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을 치유하는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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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391회 작성일 23-12-03 15:10본문
절망을 치유하는 약
사60:1~3
2023. 12/3. 11:00(대강절 첫째 주일)
희망은 절망을 몰아낸다.
희망은 산소와 같다. 사람은 호흡을 통해 산소가 공급되어야 살 수 있다. 산소가 부족하거나 없으면 질식사하고 만다. 스스로 호흡활동이 어려운 사람에게 산소 호흡기를 통해 산소를 공급하여 숨을 쉬도록 만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소가 공급되어야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건강하고 건전한 삶을 살 수가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갱도에 갇혔을지라도 희망이 있는 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언젠가는 건강해질 것이라는 희망, 끝내는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오늘보다 내일이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이런 희망은 현재의 어려움을 딛고 절망이란 긴 터널을 견뎌내게 하는 힘이다. 희망은 부정보다 긍정, 불가능보다 가능성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희망이 절망을 몰아낸다.
심리학에 ‘대체의 법칙’(law of substitution)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의 뇌는 두 가지 반대 감정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면, 희망과 절망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뇌에는 의자가 하나만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무엇이 먼저 앉느냐가 중요하다. 절망이 먼저 앉으면 희망이 함께 앉을 수 없고, 희망이 먼저 앉으면 절망이 함께 앉을 수 없다. 이 법칙을 올바르게 깨달으면 절망을 비롯한 여러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대적할 수 있다. 그러니 절망을 없애려고 싸우지 말고, 자꾸 희망을 품는 것이다. 이것이 절망을 몰아내는 상책이다. 논리적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이것이 쉽지 않다. 쉽다면 절망에 사로잡힐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믿음’이다. 믿음이 좋은 감정, 거룩하고 경건한 감정을 먼저 앉게 하여 부정적이고 나쁜 감정, 세속적인 감정을 대적하여 몰아낸다. 다시 말하면 절망이라는 어둠을 몰아내는 희망이라는 촛불이 인생의 세찬 바람 앞에 꺼질 때 꺼진 촛불을 다시 붙이는 성냥과 같은 것이 믿음이다. 험악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사람들이 경건한 생각과 경건한 고백과 경건한 행동을 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니 믿음이 보배이고, 믿음이 있어야 대체의 법칙이 올바로 작동이 된다.
대강절 첫 주일의 의미
흔히 성탄절을 ‘빛의 축제’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 어두운 우리의 심령과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곳곳에 성탄장식으로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힌 것이다.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부터 성탄절까지 4주간을 대강절, 혹은 대림절이라고 한다. 대강절이란 대강대강 보내는 절기란 뜻이 아니라 오신다고 약속하신 주님(메시야)을 간절히 기다리는 절기다. 대부분의 교회가 대강절이면 강단에 다섯 개의 촛불을 켜는데, 이것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 촛불마다 의미가 있다. 첫째는 소(희)망, 둘째는 평화, 셋째는 기쁨, 넷째는 사랑, 성탄절인 다섯째는 감사와 환희의 의미다. 오늘은 대강절 첫 번째 주일로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소망)의 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날이다. 이를 잘 보여준 말씀이 본문이다.
사60장은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상황을 예상하고 선포한 말씀이다. 전체 22절 모두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미래에 대한 영광스러움을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은 구원시대의 도래를 시온의 빛과 영광의 도래로 표현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포로생활로 깊은 절망의 어둠 속에 있었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2a). 이런 환경은 그들을 영적 무감각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런 환경과 영적 상태에 있는 그들에게 선지자는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1). 어둠이 땅을 덮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릴 것이지만 오직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는 외침이다. 빛의 자녀처럼 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 희망의 빛이신 주님을 만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어나야 한다. 이런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답게’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유일한 소(희)망의 빛으로 오신 것을 외치는 것이다. 소망으로 빛으로 오신 주님과 함께, 그 주님을 전하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대강절의 정신이다.
