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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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7,127회 작성일 22-07-17 17:19본문
리모델링, ‘감사’
합3:16~19
2022. 7/17. 11:00(입당 및 맥추감사)
늦었지만 맥추절을 지킨 이유
우리에게 의미없는 날이 없지만 특히 오늘은 우리와 우리교회에 의미가 깊은 날이다. 개척이후 가장 큰 공사였던 교회 리모델링을 은혜롭게 잘 마치고 입당예배와 함께 맥추 감사예배를 드리게 된 점이다. 지난 5월 사건이긴 하지만 첫 장로로 세분을 피택해서 감사예배와 더불어 입당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더욱 감격스럽다. 농사를 짓지도 않는 우리가 감사절을 지킨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감사절을 통하여 잊었던 감사를 회복하기 위해 이 절기를 지킨 것이다. 즉, 감사하는 마음을 훈련하는 날이 감사절이다. 특히 맥추절은 1년 중 그 절반을 산 것에 대해 감사하는 절기다. 주님께서 지나간 반년을 어떻게 함께 하셨고 복을 주셨는지, 그 받은 복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앞으로 남은 반년도 그렇게 인도하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하는 절기가 맥추절이다. 이렇게 살아온 시간을 기억하고, 살아갈 시간을 기대하면서 감사를 훈련할 때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감사로 물든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행복은 감사의 그림자이다. 그래서 감사가 있는 곳에 항상 행복이 얼굴을 내민다. 많이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행복한 것이다. 높은 사회적 지위나 좋은 평판을 가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행복한 것이다. 좋은 일이 있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행복한 것이다. 호의호식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행복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하면 행복하게 된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해도 감사하면 행복하게 된다. 좋은 일이 없어도 감사하면 행복하게 된다. 잘 입고 잘 먹지 못해도 감사하면 행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감사가 관건이다. 그러면 이런 감사의 생각, 감사의 태도가 어디서 올까?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에서 온다. 믿음은 환경과 상황에 묶이지 않고 초월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믿음은 절대긍정이다. 모든 상황을 ‘아멘’으로 반응하게 만든 것이 믿음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가 있다. 본문의 주인공 하바국 선지자가 좋은 모델이다.
불평꾼이 절대감사의 사람으로
하바국은 주전 600년경 유다말기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하박국이란 이름은 ‘포옹’, ‘껴안다.’ ‘달라붙다.’는 뜻이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대언자다. 그래서 예언서나 성경에 나온 예언자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선포만 하였다. 그런데 하박국은 하나님 편이 아니라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 따지듯 호소했다.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하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하나님께 제기하고, 그 회답을 받아 백성에게 전하였다. 하박국은 사회에 대한 남다른 의식을 가진 선지자였다. 그래서 그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따졌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세상이 어찌하여 이 모양입니까?’ ‘어찌하여 저로 불의를 보게 하시며, 죄악을 쳐다보게 하십니까?’ ‘왜 나쁜 놈들은 잘 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당합니까?’ ‘악한 자가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파괴시키고 있는데, 어찌하여 그들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계십니까?’ 이런 모습이 주로 1장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방법에 마치 회의를 품고 항의하듯 ‘어찌하여’를 연발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하바국을 ‘어찌하여’ 선지자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인 선지자가 지독한 불평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그의 모습은 1장으로 끝이 나고, 2장에서 새로운 계시를 접한 이후 회의적인 태도와 항의하듯 따지는 그의 말은 사라진다. 그리고 3장에서는 감사로 가득 찬 찬양을 쏟아낸다. 침략자 바벨론의 말발굽소리가 쟁쟁하게 들릴 만큼 나라의 정세는 점점 악화되고, 극심한 가뭄으로 논밭의 소출이 없고, 과일나무의 열매도 없고, 가축도 없는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데도 선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고 고백한다. 소위 ‘절대감사’를 고백한 것이다. 지독한 불평꾼에서 절대감사의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의 변화,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믿음’이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는 말씀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믿음의 생각, 믿음의 태도를 가지고 살면 이런 변화가 따른다. 환경과 상황에 묶이지 않고 초월하게 만든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어려움 중에도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도 그 근원은 믿음이고, 또 세상을 이기며 차원높이 오를 수 있는 능력도 믿음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본서이고, 이를 삶으로 잘 보여준 사람이 하바국 선지자다.
