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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보다 복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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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020회 작성일 23-08-0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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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보다 복 있는 사람

11:27~28

2023. 8/6. 11:00(성령강림 후 열번째 주일

부모의 복

동양의 옛 성현은 효()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하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 신체와 머리털, 심지어 피부까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이것을 훼손하지 않고 잘 관리하고 가꾸는 것이 효도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 자신의 몸을 소중히 간직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해서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이어서 또 이렇게 말한다. 입신행도(立身行道)하여 양명후세(揚名後世)로 이현부모(以顯父母)가 효지종야(孝之終也).’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드높여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라는 뜻이다. ,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잘 하고 바른 길을 걸어서 부모가 칭찬을 받고, 그래서 부모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 효도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의도적으로 폄훼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대로 주님께서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낸 사건을 두고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혀 행한 것이라고 악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 마디로 주님께서 귀신에 사로잡힌 자라는 것이다. 반면에 주님께서 하신 일과 가르치신 말씀을 듣고 감탄한 사람도 있었다. 본문에 나온 어떤 여인이 그 주인공이다. 누군지를 누가복음 저자는 밝히고 있지 않으나 이 여인은 주님께서 하신 일과 가르치심에 감동하여 주님을 낳은 어머니 마리아를 칭찬하기에 이른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27). 주님을 낳고 기른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1장에 나온 마리아의 노래가 성취되고 있는 장면이다.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라.’(1:48). 자식이 잘나니까 부모가 칭찬을 받은 것이다. 이런 것이 동양에서 말한 효도의 완성이다. 이로써 주님은 어머니에게 최고의 효도를 한 셈이다. 사실 만남이 큰 복이다. 자식의 복이 좋은 부모를 만난 것이라면 부모의 복은 자랑스러운 자식을 만난 것이다. 목회자의 복은 좋은 성도를 만난 것이고, 성도의 복 역시 신실한 목회자를 만난 것이다. 주님은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자식이었고 복이 된 자식이었다.

 

 

주님의 반응

그렇지만 주님은 이 여인의 이 말에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보다 이 말을 한 여인이 더 복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28). 주님을 낳고 기른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엔 설명이 필요하다. 마태와 마가복음을 보면 주님의 바알세불 논쟁에 이어 주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주님을 찾아온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그 사건을 생략하고 본문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분을 이해하려며 마태와 마가복음을 연결해서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이러라.’(3:30,31). 주님이 귀신에 사로잡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잡아가려고 온 것이었다. 이 말은 그들이 주님의 사역과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주님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에 휘둘린 것이고, 주님을 붙잡아가려고 온 것이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는 어떤여인은 주님의 사역과 삶에 감동을 받아 주님을 낳고 기른 어머니가 복이 있다고 외친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 여인의 말을 듣고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다.

 

 

듣는 사람이 복이 있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고 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믿음뿐만이 아니다. 소망도 사랑도 들음에서 난다. 소망도 사랑도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자꾸 소망의 말씀을 듣고, 사랑의 말씀을 듣다보니 소망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잘 듣는 것이 복이다. 특히 소망을 히브리어로 티크바’(תִּקְוָה)라고 하는데, 티크바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알파벳 값의 합이 511이다. 그런데 이 511은 복이 있다는 단어의 값과 일치한다.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사랑이 생기니 듣는 것이 복인 것이다. 들으라는 말과 함께 들음이 복이라는 말씀이 성경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이유다. 그러므로 복 있는 신앙생활, 복 있는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복을 잔득 담아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듣되, 잘 듣고 많이 듣고 올바로 들어야 한다. 똑 같이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또한 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폄훼했고, 본문의 여인처럼 어떤 사람은 찬양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사람에게서 같은 말을 듣고도 이런 반응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이것은 듣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한자 들을()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듣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올바른() 마음()으로 듣는 것을 뜻한다. 어떤 분이 잘 듣는다는 것은 우리 삶에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넓혀가는 것이라고 했다. 듣는 것이 곧 삶의 숨구멍이라는 것이다. 잘 듣는 사람은 삶이 건강하고, 관계 또한 건강할 수밖에 없다. 잘 들으면 그만큼 삶의 숨구멍이 생기고, 또한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잘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적 생활에서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영적 숨구멍을 만들고, 또한 넓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낳고 길러준 어머니 마리아보다 자신의 말씀을 주의 깊게 잘 들어준 여인이 더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사실 듣는 것은 관심과 사랑, 존중의 표현이다. 부부간에 상대방이 잘 듣지 않을 때 섭섭해 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말을 안 듣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관심 없음, 사랑 없음, 존중하지 않음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이 곧 주님에 대한 관심과 사랑, 존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존중한 사람에게 주님의 복이 부어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참고, 살전2:13). 나 역시 여러분이 항상 고마운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주변에 설교 잘하는 목회자, 특히 유튜브 방송에 유명한 목회자의 설교방송이 즐비한데 내 설교를 듣겠다고 꼬박꼬박 교회를 찾아오고, 게다가 경청하여 잘 들어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

지키는(순종하는) 것은 듣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듣는 법을 배우면 지키는 삶을 살게 된다. ‘순종하다.’는 말은 듣다.’는 뜻의 라틴어 단어 아우디레’(audire)에서 왔다. 순종하다는 뜻의 영어단어 오베이’(obey)는 라틴어 오베디레’(obedire)가 어원이다. 이는 ob(~)audire(귀 기울이다, 듣다)가 합쳐진 단어다. ‘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שמע’(솨마)순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듣는 것과 지키는 것이 성경에서 자주 결합되어 나온다. 둘은 성경적으로 불가분의 개념이다. 사실 본문에서 주님께서도 듣고 지키는 자를 하나로 결합하여 말씀하셨다(편의상 분리하여 설명한 것). 듣는 것의 중요성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듣지 않은 것보다는 듣는 것이 낫지만 듣고도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들은 것을 실천해야 들음의 가치가 나타난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주 들음과 지킴이 하나로 결합하여 나타난 이유다.

 

 

동의보감에 이런 말이 있다.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 , 좋은 약을 먹는 것보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낫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걷기와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보약을 먹는 것보다 식사를 잘 챙겨먹는 것이 중요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운동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부흥회나 세미나와 같은 특별한 영적 행사나 프로그램보다 꾸준한 예배생활과 지속적인 말씀묵상이 중요하고, 더욱 중요한 것은 들은 말씀 하나라도 붙잡고 실천하는 것이다.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다. 성경에 축복의 말씀이 아무리 많이 기록되어 있고, 그 말씀을 밤낮으로 듣고 묵상해도 그 말씀대로 살아보지 않으면 나와는 상관이 없다. 아무리 좋은 보약이 있어도 먹지 않으면 효과를 경험할 수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먹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 말씀도 그렇다. 그래서 주님은 부모자식이라는 혈연관계보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어디서 복을 찾아야 할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본문에 나온 어떤 여인의 생각에 공감을 한다. 잘난 자식이 있는 부모를 부러워하고, 훌륭한 부모를 가진 자녀를 부러워하고, 그럴듯한 배우자가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성공한 유명인을 친구로 둔 사람을 부러워하고, 존경받는 사람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이는 세상이 만들어낸 복이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복에 속고 있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여행을 많이 다니고, 맛있는 특별한 음식을 자주 먹고, 값비싼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고, 크고 좋은 집에 살고 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다고 하여 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복음이 아닌 것에서 기쁨을 찾고, 행복을 찾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복을 찾아야 할까? 그 답이 본문에 나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며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복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며 주님을 위해 참고 사는 것이 복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며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복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며 주님을 위해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복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며 살아도 죽어도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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