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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속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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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6,860회 작성일 23-08-2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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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속이야!

11:37~41, 12:1

2023. 8/20. 11:00(성령강림 후 열두 번째 주일

겉보다 속

몇 년 전, TV에서 방영되었던 모()기업의 광고카피다. ‘안에서 답을 찾았는데 밖에서 문제를 못 풀 리 없고, 안이 단단하면 밖이 흔들릴 리 없고, 안이 새로워졌는데 밖이 그대로일 리 없고, 세상의 모든 새로움은 안으로부터 시작된다.’ 광고 속 인물들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려는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있다. 어려운 문제의 답을 찾고 있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 그 길에서 시선을 두어야 할 곳은 이 아니라 이라는 것이다. ‘이 아니라 이라는 것이다.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는 책의 저자 가브리엘 번스타인은 성공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일의 성공과 실패가 이미 마음에서 결정이 난다는 것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견고하게 설 수가 없고, 마음이 없으면 그 무엇도 성취하기 어렵다. 때문에 안이 중요하고, 마음이 중요하다.

 

바리새인의 초대

11:37절부터 12:1절까지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다. 본문은 그 배경과 결론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과 말씀에 감동을 받은 한 바리새인이 주님을 식사의 자리로 초대했다(37).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심포지움(symposium)이라는 전통이 있었다. 이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을 자기 집에 초청해 식사교제를 통해 가르침을 듣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바리새인은 적어도 주님에 대한 좋은 감정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특징 중에 하나다. 복음서에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주로 주님과 갈등관계로 기술이 되고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바리새인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 예가 본문이고, 본문뿐만 아니라 헤롯이 주님을 죽이려하는 것을 바리새인이 주님께 알려준다(13:31). 그들은 주님을 죽이려는 모의에 가담하지 않고, 그렇게 자주 등장하던 바리새인이 주님의 수난 이후에는 나오지 않으며, 그들은 주님의 죽음에 대해 어떤 관여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호의적으로 주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의 눈에 주님의 이상한 행동이 포착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결례행위를 주님께서 어긴 것이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38). 여기서 손을 씻는 것은 식사 전에 물그릇에 손을 담그는 것을 가리킨다. 원래 위생을 위한 것이었는데, 죄 많은 세상과 접촉으로 생긴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종교적인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상에 신앙적 의미를 부여하는 일상의 신학화, 신앙의 일상화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위생적인 식사습관을 경건한 제의적인 식사습관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하나의 예의와 관습을 넘어 종교적인 규범이었다. 그리고 이 제의적인 식사관습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철저히 지켰다. 따라서 이를 무시한 주님의 행위는 바리새인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랍비라면서 어떻게 식사 전 손 씻는 결례행위도 지키지 않는단 말인가? 이와 같은 바리새인의 태도에서 비롯하여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에 대한 주님의 책망이 54절까지 이어진다.

 

겉만 보는 눈

하지만, 주님의 이러한 행위, 곧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신 행위는 바리새인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행위를 질책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진정으로 씻어야 할 것은 손이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이다. 손에 묻은 먼저보다 마음에 쌓인 죄가 더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 앞부분과 연결하여 이는 바리새인의 잘못된 시각, 나쁜 눈을 책망하신 것이다. 겉만 보고, 겉에만 초점을 두고 자신의 내면을 보지 못한 그들의 건강()하지 못한 나쁜 눈, 형식적인 율법주의라는 프레임에 갇힌 그들의 시각을 책망하신 것이다. 마땅히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한 방향과 초점을 잃은 그들의 잘못된 시각을 책망하신 것이다. 또한 바리새인의 실상을 폭로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들의 실상이 겉만 반짝반짝 깨끗하게 씻어놓은 잔이나 대접과 같다는 것이다.

