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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336회 작성일 08-02-0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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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아주심

신1:29~33

2008. 2/3 11:00

우리도 앞으로 평화의 인사시간에 안아주기를 하자는 뜻에서 지난 주 주보 묵상 글에 호주 시드니에 사는 후안 만(Huan Mann)이라는 청년에 의해 시작된 Free hugs"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그는 3년 반 전부터 거리에서 직접 사람들을 안아주고 다녔는데, 그저 모두 웃고 행복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다. 소박하게 시작한 이 일이 이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언젠가 우리 TV에서도 잠간 보여주었는데, 한결같이 웃으며 사심 없이 안고 안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낯선 사람을 안아주고, 낯선 사람에게 안기기가 쉽지 않다. 안아주고 싶어도 안기는 사람이 없으면 어쩔 수 없다. 안기고 싶어도 믿지 못하면 안길 수가 없다. 안아주기와 안기기에는 서로의 사랑과 신뢰가 필요하다. 나아가서 서로 안아주고 안기므로 사랑과 신뢰가 회복되리라 본다.


안아주는 행위는 참으로 여러 가지 의미와 감정들을 전달해준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괴로움이든 대부분의 감정은 안아주는 행위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안아준다는 것은 단지 신체적인 접촉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행위이다. 영국의 소아정신과 의사인 도날드 위니캇(Donald W. Winnicott, 1896~1971)은 유아가 태어나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이라고 했다. 이것은 부모의 손에 절대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아에게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전존재적으로 안아줌을 제공해주는 환경을 의미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우리를 안아주고 품어주는 환경이라면 이 세상이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서로 안아주는 환경이 되면 기존 신자들은 건강하게 성장할 것이고, 새로 나온 사람들은 쉽게 적응하여 한 지체가 될 것이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안아주시는 분’(31)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신명기는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 맞은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그의 후손들(출애굽 2세대들)에게 한 설교이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출애굽 1세대들)이 이집트를 나와서 1년 동안 광야를 통과하여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있었던 일에 대한 회고다. 그곳은 곧 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느냐 다시 광야로 돌아가느냐 중요한 기로였다. 그런데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다시 광야로 들어가 40년을 방황하게 되었고, 결국 그 광야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죽고 말았다.


이들의 비극을 본문은 한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불신(32)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고, 밤낮으로 불기둥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매일 먹으면서도 불신앙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는 그들의 삶이 엄청난 현실의 문제에 압도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난 1년 동안 크고 두려운 광야(신1:19)를 지나 이곳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다. 광야는 길도 없고, 마실 물과 먹을 양식도 없고, 사람이 살 수 없는 두려운 곳이다. 누구든지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 광야다. 이런 곳에서 그들은 지난 1년을 생활했다. 불편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 때문에 몸도 지치고 마음도 상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기대도 사라지고, 해방의 감격도 사라졌다. 오히려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동경하여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들을 구원하여 광야에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기억도 못했다.


그런데 모세는 이들과는 정반대의 고백을 한다. 지난 1년 동안 광야생활은 주님 품에 안겨온 세월이었다(31)는 것이다. 여기서 모세는 두 가지로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는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분(보호하시는 분)이요(30), 다른 하나는 갈 길을 열어주시는 분(인도, 공급, 예비하시는 분)이라는 것(33)이다. 똑같은 현장에 있었고, 함께 그곳을 지나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하나님이 모세만 별도로 구름을 타고 광야를 건너게 하신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로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 때문에 가슴이 바싹 타는 아픔과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모세는 광야생활을 하나님께 안겨온 세월이라고 고백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1. 시각의 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만 보았다. 고통스러운 광야만 보고 그들 앞에 펼쳐지는 문제만 보았다. 때문에 그들은 삶이 광야에 갇히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광야는 고통의 통로였다. 누구라도 문제만 보면 문제 속에 스스로 묻히고 만다. 그러면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반면에 모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현실을 보지 않고, 크고 두려운 광야를 보지 않고, 앞에 펼쳐지는 문제에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을 주목한 것이다. 그래서 모세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된 것이다.


