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낮은 자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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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5,531회 작성일 22-07-03 22:28본문
리모델링, ‘낮은 자존감’
사49:1~4
2022. 7/3. 11:00
마음관리가 인생관리
플라시보(Placebo)란 말이 있다. 어떤 약에 특정한 유효성분이 들어있지 않은데도 마치 그것이 들어있는 것처럼 속여서 환자에게 투여하는 약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환자가 간호사에게 수면제를 요구한다. 이럴 때 어쩔 수 없이 수면제와 모양이 닮은 소화제를 수면제라 속이고 줄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소화제를 먹은 환자는 곧 편안하게 잠든다는 것이다. 열이 나는 환자에게 증류수를 해열제라고 속이고 주사하면 많은 경우 열이 내린다고 한다. 이런 것을 가리켜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혹은 ‘위약효과’(僞藥效果)라고 한다. 약보다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마음의 확신이 기적을 일으키고 병도 치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의 약 80%는 그 원인이 마음에 있고, 마음을 치료하면 병도 치료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잘 다스리고, 무엇보다도 이 마음을 깨끗하게 잘 관리는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곤충 중에서 눈이 가장 맑은 곤충이 무엇인지 아는가? ‘파리’라고 한다. 파리가 끊임없이 두 발로 얼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눈을 닦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리의 눈은 여러 개의 눈이 합쳐진 겹눈이다. 겹눈에 먼지라도 끼면 먹잇감이나 자기를 죽이려는 적의 모습이 여러 개로 겹쳐 보이게 된다. 때문에 많은 낱눈들을 하나하나 티 없이 깨끗하고 반들반들하게 열심히 닦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눈의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다. 파리가 열심히 눈을 닦는 것처럼 우리는 열심히 마음을 닦아야 한다. 마음에서 먼지나 오물을 깨끗이 닦아내야 한다. 성도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성도로서 잘 살기 위해서다. 마음을 티 없이 깨끗하고 밝고 맑고 선하게 유지시켜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팔복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볼 수가 있고, 또한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단의 전략적 무기
사단의 병기고에는 성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무기가 많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심리적인 무기다. 두려움, 의심, 분노, 욕심, 걱정, 열등의식, 낮은 자존감, 죄책감과 같은 것들이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약점을 이용하여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히며 파멸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심리적 무기는 ‘낮은 자존감’(Low self-esteem)이다. 낮은 자존감은 우리를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는 자기연민의 감정이다. 자기비하, 곧 부정적인 자기대화의 주범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 ‘옷이 참 예쁘네요.’ 라고 칭찬하면 ‘그렇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면 되는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이런 말을 들으면 ‘아니에요. 길거리에서 산 싸구려예요. 산 지 벌써 2년이 넘은 건데요.’ 라고 옷을 비하한다. 그러면서도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혼자서 속상해 하고, 기분이 나빠서 씩씩댄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원래 자존감이 낮을수록 자존심이 강한 법이다. 아무튼 낮은 자존감은 자신은 물론 관계, 일, 상황 등 모든 것을 왜곡시킨다. 그러다보니 편견이 심하고, 타인과 세계에 대해 부정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건강한 일상생활,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존감이 낮은 마음을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낮은 자존감’을 리모델링하는 것이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낮은 자존감의 원인
사실 낮은 자존감이 ㅢ외로 심각하다. 많은 성경의 사람들을 위험에 빠트렸던 사단의 전략적 무기가 바로 이 낮은 자존감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 가나안 정탐에 나선 10명의 지도자, 기드온, 골리앗 앞에 선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 기도로 하늘 문을 닫고 기도로 하늘에서 불과 비를 내리게 한 엘리야, 스러져가는 조국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던 예레미야, 고기뱃속에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온 요나, 신약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도 낮은 자존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본문도 그 중에 한 사건이다. 이와 같이 성경의 주요 인물들이 낮은 자존감에 시달렸다.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의 종의 노래가 네 편이 나온다(사42:1~4, 49:1~6, 50:4~9, 52:13~53:12). 본문은 두 번째 종의 노래다. 이 두 번째 종의 노래는 ‘이방의 빛’으로서 종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즉, 열방에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선교사적으로도 중요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종의 노래에서 특징적인 내용이 실패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4a).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준비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역하였지만 실패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는 히브리어로 ‘토후’(תהו)인데, 혼돈이란 뜻이다. ‘공연히’는 ‘헤벨’(הבל)이다. 헛되다는 뜻이다. 열심히 했는데, 결과는 토후이고, 헤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여 최선을 다했으나 결과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쓸데없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패로 낙담하는 종의 상황을 볼 수가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열심히 준비해서 최선을 다했는데 의미있는 결과가 없을 때 낙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실패의식은 낮은 자존감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물론 낮은 자존감의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실패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인 결론 단정 짓기’도 그 원인 중 하나다. 