예수님, 유일한 희망
2차 세계대전 때 영국과 독일이 서로 폭격을 주고받는 상황이었다. 영국의 대공습으로 독일의 함부르크가 완전히 불타고 4만 명의 시민과 군인이 몰살당했다. 그 가운데 기적처럼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었다. 과학을 공부하다가 징병되어 전쟁터로 끌려온 그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의 눈에도 너무나 끔찍한 참상이었다. 그는 폐허 속에서 하나님을 향해 처절하게 외쳤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다면 왜 세상이 이처럼 참혹합니까? 이토록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도대체 나는 왜 살려주신 겁니까?’ 그는 절규했다. 하나님을 부정했던 그는 포로생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과학이 아닌 신학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그때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그래도 하나님만이 인간의 희망이다.’ 가장 깊은 절망에서 희망의 중요성과 누가 참된 희망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는 세계대전 이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전쟁과 포로생활이라는 끔찍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희망의 빛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영어로 재난을 ‘디제스터’(disaster)라고 한다. 이는 ‘없음’과 같은 부정의 뜻을 가진 접두어 디스(dis)와 ‘별’을 뜻하는 에스터(aster)가 결합된 단어다. 그러니 재난이란 별이 없는 암흑 상태를 뜻한다.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 진짜 재앙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어려움 자체보다 어려움으로 인하여 희망을 포기한 것이 더 문제다. 아무리 힘든 일이 겹쳐도 희망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일어서지만 희망을 포기하면 일어설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희망을 품고 포기하지만 않으면 반드시 재기의 기회가 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 희망의 별이 위르겐 몰트만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발견한 예수님이시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도우심과 주님이 함께 하심과 축복하심으로 위대해진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 나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 그래서 늘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사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다. 몰트만처럼 절망적인 자신을 알고 소망의 주님께 나아와 믿음으로 주님을 붙잡는 사람이 주님의 은총을 얻고 능력을 얻고 복을 받는다.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시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소망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믿음의 손을 내밀어 소망의 주님을 붙잡아야 한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도, 가정과 자녀도, 교회도, 국가도 소망이 있고, 회복이 있고, 축복이 있다. 우리는 3주 동안 다니엘 기도회를 가졌는데, 강사 대부분의 간증내용이 이것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주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했더니 주님께서 역사하셔서 오늘 이렇게 자신이 간증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했다. 배움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장애소년이 세계적인 수학자가 되고, 고아소년이 믿음의 가정에 입양이 되어 우주항공학자가 되고, 살 수 있는 가능이 1%도 없다고 했던 아이가 살아서 말도 하고, 찬양사역자가 되어 세계를 누비며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오지의 선교사로, 또 어떤 사람은 국제변호사가 되어 난민의 인권과 생존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했다. 재난과 같은 인생이었는데 소망이신 주님을 만나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별이 된 것이다.
희망의 꽃씨를 뿌리자!
미국 센프란시스코 남부에 꽃들이 많이 있는 로스 알토힐이라는 꽃마을이 있다고 한다. 그곳에 아름다운 꽃들이 많은데, 그곳이 아름다운 꽃마을이 된 이야기다. 오래전에 이 도시에 요한이라는 우편배달부가 있었다. 그는 매일 똑같은 자전거를 타고 똑같은 길을 다니며 ‘편지요, 소포요.’ 라고 똑같은 말을 외치며 우편물을 배달했다. 이와 같은 반복되는 삶이 15년 동안 계속됐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과 직업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삶에 싫증이 났던 것이다. 그는 이 일을 계속 할지, 다른 일로 바꿀지, 바꾼다면 어떤 일을 할지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그 일을 계속하라고 하셨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 지겹고 지루한데 어떻게 계속하느냐고 물었고, 하나님께서는 보람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계속 이 문제로 기도하던 그에게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우편배달 가방에 꽃씨를 가지고 다니면서 다니는 길마다 골목마다 꽃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여전히 같은 직업을 가지고, 같은 거리를, 같은 자전거로, 같은 말을 하면서 돌아다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꽃씨를 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여러 꽃이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골목마다 꽃길이 되었고, 그가 다닌 마을은 꽃마을이 되었다. 그 한사람의 변화된 삶이 이처럼 아름답고 향기롭게 주변을 변화시킨 것이다.
성도는 소망의 사람이다. 소망을 심고, 소망을 말하고, 소망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다. 소망을 전염시키는 사람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했다. ‘전도는 소망을 전염시키는 것이다.’ 여러분!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도 요한이라는 우편배달부처럼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망을 품고, 이 소망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자. 세상에서 가장 안타깝고 서글픈 일은 소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악은 다른 사람의 소망을 꺾는 것이다. 이것은 간접살인이다. 그러나 소망을 전하는 것! 그것은 사람을 살리는 최고의 일이다. 우리 교회는 소망 발전소가 되고, 가정은 소망 송전탑이 되고, 우리는 소망 배달부가 되자.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머문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소망의 꽃을 피우도록 만들자. 깊은 어둠에 사로잡힌 주변을 소망 가득한 곳으로 만들자.
관련링크
- https://youtu.be/imBW-BtCAkE 2155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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