속이 다르다고 형제를 괴롭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섬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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