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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일으키는 가장 큰 힘(07-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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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491회 작성일 07-09-24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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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일으키는 가장 큰 힘

행4:36~37

어떤 부부가 가파른 경사를 오르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너무 힘이 들어서 애교섞인 목소리로 남편에게 "여보~ 나좀 업어줘!" 남편은 힘들었지만 남자 체면에 할 수 없이 투덜거리며 아내를 업었습니다. 미안하면 가만히 업혀 있을 것이지 괜히 아내가 물었습니다. "어때, 나 무겁지?" 그러자 남편이 대답하기를 "그럼, 무겁지! 얼굴은 철판이지, 머리는 돌이지, 간은 부었지. 그러니 많이 무겁지."


또 한참을 걷다가 이번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나두 좀 업어줘봐!" 그랬습니다. 기가막힌 아내는 아까 업힌 빚이 있어서 할 수 없이 남편을 업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약 올리는 목소리로 "그래도 생각보다 가볍지?"라고 물었습니다. 이때다 싶은 아내가 "그럼, 가볍지. 머리는 비었지, 허파에 바람들어갔지, 양심 없지, 싸가지 없지. 굉장히 가벼워.라고 대답했습니다.


농담이지만 어쩐지 우리 삶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캘빈 밀러의 「격려」(The power of encouragement)라는 책에 나온 말입니다. 우리는 말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다. 우리의 말을 격려하는 데 사용할 때는 그것이 영원한 보물이 된다. 격려의 말은 자기혐오라는 질병에 허덕이는 세상 사람들을 치유하는 은혜의 혈청이다.


우리에게는 조용히 생색내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이 없어도 가능하고, 지식이나 특별한 기술도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사랑과 관심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남여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격려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다른 것, 모두가 충족이 되어도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인생을 헛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인생을 포기하려던 사람일지라도 따뜻한 격려를 받으면 삶의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격려를 사람을 일으키는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예수님은 따뜻한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의 형 안드레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 앞에 왔을 때, 예수님께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란 뜻입니다. 장차 반석과 같은 존재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 베드로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베드로를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또한 빌립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 앞에 나온 나다나엘에게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정직하고 이중성이 없는 성품을 지닌 사람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만나는 사람들을 따뜻한 격려로 세우셨던 분입니다. 


오늘 본문도 사람을 세우는 격려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을 바울되게 했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사람입니다. 본명은 요셉인데, 사도들이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바나바란 권위자란 뜻입니다.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 상담자 혹은 격려자란 뜻입니다. 바나바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는 비록 일인자는 아니었지만 일인자를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 바나바의 삶을 통해서 참된 격려자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에서 바나바는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우선 바울이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교회는 그를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바나바가 나서서 그를 믿어주고, 옹호해주고, 사도들에게 소개하여 받아들이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고향(길리기아 다소)에서 은거해 있던 바울을 찾아가서 안디옥으로 데려와 공동목회를 했습니다(행11:24). 바울의 인물됨과 신앙, 능력을 인정해 준 최초의 사람입니다.


바나바가 없으면 사도 바울도 없습니다. 바나바가 없었다면 바울은 진흙 속에 묵힌 진주와 같은 신세가 되었거나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여 이단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주 좋은 신앙인도 신앙 공동체를 벗어나면 잘못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사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다소 문제가 있어도 신앙 공동체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바른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현실 교회의 한계를 탄식하며 신앙 공동체를 뛰쳐나간 사람들은 다들 잘못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주장이 옳았을지라도 말입니다. 바울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를 만나 그의 신앙이 인정을 받고 신앙 공동체에 받아들여져서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기억되게 된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습니다(행15:37). 원인은 마가 요한이란 사람 때문입니다. 1차 선교여행 때 마가 요한이 밤빌리아에서 선교를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2차 선교여행에서도 데려가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을 데리고 가면 팀워크가 깨질 수 있다며 반대하였고, 바나바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문제로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어 갈라서서 되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여기에 두 사람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일에 우선을 두었다면, 바나바는 사람에 우선을 두었습니다. 사역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교회생활에서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일을 하는 곳이기보다는 사람을 세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고, 기회를 더 주는 사람. 일보다 사람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필요한 곳이 교회입니다. 결국 이런 바나바의 역할로 마가는 나중에 베드로의 제자로 주님의 신실한 일군이 되었고, 마가복음의 저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에게도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마가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마가복음은 없었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의견 다툼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받아주는 마음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의견은 틀릴 수 있어도 사람이 틀렸다!고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을 볼 때 다르다고 봐야지 틀리다고 봐서는 안 됩니다. 깊이 생각하면 차이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마다 차이를 주신 것은 대립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보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 거룩한 바탕과 가치관이 확고하면 성격 차이가 있고 의견이 다른 것이 오히려 상생과 축복의 기틀이 됩니다.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더 좋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격이 다른 사람을 꺼려하지 말고 그 성격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주고, 끊임없이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성격이 가장 아름답게 선용되어 나중에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큰 유익을 줄 것입니다.