 

사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키는데 헌신적이었다. 세세한 내용에까지 시행규칙을 만들어 그것을 지켰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일상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의 종류를 39가지로 나누고, 그 각각에 대한 시행규칙을 만들었다. 그러니 안식일 하나만해도 수많은 시행규칙이 있었다. 10여 년 전,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을 때 감동을 받은 것이 하나 있다. 호텔마다 이스라엘 사람과 여행객이 사용하는 승강기가 따로 설치되어 있는데, 안식일에는 승강기가 자동으로 작동되었다. 이유는 안식일에 승강기 버튼을 누른 것도 금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동으로 층마다 서고 층마다 여닫히게 한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세심함과 열정에 감동을 받았다. 열심이 지나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였다. 본문이 좋은 예다. 그들에게는 주님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본문에서는 이상히 여겼다고만 기록하고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일로 주님을 비방한 것으로 기록됨). 하여간 율법에 열심을 가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지켜야한다. 그들은 겉으로 들어난 율법적 규례에만 초점을 두고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자신의 내면을 보지 못했다. 형식적인 율법주의라는 프레임에 갇혀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리새인의 누룩

그러면서 주님은 끝으로 바리새인의 누룩을 경계하셨다. ‘그동안에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2:1). 주님께서 경계하신 바리새인의 누룩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악독은 보지 못하고, 율법의 외적인 규례만 바라보는 잘못된 시각을 책망하신 후 선포된 6개의 (42~54). 3개는 바리새인에 대한 것이고, 3개는 율법교사에 대한 것이다. 우선, 주님은 바리새인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42), 명예욕(43),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삶의 태도(44)를 책망하셨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철저하게 드렸다.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린 것이 왜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는 십일조의 정신이 빠진 것이다. 무엇이든 정신이 빠지면 형식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 십일조는 다음의 명예욕과 연결이 된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들의 종교적인 열심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회당에서 인정받고 일상에서 존중받기 위해서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그들의 구제나 금식, 기도생활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구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은밀하게, 금식은 티내지 않고 하고,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고 하셨다. 그들이 경건활동을 이렇게 자기 명예욕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43절은 이에 대한 책망이다. 그리고 이런 그들의 태도는 겉으로는 일반 땅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시체가 들어있는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 했다. 이는 그들의 악한 영향력을 의미한다. 본질이 빠진 형식주의와 종교적인 위선, 악한 영향력이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주님께서 이와 같이 바리새인을 책망하시자 한 율법교사가 이것은 자신들까지 포함해서 모욕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율법교사는 대부분이 바리새파로 율법에 능통한 존경받는 율법학자들이다. 율법에 대한 전문 해석자이고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일명 서기관으로도 불리고 있다(12:28). 그러자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서도 3가지 화를 선언하셨다. 첫째는 온갖 율법의 시행규칙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지키고 하고 정작 자신들은 지키지 않는 위선적인 태도이고(46), 둘째는 자신의 경건을 선전하고자 조상들에게 죽임을 당한 선지자의 무덤을 치장한 것(47~51), 셋째는 지식의 열쇠(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는 열쇠)를 잘못 사용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52). 이를 자세히 따져보면 앞에서 소개한 본질이 빠진 형식주의와 종교적인 위선, 악한 영향력과 다르지 않다(바리새인의 화). , 이렇게 그들의 문제를 반복한 것은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심화하기 위한 것이다.

 

악한 누룩이 되지 않으려면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제외하곤 만물은 변한다. 시간에 따라 변한다. 세상도 변하고, 환경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신체도 변하고, 얼굴도, 마음도, 생각도 변한다. 교회도 변하고, 신앙도 변한다. 서글프게도 대부분이 좋은 쪽보다 나쁜 쪽으로 변한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도 처음부터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좋은 신앙전통과 신앙적 열심을 가졌음에도 악한 누룩으로 변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주변까지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이렇게 변질이 된 것일까?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적 시선이 방향과 초점을 잃었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말씀이란 거울을 통해 부단히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보고, 그것을 깨끗이 드러내는 훈련이 신앙생활이다. 그런데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거울 자체에만 집중하고, 심지어는 거울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혹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속보다 겉에, 안보다 밖에, 내용이나 정신보다 형식에 시선(관심)을 두고 꾸미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보니 본질이 빠진 형식주의, 종교적인 위선과 외식, 나쁜 영향을 끼친 악한 누룩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누룩이 되지 않으려면 신앙의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시선의 방향과 초점을 밖보다 안에, 겉보다 속에 두어야 한다. 형식보다 내용이나 정신에 두어야 한다. 말씀의 거울과 성령의 빛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여 내 안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찾아내서 제거해야 한다.그래야 본질이 빠진 형식주의와 신앙적 위선(외식)을 넘어설 수가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좋은 누룩이 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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