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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불복(戰勝不復)(07-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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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768회 작성일 07-08-1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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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불복(戰勝不復)
빌3:12~16

전승불복(戰勝不復)이란 손자병법에 나온 말로 ‘전쟁에서 한번 거둔 승리는(戰勝) 반복되지 않는다(不復).’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세상에 영원한 승리란 없다! 내가 지금 이룬 이 승리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의 승리에 도취되거나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착각하지 마라! 승리는 하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더욱 힘들다! 똑같은 방법으로 승리를 쟁취하려 하면 승리는 멀어질 것이다!’ 이런 여러 메시지들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MBC가 지난 5일(2007년 8월) 저녁 10시50분에 방송한 정치에세이 ‘달콤 쌉싸래한 인생’이란 주제 하에 ‘달콤함-레드카펫 위의 사람들’, ‘비정함-칼날 위에 선 사람들’, ‘씁쓸함-기억, 저편의 사람들’, ‘편안함-한발 비켜선 사람들’이라는 4개의 소주제로 정치인들의 화려한 삶부터 정치계에서 물러난 후 평범하게, 혹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뒷모습을 담아냈습니다. 특히 ‘씁쓸함’ 편에서 전직 의원들이 무료식권을 받아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 야당 부총재까지 지냈던 모(박영록) 의원이 컨테이너에서 한 달에 100만원의 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전승불복이란 이 말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20년 전에 100대 기업에 속했던 기업 중에 지금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13개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승리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나게 합니다. 한 번 이룬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순간 그의 뒤에는 또 다른 승자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인생,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선 승리를 버려야 합니다. 승리에 대한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한 번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승불복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고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적은 ‘방심, 나태, 안일.’ 이 삼형제입니다. 이들은 모두 교만의 자식들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사람도, 견고한 성도, 경건한 신앙인도 이 삼형제에게 걸리면 무너지고 맙니다(트로이의 목마).

바울의 일생은 영적 긴장감 속에서, 늘 깨어있는 삶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이런 삶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은 아직도 미완성의 존재(12-‘이미 얻었다 함도 하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로, 이미 이룬 일들에 연연하지 않고(13-‘뒤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주어진 목표) 향해 달리고 있는 인생(14-‘푯대를 향하여......좇아가노라.’)이라고 고백합니다. 즉 인생이라고 하는 운동장에서 달리고 있는 경기자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삶을 살았기에 자신의 죽음 앞에서 승리의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6~8).

저는 이와 같은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역시 바울처럼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늘 깨어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의 태도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을 ‘좇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무너진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신이 ‘선 줄’로, 혹은 ‘된 줄’로 착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세워지고 있는 존재’. ‘되어져 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미완성의 존재’입니다. ‘공사 중.’. 이것이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하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13)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3) ‘푯대를 향하여.......좇아가노라.’(14)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은 아직도 미완성의 존재요, 과정으로서의 존재라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고백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겸손이 나오고, 성장을 위한 몸부림이 나온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좇아간다.’는 말은 성장과 성숙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더 부지런히 배우고’, ‘쉬지 않고 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직도 좇아가는(성장과 성숙이 필요한) 존재이기에 누구에게든지 무엇에서든지 배우고자하는 겸손을 갖게 되고, 말씀과 기도를 통한 경건의 훈련에 게으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따뜻한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고, 관심과 사람, 도움과 용서와 용납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쉬지 않고 훈련하는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늘 깨어있는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방심이나 안일, 나태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의 태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공사 중이어서 자기 부족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좇아가는 존재입니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 훈련받아야 할 것, 노력해서 고치고 회복되고 변화되어야 할 것이 많은 존재입니다. 주님의 도움은 물론 다른 사람의 도움과 위로, 관심과 사랑, 지도가 너무도 절실한 존재입니다. 겸손하게 서로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면서 부지런히 세워져가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잠시도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영적 긴장감 속에서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을 ‘푯대를 향하여.......좇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시지푸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신들을 속인 죄로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고 올라가는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돌이 산 정상에 도달하면 밑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그는 다시 밀고 올라가야 합니다. 이렇게 무의미한 일을 평생 반복해야만 하는 것이 시지푸스의 비극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카뮈는 이 시지푸스의 비극이 오늘 우리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지푸스처럼 목적도 없이 의미없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단순히 좇아가는 존재라면 카뮈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14) 좇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무의미한 좇음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와 목적이 있는 좇음이라는 것입니다. 성장과 성숙의 목표, 달리는 방향과 목적지가 분명하고, 삶의 목적이 분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목표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는 시골 학생이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어 집으로 와서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하루는 쟁기질을 하는 아버지에게 자기가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쟁기기질을 하는데 아버지처럼 반듯하게 골이 나질 않습니다. 안돼는 이유를 물었더니, ‘쟁기를 끌고 있는 소를 보지 말고 먼 곳에 목표물을 정하고 그것을 바라보며 쟁기질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자 ‘무엇을 목표로 삼았느냐.’고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건너편에 매어 있는 소라고 말하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소가 매어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쟁기질을 했더니 아버지처럼 반듯하게 골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목표와 관련하여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우리에게 교훈해 줍니다. 첫째는, 삶의 목적(표)이 없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목표(적)는 있지만 움직이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움직이지 않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한 시지푸스와 같은 사람이고,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두 번째와 세 번째입니다. 목표가 있지만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흔들리고 변하는 것이냐, 아니면 흔들이지 않는 영원한 것이냐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흔들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 또한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표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신자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어떤 환경, 여건, 상황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목표가 흔들리지 않으니까 삶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을 보십시오. 복음전도자로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얼마나 그의 삶을 좌절시키려는 시도들이 많았습니까?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푯대를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결코 인생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늘 깨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히12:2)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의(마6:33)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목표를 두고 좇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방심이나 안일, 나태와 같은 단어들은 더 이상 우리의 사전에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3. 바울은 자신을 ‘위에서 부르시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불안은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밝은 곳보다는 어두운 곳에서 불안을 느끼고. 익숙한 곳보다는 낯선 곳에서 불안을 더 느낍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불안을 느낍니다.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이 시간 이후의 내 삶이 어떻게 될지, 시작한 일이 잘 될지, 그곳에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불안과 염려로 질식당한 이유가 이 때문이고, 또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질병의 70%가 불안과 염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불안과 염려의 극복은 건강한 삶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분문에서 바울은 자신은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상’이란 확실한 보장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결과가 보장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전투로 말하면 완전한 승리요, 비행으로 말하면 목적지에 안전한 착륙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목표가 분명했기에 방황할 필요가 없었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장된 미래를 확신했기에 불안과 염려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보장된 약속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바울처럼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불안과 염려를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우리의 미래가 분명하게 보장되어 있음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개구리를 고통없이 죽이는 법을 연구하였습니다. 그것은 솥에 평소 개구리가 살던 온도의 물을 붙고, 거기에 개구리를 넣어 서서히 불을 지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도다 점점 올라가면서 개구리는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서서히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방심이나 나태, 안일이 우리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결코 죄같이 않으면서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이것들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특히 신앙생활 속에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바울처럼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갖는 것입니다. 좇아가는 존재로서 겸손하고 진지하게 배우는 자세, 목적이 있는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푯대, 인생의 목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분명히 보장된 존재로서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만하지도, 방황하며 시간을 낭비하지도, 불안과 염려로 고통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전승불복을 넘어서 필승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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