2. 삶으로 본을 보인 사람입니다.

가나안 농군학교 창시자 김용기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순천에 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양손에는 못 자국이 둘씩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가족을 봉양하기 위해 목수일을 하면서 박힌 못(생활의 못)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박힌 못(구원의 못)이라고 했습니다. 어렸을 때였지만 이 말이 마음에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서울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무엇 때문이 이 농촌에서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하라는 놈은 많은데 하는 놈이 없어 하는 놈이 되고자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하라는 사람이기 전에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바로 앞을 보면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역사상의 교회들이 그토록 사모하면서 실천하고자 했던 내용입니다. 당시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 공동체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와 같은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당시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했습니다. 그렇게 부흥하면서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구브로 출신 의로운 부자였던 요셉이 자기 농장을 팔아 헌금했습니다. 요셉의 헌신으로 교회의 재정적 어려움이 해결되면서 사람들은 그를 바나바, 즉 격려자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집니다. 이는 실천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실천이 없는 사랑 역시 마찬가집니다. 실천을 통해 믿음도 사랑도 온전해 진다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믿음과 사랑에 있어서 실천의 본을 보여주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실천적 믿음과 사랑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된 것입니다. 특히 교회를 목양하고 있던 사도들에게 격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의 이름을 바나바라 붙여준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실천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됨을 기억합시다.


3. 수고 후 영광을 바라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제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11:24). 이는 안디옥 교회 담임목회자 바나바의 인품과 신앙에 대한 평가입니다. 바나바의 아름다운 인품과 신앙 때문에 안디옥 교회에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후 바나바의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바나바는 교회가 이렇게 폭발적으로 부흥하자 자기 고향에 묵혀있는 바울을 기억하게 되고, 그를 초청하여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깁니다. 안디옥으로 온 바울은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 영향력이 커져갑니다. 반면에 바나바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바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대해서 어떤 위협이나 질투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도행전을 보면 바나바와 사(바)울에 관한 기록이 처음에는 바나바와 울(행11:30; 행12:25; 행13:1,2; 행13:7)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차 전도여행 후반기부터 변화가 일어나 순서가 바울과 바나바로 바뀌었습니다(행13:43). 이처럼 바울이 드러나면서 바나바는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격려의 문제에서 실패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까지는 하지만 그를 세움으로 자신의 위치가 도전받는 것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격려는 남을 잘 높이는 것도 격려지만 자기를 잘 낮추는 것도 격려입니다. 진정한 격려자는 뒤로 물러서는 것을 잘합니다.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교회세습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왜 이런 용어가 신자들 입에서 사용되어야 하고,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뒤로 물러설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망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뒤로 물러설 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고에 대한 인정이나 영광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라는 청년의 가능성을 믿고 그를 후원해서 교회에 꼭 필요한 위대한 인물로 길러낸 후에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바울을 자기보다 앞세웠습니다. 만약 바나바가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사람이었다면 사도 바울은 탄생할 수가 없었습니다.


격려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바나바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격려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격려를 받지 못하면 영혼도 서서히 죽게 되고, 공동체도 죽게 됩니다. 그러나 격려를 받으면 영혼도 살아나게 됩니다. 지금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열심히 격려해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고등학교 때 한 학년을 2년 동안 다닌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낙제했느냐?고 묻자 그가 스스로를 격려하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올바른 길을 가려고 두 번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는 자신과 남을 격려할 줄 알았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폭격을 받아 공포에 떨고 있는 백성들을 격려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격려는 또 다른 격려를 만듭니다. 격려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격려 받고 싶으면 먼저 격려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격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진짜 똑똑한 사람은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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