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사라지게 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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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096회 작성일 23-12-10 15:59본문
분노를 사라지게 하는 아이
엡2:11~18
2023. 12/10. 11:00(대강절 둘째 주일)
헝그리(Hungry)에서 앵그리(Angry)로
목사이면서 유명한 저술가인 고든 맥도날드(G. Mcdonald)의 일화다. 어느 날, 그가 강의를 끝낸 후 나이지리아 출신 한 여자 의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의사 이름이 특이해서 이름의 뜻이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의 뜻이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Child who takes the anger away)라고 했다. 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또 물었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다. 그녀의 부모는 서로 매우 사랑했는데, 부모가 그들의 결혼을 심하게 반대했다. 그래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부모와 가족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혼했다. 그래서 그들은 몇 년 동안 가족사회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고 처음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녀를 안으면서 그들 사이에 있었던 분노가 사라졌다. 이 일로 부모가 그녀에게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맥도널드 목사는 그 이름이 예수님에게도 아주 적합한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예수님뿐이겠는가? 이는 모든 성도의 새로운 이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도는 분노를 사라지게 만드는 사람, 교회는 분노를 사라지게 만드는 곳이어야 한다.
어떤 사회학자는 우리 사회를 ‘울분사회’(Angry Society)라고 했다. 2019년도에 서울대 유명순 교수의 ‘한국의 울분’조사 결과가 소개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 10.7%가 심한 울분상태이고, 여기에 지속적으로 울분을 느낀 사람 32.8%을 합하면 43.5%가 울분을 만성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분노유발자가 나오면 언제든지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는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2년 뒤, 2021년 조사에 따르면 58%로 그 지수가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가 헝그리(Hungry) 사회에서 앵그리(Angry)로 사회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보니 우리 또한 앵그리 맨(Angry Man)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로 오셨다. 이를 기념하는 날이 성탄절이다. 오늘은 다시 오실 이 주님을 기다리는 대강절 둘째 주일이다. 대강절 둘째 주일은 ‘평화’(화평)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념하며 기다리는 날이다. 즉, 사람 안에 있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모든 분노를 사라지게 하려고, 특히 인간(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사라지게 하시려고 평화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념하면서 기다리는 날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평화롭게 이어주시려고 오셨다.
평화의 이음줄
음악부호 중에 사람의 눈썹처럼 생긴 것이 있다. 이것을 ‘레가토’(Legato)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이음줄’이라고 하는데, 이 부호가 있으면 끊지 말고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불러야 한다. 사실 사방으로 막혀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특히 하나님과 단절되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결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없는 존재다. 이는 사람과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모든 막힌 것 닫힌 것 단절된 것이 다 뚫리고 열리고 연결이 되어 이제는 하나님은 물론 사람과도 화평하게 되고 한 가족이 되었다. 이 놀라운 일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이미지를 굳이 음악부호로 표기를 한다면 레가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님의 삶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곧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었다. 즉, 모든 미움과 증오를 제거하고 사랑으로 이어주는 사랑의 레가토, 모든 죽어가는 것과 죽은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의 레가토, 은혜의 레가토, 축복의 레가토라는 것이다. 특히 모든 불편한 것과 불화를 제거하고 화평으로 이어주는 평화의 레가토, 곧 ‘평화의 이음줄’이신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삶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말씀이 본문이다.
