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깊게, 그리고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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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128회 작성일 08-01-07 11:16본문
넓고 깊게, 그리고 멀리
창13:14-18
어떤 사람이 지게에 물을 날랐다. 지게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항아리가 하나씩 있었는데, 왼쪽은 금이 간 항아리였다. 물을 가득 채워서 출발했지만 집에 오면 왼쪽 항아리는 반쯤 비어 있었다. 물이 샜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른쪽 항아리는 가득 차 있었습니다. 왼쪽 항아리는 주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님, 나 때문에 항상 일을 두 번씩 하는 것 같아서 죄송해요. 나를 버리고 새 것으로 쓰세요.”
그러자 주인이 대답했다.
“나도 네가 금이 갔다는 것 안다. 그걸 알면서도 일부러 바꾸지 않았다. 우리가 지나온 길 양쪽을 바라보아라. 오른쪽에는 아무 생명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이지만, 왼쪽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해서 많은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느냐? 나는 그 생명을 즐긴단다.”
많은 사람이 완벽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자신의 금 간 모습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어떤 때는 자신을 가치없는 존재로 여겨 낙심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삭막하게 되는 것은 금이 간 사람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사람들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세상을 황무지로 만드는 똑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금이 간 항아리처럼 좀 부족해도 살리는 사람이 좋은 이웃이 아니겠는가? 한 방울의 물도 떨어뜨리지 않는 항아리는 주변을 황무지로 만든다. 약함과 부족함과 새는 물이 생명력이다. 이런 금이 간 항아리들 때문에 생명이 충만한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관점의 문제다. 어떤 사건과 사물을 대할 때,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는 굉장히 중요하다. 그 관점에 따라 평가와 생각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금이 간 항아리와 주인의 관점이 바로 이것을 보여준다. 금이 간 항아리는 자신은 금이 갔기에 쓸모가 없다고 말했으나 주인은 금이 갔기에 주변을 생명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가 지난 2일로 3주년을 맞았다. 우리 교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것은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교인 수, 교회 재정, 교회 사이즈 등으로 보느냐, 아니면 다른 관점에서 보느냐?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두 관점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시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관점에서, ‘교회가 미래를 위해 무엇을 심고 있느냐.’이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롯과 헤어진 아브람이 나온다.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같이 동행한 조카 롯에게 좋은 땅(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양보하고, 이제 홀로 가나안 땅에 남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아브람에게 세 가지 안목을 요구하신다.
첫째, ‘넓게’다.
넓은 안목을 가지라는 것이다.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양보한 좋은 땅 소돔과 고모라만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넓은 세계를 바라보라. 나만 보지 말고 이웃, 내 가정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가정, 내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 내 나라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보는 넓은 안목을 가지라는 것이다. 시야를 넓혀라.
폭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선 높은 데 올라가야 한다. 낮은 데서는 좁은 시야를 가질 수밖에 없다. 높은 데 올라가야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 높은 데로 올라가라함은 성장과 성숙을 의미한다. 사도바울은 말한다.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자가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 아이들은 자기 자신과 그 주변 밖에 못 본다. 성숙하지 못한 까닭이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시야가 넓다. 우리 역시 넓은 시야를 가진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 ‘멀리(길게)’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안목, 끝을 보는 안목이다. 당시 아브람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다음 세대를 보게 하신다. 15-16절에 세 번 나오는 단어가 있다. 바로 ‘자손’이란 단어다. 아직 그에게 자녀가 없었지만 자녀를 생각하고 바라보게 한 것이다. 당장 눈앞에 없음을 보지 말고 멀리 보라는 말씀이다.
믿음이란 시각이 변화된 것을 의미한다. 신앙은 멀리 보게 만들고, 불신앙은 가까이 있는 것에만 매달리게 만든다. 불신앙은 좋은 길, 편한 길을 보게 하고, 신앙은 좋은 끝을 보게 한다(마7:13~14). 끝을 보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당장 눈앞에 펼쳐진 길을 보지 않고, 멀리 끝을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눈앞의 삭막한 현실보다 티끌처럼 헤아릴 수 없는 자손, 즉 멀리 미래를 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은 우리 시대에만 누리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다음 세대에, 우리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유산이다. 그러므로 항상 멀리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과연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고민할 때다. 지금보다 5년 후, 10, 20, 100년 후가 더 아름답고 좋은 교회를 그려보면서 기도하고 준비하자.
셋째, ‘깊게’다.
눈에 보이는 대로(현상)가 아니라 그 너머를 보는 안목이다. 아브람의 조카 롯이 실패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현상만 보고 그것을 쫓은 사람이었다(창13:10).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화려한 겉모습은 보았지만 그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악행과 범죄는 보지 못했다.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소돔과 고모라의 겉모습에 반하여 그것을 택했으나 비참한 결말을 경험하게 되었다(창19장).
반면 아브람이 차지한 가나안 땅은 거칠고 메마른 땅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땅이다(창12:7). 그러므로 현실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고, 땅을 보지 말고 땅 속에 있는 보배를 보는, 그 땅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는 깊은 안목을 가져야 한다.
논어에, ‘君子는 喩於義(유어의)요, 小人은 喩於利(유어이)라.’고 했다. 그래서 ‘君子는 上達(天理)하고, 小人은 下達(人慾)이라.’고 하였다. 군자는 보이지 않는 ‘의’를 추구하기에 천리(天理)를 따르게 되나 소인은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기에 인간적인 욕심에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자 역시 육신을 위하여 먹고 입고 마시는 일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 보이지 않는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세속논리나 방식, 가치 등이 교회를 움직여서는 안된다. 신자들의 삶도 이런 것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 현상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역사를 보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따라 살아야 한다.
‘넓게’, ‘멀리(길게)’, ‘깊게’ 보는 눈은 하나님의 눈이다. 하나님은 단번에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여 보시고, 시작에서 끝을 보시는 눈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리고 사람의 외모가 아닌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안목을 구하자.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문제들을 보라! 좁은 시각, 자기 앞만 보는 짧은 시각, 피상적인 것만 보는 얄팍한 시각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쪼록 이제 우리 교회 이 3주년이 지난 3년을 돌아보면서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요구하셨던 ‘넓게’, ‘멀리(길게)’, ‘깊게’ 보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이런 안목으로 우리 자신과 가정, 그리고 교회의 아름다운 미래를 심자.
※함께 나눠봅시다.
1. 관점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2. 도전이 되거나 새롭게 결단한 내용은 무엇이며, 이 말씀을 당신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3. 이런 안목을 갖기 위한 당신의 결단이나 각오를 이야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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