불평을 감사로 바꿔주는 믿음이라는 스위치
영어로 ‘감사’(thank)라는 단어가 ‘생각’(think)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는 감사와 생각이 서로 밀접하다는 뜻이다. 그렇다. 생각하면 기억하게 되고, 기억하면 감사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들을 늘 생각하여 기억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위해서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생각해서 기억한다고 감사로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1장의 하바국처럼 오히려 원망과 불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과 기억이 원망과 불평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망과 불평으로 흐르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과 기억을 변환시켜주는 스위치가 있다. 그것이 믿음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선지자 하바국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 그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불평거리였고 원망거리였다. 그래서 지독한 불평꾼이 되었다. 그런데 믿음의 스위치를 켜자 삶의 태도가 완전히 감사모드로 바뀌어버렸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기에 이와 같은 역사를 만들어낼까? 본문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본문을 통해서 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최후 승리를 믿는 믿음
절망, 혹은 낙심을 영어로 disappointment라고 한다. 그런데 맨 앞의 한 글자를 바꾸면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d’를 ‘h’로 바꾸면 his appointment 즉, ‘그의 약속’이란 뜻이 된다. 그리고 이 ‘h’를 대문자 ‘H’로 바꾸면 ‘하나님의 약속’이 된다. 믿음의 사람은 어려운 현실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다. 그 약속은 의인의 궁극적인 승리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이 사실 때문에 의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고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상황이나 현실과 상관없이 결국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유다를 침략하여 멸망시켰던 바벨론은 한 때 세계를 제패였으나 한 번 무너진 다음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렇지만 유다는 바벨론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 주변 강대국에게 수없이 짓밟혀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섰다. 그들을 괴롭혔던 나라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어도 유다는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 세계 어떤 나라도 얏 볼 수 없는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이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이고 모범이다. 하나님의 사람도 넘어질 수는 있으나 반드시 다시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보증해주는 것이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하바국으로 하여금 갈수록 나라의 상황이 나빠지고, 침략자의 소리에 창자가 흔들이고 입술이 떨려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하며 기뻐할 수 있도록 했다. 악인의 실패와 의인의 궁극적인 승리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그를 절대감사의 사람이 되게 하였다. 그렇다. 이 믿음은 우리도 상황을 초월하여 감사하도록 만들고, 더욱 너그럽게, 더욱 여유롭게 살도록 만든다. 감사가 우리의 삶을 압도하도록, 우리의 삶이 감사로 물들도록 만든다. 우리 삶을 감사로 리모델링하는 방법이 바로 이 믿음이다. 궁극적인 승리를 믿는 믿음이다.
절망 중에 소망을 잃지 않는 믿음
사회학자 에릭 프롬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고 정의했다. 소망하는 인간이란 뜻이다. 사람은 공기가 없어도 1분을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없으면 1초를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인간은 소망을 먹고 사는 존재라 그렇다. 사람에게 먹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다. 흔히 ‘먹고 살기 위해서 그랬다.’ 혹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랬다.’고 말하면 어지간한 일은 이해하고, 또한 눈감아 준다. 동정을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보다 더 절실하고 중요한 것이 소망이다. 소망은 영혼의 산소와 같다. 그런데 이 소중한 희망, 곧 소망의 근거가 믿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이니.’(히11:1). 여기서 ‘실상’이란 ‘아래서 받쳐주는 것’을 뜻한데,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근거, 기초라는 의미다. 믿음이 모든 것의 근거(기초), 특히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것, 곧 소망의 기초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증서란 뜻이다. 즉, 땅이나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공적으로 보증해주는 등기 권리증과 같은 것이다. 비록 내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어도 권리증만 가지고 있으면 땅이나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받을 수가 있다. 믿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눈으로 보지 못하고,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을 보증해주는 것이 믿음이란 뜻이다. 그리고 ‘증거’란 말은 내적 확신을 뜻한다. 모든 성도는 영생과 천국에 대한 소망, 천국에서 영원토록 누리게 복을 사모하며 산다. 그러나 아직 보지 못했고, 확인하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내적 확신을 갖게 해주는 것이 믿음이다. 본문에서 선지자는 ‘없고’를 연발하고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17,18).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했다. 배경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학벌도 없고, 재능도 없고, 건강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완포상태다. 그런데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한다는 것이다. 최후 승리를 보장해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런 극도의 어려운 상황 중에도 믿음이 작동하여 이러한 소망을 갖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감사로 리모델링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절망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누구나 행복이 엿보는 삶, 행복이 따라다니는 삶, 행복한 삶을 기대할 것이다. 또한 행복을 퍼뜨리는 삶을 꿈꿀 것이다. 그 비결은 절대감사에 있다. 행복은 감사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이 감사로 우리의 삶을 리모델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궁극적인 승리를 믿는 믿음과 어떤 어려움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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