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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의 거리를 결정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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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9,278회 작성일 22-04-24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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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의 거리를 결정짓는 것

20:1~9

2022. 4/24. 11:00

사람과의 거리

 

사장님과의 거리 42.195Km

친구와의 거리 110m

팀원과의 거리 1,000m

아빠와의 거리 400m

선임과의 거리 2,000m

함께 응원하면 우리 사이는 0m

 

 

2012년 런던올림픽이 한창이던 때, 모 기업의 우리사이의 거리란 광고 문구다. 이 거리는 실제적인 거리가 아니라 심적인 거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가까이 있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이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를 응원할 때만큼은 심리적 거리가 0m가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를 목표로 하여 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거리, 예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마라톤의 거리에 해당하는 42.195km인가? 아니면 한 몸과 같은 0m인가?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0m의 거리를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과의 거리를 0m로 좁힐 수 있을까? 이것은 모든 경건한 성도의 소망이자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본문은 주님을 가까이서 섬겼던 한 사람, 막달라 마리아를 소개하고 있다.

 

가까운 거리에서 주님을 따른 막달라 마리아

어려움에 처해보면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지난 주일에도 말했지만 위기와 관련하여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는 12제자들처럼 무섭고 두려워서 도망치거나 숨어버리는 사람, 둘째는 주님을 따르는 여인들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 그리고 셋째는 아리마대 요셉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사람이다. 막달라 마리아 역시 아리마대 요셉처럼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위기의 순간에 도망치거나 숨지 않고 주님께서 고난당하신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켰고, 부활절 꼭두새벽에 홀로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다(1). 이는 주님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복음서를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후, 그녀의 이름이 항상 가장 먼저 나오고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이것은 주님과의 거리를 보여준 것이다. 주님과 마음의 거리, 영적인 거리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것을 복음서 저자들이 강조한 것으로 본다.

 

본문 역시 이와 같은 마리아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부활절 새벽,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그녀 혼자서가장 먼저주님의 무덤을 찾았다. 그녀가 주님의 무덤을 찾은 것은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님의 부활은 생각도 못했던 것 같고, 그저 주님의 시신에 향을 바르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불과 3일 전에 장례를 치른 시신에 향을 바르기 위해 어두운 새벽에 무덤을 혼자서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주님을 향한 특별한 마음이 없는 한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 일로 그녀는 주님의 무덤을 가장 먼저 찾은 사람, 빈 무덤의 첫 목격자,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전한 첫 증인이라는 여러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에 첫 번째라는 수식이 네 번이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주님과 마음의 거리, 영적인 거리가 가까운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다. 이런 복을 막달라 마리아가 받은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성경학자 중에는 그녀가 주님의 부활을 계기로 초대교회 여성 지도자로 떠올랐다고 주장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 주님 죽으심과 부활사건과 관련하여 그녀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을 보아 이러한 주장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려면

마리아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아주 흔한 이름이다. 신약성경에 여러 명의 마리아가 나온다.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서 많이 언급되는 여제자다. 고향이 막달라(Magdalene)여서 막달라 마리아로 불렸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막달라 출신 마리아, 혹은 막달라 사람 마리아다. 막달라는 갈릴리 북서쪽에 위치한 염색과 직물업이 발달한 도시다. 이곳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그녀에 대하여 누가복음서만 그녀가 일곱 귀신에 들렸는데 주님께서 고쳐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8:3). 일곱 귀신 들렸다는 것은 그녀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그녀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장을 펼치게 된 것이다. 마귀의 종에서 주님의 자녀가 되어 헌신적인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주님의 공생애 동안 다른 여인들과 함께 주님과 제자들의 전도여행에 동행하며 헌신적으로 그 사역을 도왔다. 그러면서 주님과의 간격을 좁혀갔던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간격, 곧 영적인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자력(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힘)은 쇠의 종류가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자석에 있다. 특히 자석과의 거리가 결정을 짓는다. 자석과 가까이 있으면 자력이 강하고, 자석으로부터 멀어지면 자력이 약하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주님과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영적인 힘이 강력해지고, 주님을 닮는 경건한 사람이 된다. 이에 대한 좋은 모델이 막달라 마리아다. 주님을 모르고 살 때 마귀의 종으로 깨진 유리와 같은 버림받은 존재였는데, 주님을 만난 후 아름다운 모자이크와 같은 걸작이 되었다. 그녀는 어떻게 주님과의 간격을 좁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주님을 섬길 수 있었을까? 그래서 이런 복을 누리게 된 것일까?

