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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그 말을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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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542회 작성일 23-09-1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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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그 말을 못해서

12:8~9

2023. 9/10. 11:00(성령강림 후 열다섯 번째 주일

관계의 수준

지금은 기사거리가 되지도 않지만 전에는 신문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불륜기사였다. 불륜의 특징 중 하나가 숨기는’ 관계다.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한 관계다. 그래서 그 관계가 들통이 나면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큰 수치를 당했다. 이런 의미에서 관계에도 수준이 있다. 수준 낮은 관계의 대표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불륜처럼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는 것이다. 연애하는 사람도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숨어서 만나는 것은 높은 수준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드러내놓고 결혼을 하는 순간부터 책임과 의무가 포함된 높은 수준의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사이비나 이단이 여기에 속한다. 떳떳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자신을 숨기며 비밀스럽게 활동하는 것이 이들의 특징 중에 하나다. 마치 위장전입을 하고, 위장취업을 하듯 위장교인으로 교회에 등록하여 교회를 잘 섬기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어 교회를 혼란 빠뜨리는 사례가 종종 일어나고 있다. 요즘 이단이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다.

 

 

신앙도 낮은 수준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분명하고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자꾸 숨기려고 한다. 비근한 예로, 식사기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그냥 먹을 수는 없고 기도는 드려야겠는데 사람들에게 표가 날까봐 세수하든 두 손으로 위에서 아래로 얼굴을 쓰윽 닦아 내리면서 번개처럼 기도를 해치운 사람이 있다.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두 손을 이마에다 대고 간단하게 목례를 한 사람도 있다. 천주교인도 보니까 성호를 긋는데 빛의 속도로 긋고 밥을 먹는 것을 보았다. 물론 기도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났지만 드러내놓고 기도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러는 것이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는 것, 숨기고 싶은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의미일 수 있다. 아직 낮은 수준의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공개적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것은 성도로서 정체성이 분명하다는 뜻이고, 주님과의 관계가 수준이 높다는 뜻이다. 본문은 주님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말씀이다.

 

 

박해 앞에서 성도의 자세

4절부터 12절까지는 박해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 박해 앞에서 성도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지난주일 말씀은 몸만 죽이는 사람의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까지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이었고, 본문은 사람, 특히 박해자 앞에서 주님을 당당하게 시인하라는 말씀이다. 어떤 핍박에도 성도의 정체성을 잃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어서 10~12절 말씀은 박해자 앞에 끌려갔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적절한 말씀을 주시리라는 것이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사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두려워하며, 주님과의 성숙한 관계를 유지하고, 주님을 굳게 신뢰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일상생활은 물론 박해와 같은 비상상황에서 성도가 가져야 할 자세라는 것이다.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나를 시인하면.....’(8). 여기서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일수도 있지만 문맥상으로 앞에서 말씀한 몸을 죽이는 사람’(4)이다. 그러면 세상에서 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로마황제와 같은 절대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 앞에서, 금지된 이름을 부르고, 금지된 존재를 섬긴다고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일이 쉬운 일이겠는가? 이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거는 일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상황이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이 자신을 위한 거대한 신상을 금으로 만들어 세워놓고 만백성으로 그 신상에게 절을 하도록 했다. 만약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은 맹렬히 타는 불속에 던져 넣겠다고 위협했다. 그런데 유대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세 명의 청년, 사드락메삭아벳느고가 이를 거부했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기에 우상인 왕의 신상에게 절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왕 앞으로 잡혀갔고, 회유와 위협을 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외쳤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할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 아옵소서.’(3:17,18). 본문은 이와 같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기독교 초기 역사를 보면,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하기 전 2백년 이상 혹독하게 박해를 했는데, 당시 예수를 믿으려면 3가지를 각오해야 했다고 한다. 첫째 맞아죽을 각오, 둘째 얼어죽을 각오, 셋째 굶어죽을 각오가 그것이다. 재산몰수에 사회적인 지위와 안전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를 구주로 믿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이 많았고, 믿는 것이 드러났을 때 공개적으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해도 오히려 공개적으로 시인하며 죽음의 길을 택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에서도 그랬다. 당시 우리나라는 기독교 활동을 국법으로 금했다. 만약에 발각이 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이런 엄혹한 시절에 노춘경(盧春京)이라는 사람이 국내 첫 세례자가 되었는데, 그는 1886718일 선교사들이 보초를 선 가운데 목숨을 걸고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듬해 소래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도 왕이 목을 쳐도 좋소.’ 라며 죽음을 각오하고 세례를 청원했다세례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예식이다. 국법으로 금지가 되어 있고, 발각이 되면 죽을 수도 있는데,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한 배경에 본문의 말씀이 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8,9). 그러므로 주님을 사람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나는 믿는 사람이라는 고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맞아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를 하면서 주님을 선택한 것이고, 죽을 각오를 하면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에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또한 고백을 한다고 하여 특별한 불이익이 따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을 사람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관계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린 많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관계에도 수준이 있다. 당장에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를 생각해보라! 관계마다 수준이 있을 것이다. 관계를 숨기고 싶고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것은 관계의 수준이 낮고, 관계의 질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의 수준과 질이 높은 사람은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고, 심지어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자랑하게 된다. 뿐만 아니다. 그 사람을 위해 헌신과 희생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해도 어떤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데, 드러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믿는 것을 숨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과의 관계수준이 낮다는 뜻이다. 반면에 주님을 믿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만나는 사람에게 주님과의 관계를 드러내고, 나아가 주님을 믿도록 권면한다면, 그리고 주님을 위해 어떤 희생과 헌신도 아까워하지 않는다면 이는 주님과의 관계수준이 높고, 관계의 질이 좋다는 뜻이다. 본문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점이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어디서든 어느 때든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기꺼이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수준과 질을 높여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 주님과의 관계 수준을 높이고, 관계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지속적으로 예배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 한 마디를 못해서

2천년 교회역사는 순교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어느 곳에선 핍박과 순교가 진행되고 있다. 그들이 순교를 당한 것은 주님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것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박해자들이 요구한 대로 주님을 모른다는, 주님을 믿지 않겠다는 말 한 마디를 못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한 사람을 소개하면 초대교회 시대 폴리캅’(Polycarp, 69~155)이라는 교부다. 폴리캅은 요한계시록(2:8~11)에 언급된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12사도의 뒤를 이은 교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다툴 때 주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품에 안고 그들에게 교훈을 주신 일이 있는데, 그때 주님이 품에 안으셨던 그 아이가 바로 폴리캅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폴리캅은 사도 요한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서머나 지역에서 기독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순교를 당했다. 당시 서머나의 로마 총독은 폴리캅의 인품에 감동하여 그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니까 거짓으로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하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폴리캅은 총독의 제안을 거부했다. 호의는 고맙지만 거짓으로라도 주님을 부인할 수 없다며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의 종이었습니다. 그동안 그분은 단 한 번도 나를 부인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그분을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국 폴리캅은 산 채로 불태워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그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은 단 한 마디로 못해서 그렇다. 나는 예수를 모르오.’ 이 한 마디를 못해서 화형을 당했다. 폴리캅뿐만 아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박해를 받는 성도가 있고, 또한 순교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모른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말 한 마디면 살 수 있는데, 이 말을 못해서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름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하여 죽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살고,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주님께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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