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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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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661회 작성일 23-09-17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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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12:10~12

2023. 9/17. 11:00(성령강림 후 열여섯 번째 주일

혼자가 아니야!

()아메리카 인디언 중 체로키(Cherokee)부족이 있다. 이들은 독특한 훈련을 통해 부족의 소년들을 용사로 길렀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사냥, 정찰, 물고기 잡는 기술 등을 배운다. 그리고 성인이 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을 치르게 된다. 일종의 성인의식이다. 이 의식을 치르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 떨어진 숲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아들의 눈을 가린 채 홀로 그곳에 남겨둔다. 숲 속에서 혼자 밤을 보내도록 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가족과 부족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가족과 부족이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날 밤, 그는 눈이 가리어진 채 아침이 밝을 때까지 혼자서 숲 속에 있어야만 한다. 서늘한 바람이 수풀 사이로, 땅 위로 매섭게 몰아쳤다. 사방에서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왔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을까! 그렇게 밤을 홀로 이겨내야 진정한 남자로 거듭난다. 공포의 밤은 어느덧 지나가고 숲 사이로 새벽 미명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눈가리개를 벗고 기나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비로소 그의 눈에 주변의 꽃들과 나무, 작은 숲길이 보였다. 이때 그를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어렴풋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의 아버지였다. 지난 밤, 아버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들을 멀찍이서 숨을 죽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여차하면 보듬어주기 위해 뜬눈으로 함께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부모가 어떤 존재인지, 가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부모는 고락을 함께 하며 곁에서 나를 지켜봐주는 존재, 그리고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가족이다. 우리 주변에 나는 혼자야. 아무도 없어!’ 라고 외로움을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다. 현대인은 외로움을 고질병처럼, 혹은 또 하나의 장기처럼 달고 산다. 외로움이 현대인의 주요 키워드가 된 것이다. 현대인의 삶을 갉아먹는 심각한 마음의 병이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꼭 하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혼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사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혼자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우리 성도에게 있어선 더욱 그렇다. 우리에게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항상 지켜보고 계시는, 혹여 잊어버릴세라 손바닥에 기록해놓고 기억하시는 영적 아버지가 계시고, 고락을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말씀이다.

 

 

마땅히 할 말을 가르치리라.

지난 주일에 4~12절은 예수님께서 박해상황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11,12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리라.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이를 공개적으로 시인한 것 때문에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사람 앞으로 끌려갔을 때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이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께서 마땅히 할 말을 가르쳐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결코 우리를 박해의 현장에 혼자 두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혼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서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마땅히 할 말을 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박해나 박해자 앞에서 주눅이 들거나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하셔서 마땅히 할 말을 하게 하신 역사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마지막 당부 말씀에 순종하여 120여 명의 성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전심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셨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 이런 모습에 사람들이 놀라 신기하게 여기며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했다. 여기서 갈릴리 사람이란 말은 배움이 없고 무식한 사람에 대한 일종의 관용어다. 한 마디로 어떻게 배움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 무려 16개국에 온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한 것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3천 명이 회개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2:14~41)5천 명이나 믿게 된 솔로몬 행각의 설교(3:11~26)도 그렇다. 오순절 사건과 더불어 유대인이 죽인 예수님이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야이신 것을 구약성경을 근거한 베드로의 설교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놀란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4:13). 베드로의 유식함과 담대함에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성령이다.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16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말하게 하시고, 성경을 올바로 풀어 설명하게 하시고,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에 감동하여 믿게 하시고, 권능을 주셔서 태어나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을 걷게 하는 기적을 행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잡혀가시자 뿔뿔이 흩어졌던 겁쟁이들이 권세를 가진 사람의 위협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본문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모습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하심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역사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고,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

성령에 대한 이와 같은 사실을 알면 10절 말씀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이는 성령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신 말씀이다. 사실 이 말씀은 당연한 이야기다. 주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이나 주님을 거역하는 것이 모두 성령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 스스로 선택한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것이다. 또한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주님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은 예수님을 저주할 수가 없고,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말로 거역한 사람은 결국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거역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런 사람이 회개하여 주님을 믿으면 믿지 않을 때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그렇지만 본문은 이런 교리적인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그냥 주님과 성령을 단순 비교하여 성령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심지어 주님을 거역하는 사람도 용서를 받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성령의 역할이 성도의 삶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할 수가 있는 것이고(4~7), 박해자 앞에서도 당당하게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주님을 시인할 수가 있고(8~9), 어떤 위험한 상황에도 염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10~12). 그러므로 이런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과의 모든 관계를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기회가 다 닫히고 마는 것이다. 회개할 수도 없고, 주님을 믿을 수도 없다. 그래서 어떤 영적 혜택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가장 심각한 죄인 것이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With), 우리 안에(In), 그리고 우리를 위해(For) 계신 분이시다. 다정하게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항상 계시면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알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우리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다. 성령을 환영하고,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는 꿈이었다. 하늘 저편에 그가 살아온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쳤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그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다. 자기가 걸어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는 주님께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후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왜 저를 혼자 두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셨다.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버리지 않는다. 자세히 봐라. 네 시련과 고난의 시절에 한 쌍의 발자국이 누구의 것인지. 그것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다. 내가 너를 업고 간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자주 나는 혼자야. 아무도 없어!’ 라고 생각하며 탄식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은 이후 혼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때로는 업어주시고, 때로는 안아주셨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주님 등에 업힌 존재이고, 주님 품에 안긴 존재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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