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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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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9,728회 작성일 22-01-17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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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으로

5:1~3

2022. 1/16. 11:00

가난도 스펙이다!

몇 달 전, 어느 대선후보 캠프에서 자기 당 후보가 어린 시절에 입은 옷과 상대 당 후보가 어린 시절에 입은 옷을 비교하는 사진을 올렸다. 아무래도 자기 당 후보가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던 같다. 그러자 상대 당의 다른 후보가 이 시진을 보고 가난이 스펙이냐!’며 발끈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상위 0.1%에 진입했으면서 가난팔이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어려운 사람들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사람마다 가난에서 탈출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가난을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닌 것 같고, 여전히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 가난을 스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가난이 스펙이 될 수도 있고, 가난을 스펙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을 딛고 상위 0.1%가 된 대선후보는 가난을 스펙이 되도록 만든 사람인 것 같다.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성공의 비결을 가난이라고 했다. 돈이 없는 경제적가난, 몸이 허약한육체적 가난, 못 배운 정신적가난이 그것이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하지 않고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고, 몸이 약했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달아 몸을 아꼈고, 못 배웠기 때문에 항상 모든 이를 스승으로 여기고 배우는데 열중했다. 그에게는 가난이 스펙이 되었고, 가난을 스펙으로 만든 것이다. 사실 가난 자체는 미화될 수 없지만 유익도 많다. 신앙 안에서 가난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신앙인 중에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도 많다. 이런 것을 선택적 가난이라고 한다. 특히 마음의 가난은 주님과의 친밀함을 쌓을 수 있는 중요한 영적 스펙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영적 성장을 위한 주님과의 친밀함을 쌓기 위해선 가난한 마음이 중요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본문은 유명한 주님의 산상설교 가운데 첫 번째로 나온 팔복 중에 첫째 복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매우 역설적인 주님의 선언이다.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6:20~)에도 나온다. 흔히 누가복음의 내용을 평지(마태는 산상)설교라고 하고, 여기에는 4개의 복만 나온다. 첫째 복은 같은데, 본문에 있는 심령이라는 말이 없이 그냥 가난한 자로만 되어있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이 많은 누가의 의도가 잘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두 복음서 간의 이런 차이는, 누가복음은 가난을 물질적인 가난 그 자체, 곧 경제적 결핍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마태복음은 가난을 무언가 결핍된 상태라기보다는 천국백성의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와 누가 둘 다 가난을 프토코스(πτώχος)라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극빈을 뜻한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그래서 도움을 청하기 위해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되는 가난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가난이란 히브리어 단어 에비온(אביון) 역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단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뿐만 아니라 포로된 사람’, ‘묶인 사람’, ‘슬퍼하는 사람’, ‘절망한 사람등을 다 포괄하는 개념이다(61:1~). 일반적으로 소외된모든 사람에 대한 총칭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내용에 비춰서 본문이 말한 천국백성의 태도로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겸손한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한 랍비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양쪽 주머니에 돌을 하나씩 넣고 다녀야 한다. 하나에는 나는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고 새기고, 다른 하나에는 세상이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새겨놓아라.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한 개씩 꺼내 사용해야 한다.’ 삶의 건강함이란 건강한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건강한 자의식은 자신이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는 겸손과 세상이 나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높은 자존감에 있다. 겸손과 자존감이라는 건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이 겸손이다. 이렇게 자신의 부족과 결핍,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잘 아는 겸손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겸손한 자를 뜻한다. 시편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란 표현이 자주 나오고 있는데, 이는 경제적인 결핍을 넘어서 겸손한 자를 의미한다(72:2,12,13 ). 그래서 어느 독일어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arm vor Gott’(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라고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란 곧 겸손한 사람이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태도를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파산 선고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자신이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기 의와 자만심, 자기 자랑, 생래적인 자질이나 배경을 부정하는 것이다. 주님을 담기 위하여 온전히 자기를 비운 것, 주님을 세우기 위해 자기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자기 속에는 죄밖에 없고, 자신의 행위나 노력, 성취를 내세우지 않는 것, 이것이 겸손이다. 성도의 행복은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비우고 주님으로 채워가는 데 있다. 바로 이 겸손이 천국백성의 소중한 자질이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의 은혜와 복이 쏟아진다. 천국은 이런 사람의 것이다. 천국은 자기 의를 포기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겸손한 사람이 아니고는 누구도 천국백성이 될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이라야 주님과 친밀함을 누릴 수가 있다. 주님은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시기 때문이다.

 

절대의존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다.

심령의 가난은 주님께 대한 의존적 태도를 갖게 한다. 가난한 자란 비천하고 무력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전적으로 주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정의에서 이미 이를 확인하였다심령의 가난은 주님 앞에 자신을 파산(破散)선고하는 것과 같고, 이 토대 위에서 주님을 필요로 한다는 인간의 총체적인 고백이다. 또한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전적인 무능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겸손한 고백이다. 때문에 항상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게 되고, 전폭적인 의존적 태도를 갖게 된다.

 

성경에 두 사람의 기도자가 나온다(18:9~14). 한 사람은 자타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세리.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바리새인은 함께 기도하러 간 세리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음을 감사드리며(11),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자랑처럼 늘어놓았다(12). 놀랍게도 그의 기도에는 자랑만 있지 은혜를 구하는 표현이 단 한 마디도 없다. 자기 의(부요함)에 도취된 사람의 전형이다. 반면에 세리는 머리를 들지도 못하고 가슴만 쳤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 서럽게 외쳤다. 놀라운 역전이 일어났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세리였기 때문이다(14). 세리가 곧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자기 의를 부정하고, 자신에 대하여 철저하게 절망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간절히 주님의 긍휼을 구하게 되었다.

 

가난의 유익 중 하나가 우리를 겸손하게 하여 주님을 바라보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건강할 때는 신앙과 담을 쌓고 살았는데, 병이라고 하는, 혹은 사고라고 하는 뜻하지 않는 가난으로 인하여 그 담이 허물어지고 주님을 찾게 되는 예가 종종 있다. 가난으로 자신의 부족과 결핍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고, 간절히 바라보게 된 것이다. 가난은 결핍과 부족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구하고, 찾을 때까지 찾고, 열릴 때까지 두드리게 만든다. 성도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다. 항상 주님을 찾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목마르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이 성도다.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성도다. 여기에 성도의 행복이 있다. 천국백성은 주님께 목마르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목이 말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의지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이미 주님과 더불어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적용

사실 팔복은 현실의 가난한상황에 대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형태의 가난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다. 그렇지만 이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여 전적으로 주님만 의지하는 주님과 친밀한 천국의 백성답게 만들어가는 소중한 자질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이 직면한 가난한 상황을 유익이라고 고백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119:67). 고난처럼 힘들고 어려운 가난한 상황이 어떻게 유익이겠는가? 더욱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따름으로 유익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고난도 유익이 된 것이고, 유익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므로 심령의 가난은 성도에게 소중한 영적 스펙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복이고, 보배다. 우리의 교만을 무너뜨리고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세상 줄을 끊어주기 때문이다. 겸손히 주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고 갈망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12:16)에 매인 사단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의(6:33)를 구하는 주님의 종이 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심지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기도 했다. 주님께만 집중하고, 주님의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뜨겁게 섬기기 위해서다. 우리 역시 금년 한 해, 가난한 마음을 추구하여 주님께 목마르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목마르고, 주님의 말씀에 목마르고, 예배에 목마르고, 기도에 목마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주님과 더욱 친밀함 삶, 성숙한 영적 성장을 보장받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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