 

우선,그녀는 주님을 남달리 사랑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이 단편적이나마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십자가의 행렬 속에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슬피 울며 따라갔다(27:56). 주님의 십자가 아래 가장 오래 머물렀고, 부활절 아침 어두운 새벽에 제일 먼저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다. 이와 같은 행동은 사랑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무덤을 찾아갔을 때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문이 열린 빈 무덤과 주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마음이 아파 슬피 울었다. 단순한 훌쩍인 것이 아니다. 큰 소리로 울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토록 주님을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받은 사랑 때문이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폐허와 같은 삶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 사람다운 삶을 회복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보답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며 사랑한 것이다. 대상에게 집중하고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다. 집중하고 몰두하다보면 간격이 좁혀지게 된다. 좋아하고 사랑하면 가까이하게 된다. 주님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면 가까이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남보다 더 자주 교회를 찾고, 예배를 사모하여 우선순위에 두고, 말씀을 항상 듣고 보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기도시간을 확보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섬기는 일에 앞장서고 싶어 한다. 사랑하면 이렇게 된다. 그러니 거리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다음은,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다. 무덤의 문이 열려있고, 주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 마리아는 이 사실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알렸고, 이 소식을 듣고 두 제자는 즉시 무덤으로 달려갔다. 두 제자는 빈 무덤과 시신이 사라진 것을 보고도 별 반응도 후속조치도 하지 않고 곧바로 무덤을 떠났다. 아마도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다. , 주님은 돌아가시고, 그 시신마저 사라지다보니 무엇인가 새로운 음모가 시작되고 있다고 여겼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아무런 조치도 않고 서둘러 무덤을 떠난 것 같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곳에 그녀만 두고 그들이 그냥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함정일 수 있으니 속히 이 자리를 피해야한다고 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리마대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주님의 시신을 찾기 위해 무덤을 떠나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 그리고 그 때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의 시신을 싼 천만 가지런히 놓여있던 빈 무덤에서 두 천사를 만난 것이다. 물론 그녀는 그들을 천사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무덤지기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천사였다. 천사는 그녀에게 왜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가벼운 꾸지람과 함께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녀에게 주님의 부활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천사였다. 그리고 이어 부활하신 주님도 만났다. 주님께서 먼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셨다. 상실의 슬픔에 빠진 그녀를 찾아오셔서 위로해주신 것이다. 이렇게 먼저 천사들이, 다음에 주님이 나타나셨다. 그리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주님은 애타게 찾는 이들을 만나 주신다(8:16).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고 부활소식을 전하는 첫 증인이 되었다. 주님을 가까이 한 사람이 누리는 복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구하는 자가 얻게 되고, 찾는 자가 찾게 되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 된다.

 

젖은 낙엽처럼

일본 주부들 사이에서 유행한 말인데, 정년퇴직하고 집안에만 있으면서 아내만 따라다니는 남편을 젖은 낙엽’(누레오치바)이라 부른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생긴 병을 은퇴남편 증후군이라고 한다. 나무에 달려있는 나뭇잎은 청청한 푸른색이든 단풍으로 물든 색이든 사람에게 찬사를 받는다. 그런데 낙엽이 되어 굴러다니거나 빗물에 젖어 땅바닥에 찰싹 붙어있으면 골치 아픈 짐 덩어리 취급을 받는다. 사람도 그렇다는 것이다. 산업의 역군으로, 가정의 기둥으로, 가족의 부양자로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 은퇴하자 이런 대접을 받는다니 인생이 참으로 씁쓸하다.

 

원래 사람이 그렇다. 사랑하는 배우자도, 아낌없이 주어 키운 자식도 젖은 낙엽처럼 달라붙으면 짐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그들의 삶이 있고, 침해당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은 우리가 젖은 낙엽처럼 찰싹 달라붙기를 원하신다. 그럴수록 기뻐하시고 좋아하신다. 그러니 사람에게 달라붙지 말고, 우리 주님께 달라붙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날마다 주님과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거리를 좁히려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께 집중하고 몰두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는 열정으로 주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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