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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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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814회 작성일 24-03-17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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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선물

18:21~35

2024. 3/17(사순절 다섯째 주일). 11:00

시도하지 않은 한 가지

나폴레옹과의 워터루에서 전쟁(Battle of Waterloo)을 승리로 이끈 아서 웰즐리 웰링턴’(1769~1852)의 일화다. 어느 날, 병사 하나가 탈영을 하다 잡혀왔는데, 그는 전에도 몇 차례 탈영을 시도했던 전력이 있는 자였다. 그때마다 여러 방법으로 훈육을 시켰으나 여전히 탈영을 멈추지 않았다인내의 한계를 느낀 웰링턴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말했다. ‘너는 따끔한 충고도, 무서운 벌도 소용이 없으니 도대체 내가 너를 어떻게 할까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너는 계속해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그러니 너를 군법에 따라 처형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때 곁에 있던 부관이 말했다. ‘장군님장군님께서는 이 병사에게 여러 방법을 썼다고 하셨지만 아직 시도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자 웰링턴이 말했다. ‘그래그것이 뭔가?’ 부관이 말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생각해보니 부관의 말처럼 충고와 처벌만 했지 한 번도 용서한 적이 없었다. 그는 곧바로 그 병사를 어떤 조건도 걸지 않고 단박에 용서했다그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탈영을 일삼던 그 병사가 탈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주 충성스런 병사가 되었다용서가 말썽꾸러기 병사를 변화시킨 것이다.

 

 

 

용서는 참으로 아름다운 선물이다. 용서(容恕)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봐주는 것인데용서에 대한 한자를 보면 정말 마음이 따뜻해진다. 한자로 容恕의 첫 글자 얼굴 ’()은 웃는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다, 모자()를 쓴 사람이 눈이 감기도록 입을 크게 벌려 웃고 있는 얼굴의 모습이다용서할 ’() 같을 ’() 아래 마음’()이 놓였다. 그러니까 ‘여전히 같은 마음으로 활짝 웃는 얼굴이 용서임을 알 수 있다(웃으시는 주님의 얼굴 보여줌). 활짝 웃으시는 주님의 모습처럼 용서를 해준 사람도, 용서를 받은 사람도 같은 마음으로 활짝 웃게 만들어준 것이 용서란 의미다. 서로 다투다 화해하고 돌아선 두 사람의 얼굴에서 이러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얼굴이 항상 크게 웃고 있는 용서의 얼굴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본문은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본문은 얼마나 용서를 하고, 왜 용서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용서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다그것은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용서의 횟수를 물었다. 그러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냐고 반문했다. 당시 유대교 랍비는 세 번까지는 용서해야 너그럽다고 가르쳤다유대교 공동체에 속했다가 예수 공동체로 옮겨온 베드로가 이렇게 물은 것은 유대교에 대한 비교의식 때문이었었던 것 같다유대교가 세 번 용서해주는 것이 넓은 마음이라고 가르쳤으니 우리는 일곱 번까지도 용서해주는  높은 수준의 종교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이런 베드로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일곱 번에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산술적으로 7×70=490번 용서하라고 하신 것이다하지만 횟수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490번이나 잘못한 사람도 없겠거니와 그것을 다 헤아려가며 용서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횟수에 매이지 말고,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 모든 죄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분이시기에 우리에게 이런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 간에 항상 용서하고 용서를 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횟수에 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삶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이다. 용서의 주님을 닮는 삶이다.

 

용서해야 하는가?

사실 용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여전히 중요하고 부족하다사람에게는 사랑이 부족하고그로 인해 용서하지 못한 채 고통스럽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며 살아간다죄짓지 않을 능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에게 잘못을 범하는 일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이렇게 잘못이 항상 양산되는 세상에서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용서하는 일에 실패하면 분노, 원한, 불만, 그리고 불화가 마음에 생겨난다이런 부정적인 마음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이런 부정적인 마음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용서는 필요하다. 이런 것만으로도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그런데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할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본문이 그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많은 빚(1만 달란트)을 탕감 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진 적은 빚(백 데나리온, 달란트와 데나리온의 비율은 6,000:1)을 탕감해주지 못한 사람에 대한 주님의 비유다(내용 설명을 생략). 많은 용서를 받았으면서도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용서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 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기꺼이 용서해야 하느냐?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이 더 큰 잘못(1만 달란트의 빚)을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내게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받은 큰 용서가 회수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거저주시는 하나님 사랑으로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으면서 이웃이 내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내게 베풀어주신 용서를 회수하신다는 것이다(34,35). 그래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이다무제한으로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받은 용서도 무효가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결국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사랑이고 자비다그렇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용서는 높은 경지의 자기이익인 셈이다.

 

이런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쉽지 않는 일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어렵지만 힘들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가장 심각한 피해자는 자신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심각한 마음의 병을 얻거나 심지어 암에 걸린 사람들 중에 받은 상처를 풀어내지 못해, 그 상처가 응어리가 되어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하고, 심한 경우는 그것이 암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래서 흔히 용서를 놓아주는 것(set free)이라고 하는데, 내게 상처를 준 사람, 혹은 내가 받은 상처로부터 내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이 용서라는 것이다. 그러니 용서는 치유와 자유를 주는 선물이다. 용서를 통해 가해자에게 묶여있던 족쇄와 피해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용서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느 분이 제시한 용서의 방법이다. 우선,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에 직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 상처를 떠올리면 고통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는 인정하지 않으면 치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용서란 잊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바라보고 기억하는데 있다. 이것이 용서의 첫걸음이다. 다음은, 조급해 하지 않는 것이다. , 시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한 번에 하나씩 용서하라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나씩 실천하라는 것이다. 무척 실제적이고 지혜로운 제안인 것 같다. 여기에 하나를 더 덧붙이면 본문이 강조하는 빚진 자의 의식이다. 이는 위 세 가지를 가능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용서의 방법이다. 빚진 자의 의식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은혜의식이다. 그리고 은혜의식이란 본문의 표현대로 1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실을 늘 기억하는 것이다. 1만 달란트는 갚을 수 없는 무한한 은혜를 강조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은혜의식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방법을 찾게 되고, 찾으면 기꺼이 실천하게 된다. 받은 은혜가 크니까 어떻게든 보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아들로 삼을 수가 있었겠는가? 1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자라는 깊은 은혜의식이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은혜의식이 없으면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지만 은혜의식으로 가득하면 큰 잘못도 너그러이 용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이 은혜의식을 키우는 일이다. 사실 이 은혜의식이 모든 경건생활의 동력(動力)이다.

 

용서는 특권이다.

용서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용서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죄인이 죄인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 보면 용서는 특권이다.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님에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특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니 이 특권을 마음껏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동시에 용서는 강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도 한다. 깊은 은혜의식으로 무장한 강한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용서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용서의 삶을 사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잘못과 상처가 있다. 가정과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용서가 필요한 것이다. 서로 용서를 구하고, 서로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은혜의식이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란 의식이 충만하면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경건하고 건강한 삶과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우리 살과 가정, 교회,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이런 곳으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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