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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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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9,887회 작성일 22-01-2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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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자로 살기

22:24~27

2022. 1/23. 11:00

우두머리 코끼리 구별법

코끼리에 대한 감동적인 글을 하나 읽었다.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에는 코끼리 보호소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일찍 어미를 잃은 생후 2년 미만의 새끼 코끼리들이 야생 적응훈련을 하는데, 이곳 코끼리들은 새로 들어온 코끼리가 적응을 잘할 수 있도록 배려도 하고 도와주며, 자기보다 더 어리거나 아픈 코끼리를 보살핀다는 것이다. 무리 중에 어리거나 약한 일원이 있으면 모두가 힘을 합해 도와주는 코끼리 떼의 생활습속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눈에 띄었던 것은 코끼리 무리에서 우두머리를 알아내는 법이었다. 그것은 매우 쉬운 일로 다른 코끼리를 가장 많이 보살피고, 도와주는 코끼리가 곧 우두머리라고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나무를 쓰러뜨려 키가 작은 코끼리와 어린 코끼리가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밀렵꾼이나 맹수가 공격하면 온 몸으로 동료를 보호한다. 실제로 야생에서 밀렵꾼이 접근했을 때 무리를 구해내느라 총을 맞아 몸에 총알이 박혀있는 우두머리 코끼리를 더러 만난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가장 헌신적이고, 가장 희생적이고, 가장 많이 섬긴 코끼리가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라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우두머리 코끼리가 보여준 리더십을 소위 섬기는리더십(Servant Leadership)이라고 한다.

 

 

섬기는 리더십의 유래

이렇게 코끼리 집단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는 이 섬기는 리더십이 인간사회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50년 정도 된다. 1977로버트 그린리프리더로서의 서번트라는 책을 통해 섬기는 리더십의 기본이론을 정립하여 발표하였다. 리더가 되려면 먼저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리더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헤르만 헤세의 동방순례에 나오는 레오라는 인물을 롤 모델로 삼았다동방순례를 위해 결맹이라는 순례단이 만들어졌다. 이 순례단에는 자발적으로 함께하여 일을 돕는 하인들이 있었는데, 레오도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는 순례단의 대소사를 돕고, 노래도 부르고, 휘파람도 불어 순례단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심지어는 나비도, 새도, 개도 그를 따랐다. 그런 그가 모로비오 계곡에서 갑자기 사라지자 순례단은 중심을 잃고, 허둥지둥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무리를 이끌고 동방으로 나아갈 리더는 보이지 않고, 사분오열되고 말았다사실 이 순례단을 드러나지 않게 이끌고 왔던 사람이 바로 하인 레오였던 것이다하인처럼 섬기던 사람이 순례단의 리더였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다이와 같은 레오의 섬김이 섬기는리더십의 기원이 되었다. 이후 섬기는 리더십은 여러 기업과 조직경영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지금도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사실 섬기는 리더십은 성경이 줄곧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도우시는 분이라고 여러 번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다. 적어도 16번 이상 이 표현이 나오고 있다. 신약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14:16)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 자신도 보혜사라는 뜻이다. 보혜사란 돕는 자란 뜻으로, 영어로는 ‘Helper’. 그러니까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모두가 우리를 돕는 자’(Helper)시란 뜻이다. ,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섬기시는 분이시란 의미다. 그러므로 섬기는 리더십은 우리 기독교의 핵심 리더십이다. 본문 역시 이와 같은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누가 크냐?