시각이 중요하다. 특히 믿음의 시각이 중요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집트를 나올 때부터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셨다. 지금도 그 은혜 속에 거닐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겐 믿음의 시각이 없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보인 것은 광야뿐이고, 문제뿐이었던 것이다. 우린 믿음의 시각을 가져야 한다.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눈, 베풀어주신 은혜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도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이해다.

신1:27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미워하신다고, 자신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냈다고 원망한다. 저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왜곡된 이해가 불평과 원망, 불순종의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다정하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로 이해하였다. 구약 인물 중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 모세다. 이것은 굉장한 신앙이다. 때문에 31절과 같은 고백이 가능한 것이다. 건강한 인간관계는 상대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건강한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 모세는 하나님을 자애로운 아버지로 이해했다. 예수님을 보라. 평생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불렀다. 특히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한 내용인데, 여기엔 30회 이상이나 아버지란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셨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이것이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 여러분의 신앙을 좌우한다.


세상은 광야다. 아무리 세상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생활이 편하고 풍요로워져도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진보해도 광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겉보기에 모든 것들이 잘되어 아무런 근신과 걱정이 없을 것처럼 보인 사람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남모르는 한숨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다. 왜? 광야이기 때문이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교회 원로 목사인 옥한음 목사의 「안아주심」이란 책이 있다. 그 책에 나온 말이다. 인생이란 짧고 상쾌한 산책인 줄 알았는데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뀌었다.


이와 같은 인생의 광야를 건너고 있는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며 산다면 우리의 이 광야같은 인생길은 결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며 살 수 있을까? 


1. 하나님을 다정하고 시랑이 많으신 아버지로 표현하고 있는 말씀들을 찾아서 묵상하라.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사46:3-4: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위와 같은 말씀들을 찾아서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묵상은 내 자신을 묵상한 말씀의 자리(모세의 자리, 이사야의 자리)에 갖다놓고 그려보는 것이다. 오늘의 모세, 이사야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세(이사야)가 드린 고백, 찬양,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묵상을 통해 모세처럼,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할 수가 있다.  


2. 내 자신이 마치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신앙생활이란 마치~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인 것처럼 모든 것을 믿고, 고백하고, 실천하는 것이다고 했다. 주님이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 기도를 했으면 마치 응답된 것처럼 믿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내 자신이 마치 하나님과 함께 거닐고 있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것처럼, 고백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다보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


아마 쎄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어보았을 것이다. 돈키호테는 당시 세상의 부정과 부패에 크게 실망하여 그런 세상을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열망을 품은 사람이다. 그러자면 정의의 상징인 기사되어야 했다. 그래서 기사처럼 무장을 하고 기사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돈키호테의 생각과 행동은 시대착오적이고 우스꽝스럽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그것은 기사가 되고 싶으면 기사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성자가 되고 싶으면 성자처럼 행동하면 된다. 그렇게 행동하다보면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반면에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비결이다.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안아줄 수가 있다. 우리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안아주는 환경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포악해지는 범죄와 사고. 무서운 질병. 참으로 숨쉬기조차 두려운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안아줌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이 갈망이 해소되지 않기에 때로는 술을 마시고, 약물을 하고, 도박에 취하고, 쾌락에 빠지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신자와 교회의 중요한 사명이 있다. 세상을 안아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을 할 수만 있다면 다 품고 안는 것. 이것이 신자와 교회의 존재 목적이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안고 품는 것은 주님이 보여주셨던 사역이다. 삭막한 세상에서 교회는 안아주는 공간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신자는 품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로를 이해해주고, 서로를 용납하면서 받은바 사랑으로 서로를 안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의 안아주시는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구원의 길이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다. 우리들에게도 서로의 삶을 더욱 풍성하고 힘있게 해주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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