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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두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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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593회 작성일 23-07-30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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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두면 위험하다!

11:24~26

2023. 7/30. 11:00(성령강림 후 아홉 째 주일

비워두면 위험하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빈곤과 범죄의 상징인 할렘가(Harlem)가 있다그곳은 18C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일궜는데지하철 계획으로 땅값이 폭등했다가 폭락하자흑인들이 싼 땅을 사서 들어오게 되었다. 흑인이 늘어나자 백인이 흑인을 피해 떠났고, 집이 텅텅 비었다빈집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소굴이 되었다건물마다 낙서와 쓰레기, 무질서로 더럽고 위험한 곳이 되었다. 그렇게 할렘가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허름한 초가(草家)라도 사람이 살면서 관리하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두면 폐가(廢家)가 된다. 집뿐만이 아니다. 자동차나 그릇, 연장 등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땅도 비워두면 잡초만 무성하게 되고, 결국은 황무지로 변한다. 사람의 마음도 비워두면 문제가 생긴다.

 

본문은 주님께서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두고 시비를 건 사람들과 논쟁하시고, 그 결론으로 주신 비유이다. 귀신이 살아 엉망이 된 집이 있었다. 귀신도 살 수 없을 만큼 그 집이 심각하게 망가졌다. 그래서 귀신이 그 집을 떠났고, 그 집은 깨끗이 수리가 되었다. 귀신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머물 곳이 없어 전에 살았던 집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집은 깨끗이 수리가 되어 있었는데, 비어있었다. 그래서 그 귀신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동료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갔고, 그 집의 형편은 더욱 악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말을 못하는 귀신을 쫓아내신 주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쫓아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귀신은 사람을 망가뜨리는 존재이지 고치고 회복시키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귀신과 달리 고치고 회복시키는 분이다. 동시에 주님의 역사를 경험한 뒤 계속 양육되지 못하고 그대로 있을 때 파괴적인 결과가 따라올 것에 대해서 경고이기도 하다(오늘 설교는 후자에 초점을 둠). 그러므로 비워두지 말아야 한다.청소하고 수리하였으면 집에 사람이 살아야 한다. 살면서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형편이 전보다 더 나빠진다.

 

존재적 진공상태 

이를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이 있다.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이라는 사람이다.삶의 의미를 찾아서(The Will to Meaning)라는 그의 책이 있는데, 그는 여기서 공허감과 무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공허감과 무의미에 시달리는 인간의 상태를 그는 존재적 진공상태’(existential vacuum)라고 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비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존재적 진공상태에 빠지는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 충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채울 수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동물은 충동(욕구)만 충족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다. 남들이 가진 대로 가지고, 남들이 먹는 대로 먹고, 남들이 하는 대로 문화, 풍속, 전통을 충실하게 따르고 즐긴다고 해서 존재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 존재적 진공상태를 벗어날 수가 없다. 존재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적 진공상태에 있는 사람은 두 가지 경우로 빠지기가 쉽다. 하나는 동조(同調)주의다. 무조건 남이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생각 없이 그냥 남이 하니까 하는 것이다. 이 사람에게 자기는 없다. 또 하나는 나치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빠진다.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강압적으로 해주기를 바라고, 자기는 그저 따라가고만 싶은 것이다. 그래서 독재자나 이단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 교회에서도 성도들이 동조주의, 나아가서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 교회가 목회자나 힘 있는 몇 사람에게 휘둘리고, 다른 성도는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은혜로 착각한다. 이것의 심각성을 주장한 사람이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라는 철학자다. 그녀는 지난 주일에 소개한 칼 야스퍼스의 제자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로, 히틀러 정권 출범 후, ()나치운동을 하다가 194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녀 1960년에 나치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체포되자 그의 재판을 참관하고, 그 기록을 1963예루살렘의 아이히만으로 발표했다. 이 때 그녀는 아이히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포악한 성정을 가진 악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오히려 너무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이웃 집 아저씨 같았다그녀가 이때 제시한 개념이 악의 평범성이다. 유대인 학살을 저지른 아이히만은 그저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이었고, 악의 근원은 평범한 곳에 있다고 주장했다.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 존재적 진공상태에 빠지면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비워두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다.

  

이런 유행가 가사가 있다.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그려야 할까. 내 젊음의 빈 노트에 무엇을 써야만 하나이는 누구나 고민해야 할 문제다. 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워진 곳을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존재적 진공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 한나 아렌트를 그것을 사유(생각)라고 했다. , 아이히만이 자신이 행하는 일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말의 영향력을 생각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생각이 없으니까 아무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비움이다. 우리 기독교에서도 비움을 강조한다. 자기부인이나 자기부정, 낮아짐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의 비움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채우기’ 위한 비움이다. 본문 또한 중요한 교훈이 바로 이것이다. 그저 청소하고 수리하여 비워두지 말고, 의미 있는 새로운 것으로 채우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속적이고 마귀적인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과 같은 정과 욕심을 비워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들로 채우라는 것이다. 이는 주님이 주인이 된 삶, 주님의 말씀이 주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인에 따라 집 안에 채우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집을 청소하고 수리한 이유는 그 집에 살기 위해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하심도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성전삼아 살시기 위해서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받은 은혜대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들로 채워야 한다. , 감사로 채우고, 기도로 채우고, 찬양으로 채우고, 말씀으로 채우고, 예배로 채우고, 헌신과 희생으로 채우고, 봉사와 섬김으로 채우어야 한다. 이렇게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빈집을 채워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다. 그러면 받은 은혜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게 되고(5;22~23), 이를 통하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다(15:8). 이것이 성도의 영광이다.



로버트 멍어(Robert B. Munger)가 쓴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라는 책이 있다. 집에 안방주방거실서재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여러 방이 있다는 것이다예수님이 어느 성도의 서재에 들어가 보셨다그 서재에는 정결한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는 책들이 있었다주님은 그 책들을 다 치우시고 성경을 놓게 하셨다. 그리고 주님의 초상화를 걸어두셨다그러자 주님께서 그 서재에 임재하시고 불결하고 잘못된 상념을 버리게 되었다다음으로 주님은 주방으로 들어가셨다주방에 들어가신 주님은 오늘 메뉴가 무엇이냐고 물으셨다그러자 주인이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메뉴는 돈과 학위와 증권이 주식이고명성과 행운에 관한 기사가 반찬입니다.’ 이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모르는 양식이 있단다. 그것은 야망이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다이 양식은 진정으로 너를 배부르게 할 것이고 만족하게 할 것이다.’ 등등이 책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주님과 교제하면서 주님을 진정한 인생의 주인의 섬기라는 것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의 삶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13).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삶의 특징이다. 주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사는 삶의 특징이다. 집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집 자체가 아니라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움막이라도 성인이 살고 있으면 성인의 집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가까운 강진에 김영랑의 생가가 있는데, 많은 사람이 그곳을 찾는다. 집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집을 찾는 이유는 시인 김영랑이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결정짓는 것도 내 자신이 아니다. 나의 마음에 누구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느냐다. 이에 따라 나에 대한 평가, 의미, 가치가 달라진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을 비워내고 주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된다. 내면의 충만함, 곧 행복의 절정을 경험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잠시도 비워두지 말고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인생, 주님의 말씀에 초점을 두고 주님께만 집중한 인생, 그리하여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면의 충만함, 행복의 절정을 경험하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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