주님과 이 땅에서 마지막 식사를 나누는 엄숙한 자리에서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다툼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이다. 그 이유는 누가 크냐?’였다. 주님이 왕이 되셨을 때 누가 더 높은 자리, 누가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대한 다툼이었다. 자신이 더 우위를 차지하려는 이전투구로 그들의 마음이 나뉘게 되었다. 이는 이제 몇 시간 후면 잡히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보면, 이것이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중요한 기도내용이 되기도 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7:11). 서로 존중히 여겨 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높아지려는 야망 때문에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 짓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시점에 같은 일이 있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신 주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신 다음 수난을 예고하셨다(9:44). 그때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9:46). 주님은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고 했는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왕이 되기 위해 올라가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런 다툼을 일으킨 것이다. 본문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그들은 어떻게 요직을 차지하느냐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과 다른 제자의 존재방식에대하여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다.’(26). 이는 제자의 존재방식에 대한 말씀이다. , 큰 사람은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세속적인 방식과 가치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말씀이다. 제자는 세속적인 방식이나 가치, 기준에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삶의 실천이 곧 섬김이다. 제자들 사이에 화목이 깨지고, 하나됨이 깨지고, 다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그들이 이런 삶의 방식을 몰랐기 때문이다. 자크 엘룰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성도는 그 자체로 혁명성을 갖는다고 했다. 주님의 삶이, 복음의 실현이 곧 세상의 방식과 가치, 기준을 뒤집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섬기는 자로서 너희 중에 있노라!

특히 본문에 아주 역설적인 말씀이 나온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 중에 있노라.’(27). 이는 당시 최후만찬의 장면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앉아서 먹고 있고, 주님은 그들의 식사시중을 들고 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회적 통념은 앉아서 먹는 자가 시중드는 자보다 큰 자다. 그런데 주님은 주와 스승이면서 사회적 통념과 달리 제자들의 식사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다. 제자의 삶의 방식, 더 나아가 천국백성의 삶의 방식을 몸소 실천해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비슷한 장면이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만찬 후에 주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장면이 그것이다. 이는 하인이 주인에게, 제자가 스승에게 해야 할 일인데,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그것도 배신자 가룟유다의 발까지 씻겨주셨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시중들었다는 것은 주님의 삶을 통칭한 은유적 표현으로(J. 바이스), 주님의 삶이 섬기는 삶이었다는 것을 선언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내가 주목한 말씀이다.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 중에 있노라.이는 현재 주님께서 제자들의 식사시중을 들고 계신다는 뜻과 함께 주님의 존재방식에 대한 선언이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 계시고, 또한 섬기는 곳에 계신다는 뜻이다. 앞에서 제자의 존재방식으로서 섬김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제자는 따르는 사람이니까 주님이 섬기는 자로 계시고, 또한 섬기는 곳에 계신 것처럼 제자 역시 섬기는 자로 살고 섬기는 자리에 항상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간 강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점이다. 여기에 주님을 만나는 방법, 주님을 경험하는 방법, 주님과의 친밀감을 쌓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경험하고, 주님과 친밀함을 쌓는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가 섬기는이다. 섬기는 자로 살 때, 섬기는 곳에 있을 때 주님을 만나고 주님과 더욱 친밀해 질 수가 있다.

 

 

내려가는 길에 만난 예수님

헨리 나우웬을 잘 알 것이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학교 교수로, 20여 권의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그는 한참 잘 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교수직을 던지고 정신지체 장애우 시설(Day Break)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들을 목욕시키고, 옷을 가라 입히고, 용변 보는 일을 돕고, 식사수발 등을 했다. 그때 그를 아끼는 많은 지인이 찾아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곳이 여긴가? 이들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던 대학을 떠났단 말인가?’ 그는 그저 침묵만 하고 있다가 그들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책을 한 권 냈다. 그 책이 바로 예수님 이름으로이다. 그는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생의 오르막에서는 주님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었는데, 내려오니 주님을 만날 수가 있고 체험할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세속적인 성취를 모두 버리고 장애우 시설을 찾은 것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주님과 더욱 친밀한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소위 영적 발돋음을 위해 밑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온갖 방법으로 위로 오를 것을 암시한다. 정상에 오르기, 각광 받기, 기록 갱신하기....이런 것이 늘 주목의 대상이고, 신문의 앞면을 장식한다. 하지만 주님의 길은 전혀 다르다. 위로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다. 바닥으로 내려가고, 무대 뒤에 머물고, 어디서나 끝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시중을 받기보다 시중을 드는 자리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 계시고, 섬기는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감격스럽게 만나고, 체험하고, 주님과 더욱 친밀한 삶을 살기 위해선 섬기는 자가 되고, 항상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주님처럼 말 그대로 섬기는 자로서의 삶을 지향하고, 선택하고, 살아야한다. 특히 주님의 몸인 교회와 그 몸의 지체인 성도를 섬기는 자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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