엡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전반부(1~10)는 우리가 얻은 구원의 성격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구원관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11~22)는 구원받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말씀하고 있다. 구원받기 전과 비교를 하면서, 구원받기 전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무할례자였고, 외인이었다. 사방으로 막혀있는 존재였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결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모든 막힌 것 닫힌 것 단절된 것이 다 뚫리고 열리고 연결이 되어 이제는 하나님은 물론 유대인(사람)과도 화평하게 되고 한 가족이 되었다. 이 일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13,14).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여기서 바울은 주님이 ‘우리’사이에 화평을 이뤄내신 분이라는 말하고 있다. 바울이 ‘우리’란 말을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인데, 사람이 모여 ‘우리’가 되면 그곳엔 어김없이 틈이 생기고, 담과 벽이 만들어져 온 것이 인간사회의 현실이다. 신분이나 피부색, 혈통, 그리고 성별과 같은 생득적 조건을 바탕으로 ‘우리’ 사이에 담을 세우고, 담 너머 사람을 ‘남’으로 보아온 것이 인류역사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세대별로 ‘~세대’라고 부르며 상호이질감이 세대 사이로 확장되고 있다. 또한 지역적으로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의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격차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분단국가다보니 이념의 담도 심각하다. 이는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국가 간에 수많은 담과 벽이 존재하여 갈등과 분쟁, 침략과 약탈로 이어진 분노의 세계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세상은 다양한 담이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세워져 한쪽은 우월하고 다른 한쪽은 열등하고, 한쪽은 지배하고 다른 쪽은 지배를 당하는 나쁜 시스템을 정당화해왔다. 이런 담이 어찌 과거역사이기만 하겠는가? 지금도 그 담이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견고해져 사람을 곤궁에 빠지게 하고, 여러 갈등과 심지어 전쟁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담들을 허물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신 이유이고, 다시 오셔야 할 이유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문은 우리의 구원과 더불어 구원받은 사명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은혜로 받은 구원을 강조하는 전반부를 마치면서,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10) 라고 했다. 즉, 특별한 사명이 있어 구원하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내용을 20~22절에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역시 주님처럼 ‘평화의 레가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주님께서 모든 담과 벽을 허물어 버리신 곳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신앙고백과 가르침, 곧 말씀에 기초하여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먼저는 우리 심령에, 그리고 가정과 교회, 일터와 삶의 공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다. 그 방법은 연대(‘서로 연결하여’)와 연합(‘함께’)이다.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간 부품의 개수가 3만개 넘는다고 한다.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 수많은 부품이 서로 연결되어 한 대의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도, 가정도, 회사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성도는 어느 곳에서든 사로 연결하여 함께 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즉, 막히고 끊어진 곳을 이어주는 ‘이음줄’인 것이다. 갈등 때문에 단절된 곳에서는 평화의 이음줄이 되고, 미움 때문에 막힌 곳에서는 사랑의 이음줄, 절망과 낙심이 있는 곳에서는 소망의 이음줄, 또는 섬김의 이음줄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의 사명이다. 그래야 그곳이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인 성전이 되어가는 것이다.
place maker vs peace maker
미국에 번역 성경의 오자(誤字)를 찾아내서 바로잡는 회사가 있다고 한다. 그들이 찾아내서 바로잡은 오자들 중에, ‘화평하게 하는 자’(마5:9, peace maker)가 ‘장소를 만드는 자’(place maker)로 된 것이다. 단순히 글자 한 자의 차인데(‘E’→‘L’), 그 한 자 차이가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잘 보여준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장소를 만드는 자로 된다. 평화를 만드는 것과 평화를 깨는 것도 이와 같은 ‘사소함’에 있다. 작은 사랑, 작은 위로, 작은 격려, 작은 배려, 작은 나눔과 헌신이 평화를 가져온다. 반면에 사소한 욕심, 사소한 실수, 사소한 행동, 무심코 던진 사소한 말 한마디, 사소한 반응으로 평화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세상에는 ‘peace maker’와 ‘place maker’가 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있고, 장소를 만드는 사람,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문제는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사람이다. 세상은 이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이들의 이기적인 야망과 허영 때문에 갈등과 불화가 심화되고, 사단의 점령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시대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자본주의시대는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오늘날은 물건을 팔수 있는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영역확장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모든 불화와 다툼의 배후에는 이것이 자리하고 있다. 교회도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화와 다툼의 원인도 따져보면 그 배후에 자기 영역확장이 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 여기에는 두 말이 필요없다. ‘place maker’가 아니라 ‘peace maker’가 되어야 한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평화의 레가토가 되어 이 땅에서 주님의 통치를 확장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관련링크
- https://youtu.be/67xKABn032o 1496회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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