그렇지만 살면서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성공한 사람들은 많은 실패를 딛고 일어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실패는 우리의 삶에 큰 데미지를 주고, 이로 인하여 낮은 자존감에 빠지게 만든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이 낮은 자존감의 터널을 속히 빠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낮은 자존감을 리모델링하여 건강한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라!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은 낮은 자존감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건강하게 다시 일어섰다. 오히려 이 실패를 딛고 일어나서 하나님께 ‘이방의 빛’이라는 더 큰 사명을 부여받았다. 즉, 실패를 딛고 이방의 빛이 되었다. 그 비결이 실패의 고백에 이은 그의 선포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한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하나님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4b). 이는 한 마디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백이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 대한 판단이 하나님께 있고, 보상도 하나님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비슷한 말을 700년 후에 바울도 했다. 자신은 주님의 종이기에 주님 외에는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누구도 자기를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3,4). 주님의 종은 주님만 판단하실 수 있고, 보응도 주님이 주시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은 자신에 대한 판단도 보응도 하나님께 있다고 선포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이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히 기억하는 것이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는 중요한 비결이다. 우리도 살면서 여러 실패를 경험할 수 있고,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날 수 있고, 사단의 시험으로 여러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무너질 때 찾아오는 것이 낮은 자존감이다. 이것을 떨치고 일어나는 비결이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백성이 되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천국시민이다. 우리는 주님께 더 없이 소중한 보배다. 항상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자기 ‘비하적’ 언어를 자기 ‘보호적’ 언어로 바꿔라!
일전에도 말했지만 고마웠던 기억을 할 때는 뇌파가 안정이 되고 심박수가 줄어든 것이 확인이 되었다. 반면에 힘든 기억, 아픈 기억을 할 때는 뇌파가 불안정하고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처럼 심박수도 빨라졌다. 우리의 뇌는 현실과 기억, 현실과 생각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뇌 과학자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현실과 언어를 구별하는 능력도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짜증나는 현실과 상관없이 ‘짜증난다.’는 말을 하면 뇌는 그대로 믿는다고 한다. 그래서 짜증이 나는데 왜 멀쩡한 척하냐면서 온몸에 불쾌한 스트레스 호르몬을 쫙 뿌린다는 것이다. 반면에 ‘감사하다.’, ‘행복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뇌는 그대로 믿는다. 그러면서 감사하고 행복한데 왜 멀쩡한 척하냐면서 온몸에 행복 호르몬을 확 뿌린다. 다시 말하면우리의 말이 우리의 마음과 몸, 삶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못난 놈, 어리석은 놈, 의지가 약한 놈, 게으르고 한심한 놈, 무능한 놈 등과 같은 자기 비하적인 말(부정적인 자기대화)은 자존감을 무너뜨려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르는 역할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자기 이해적, 자기 보호적, 문제 해결적인 말(긍정적인 자기대화)은 자신감과 자존감을 주어 스스로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이 실패로 낙담하게 된 것도 ‘부정적인 자기대화’ 때문이었다. 누구도 그에게 그의 사역이 실패라고 말한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모든 것이 토후이고, 헤벨이 되었다고. 즉,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고 쓸데없이 되었다고 자기 비하적인 말을 스스로 한 것이다. 자신의 사역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말이 그를 낙담하게 만들고, 낮은 자존감에 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 회복되자 곧 회복아 되었고, 더 큰 사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다. 그러니 자기 비하적인 말을 자기 보호적인 말, 곧 부정적인 자기대화를 긍정적인 자기대화로 바꾸는 것이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말 관리가 참 중요하다. 결국 자신이 말한 대로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생리적으로도 그렇고, 신앙적으로도 그렇다. 하나님 또한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게 항상 힘이 되는 말, 복이 되는 말, 살리는 말, 인정해주는 말, 격려하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이는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성도는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의미있는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 ‘의미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s)라고 한다. 의미있는 타자의 말은 영향력이 크다. 그러니 서로에게 영적 자신감과 자존감을 키워주는 말을 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고, 자기 보호적인 말을 통해 낮은 자존감을 리모델링하자! 그리하여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건강한 가정, 건강한 교회,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일꾼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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