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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561회 작성일 08-02-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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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동역.

고전3:1~9(암3:3)

2008. 2/24 11:00

어느 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이란 내용을 읽은 적이 있다.

첫째, 젊음

둘째, 남보다 잘 산다는 느낌

셋째, 많이 배워야

넷째, 남과 사회로부터 신뢰감이 높아야

다섯째, 종교행사에 자주가야

여섯째, 가족과 여과를 중시해야

일곱째, 결혼은 행복과 무관하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무엇인가? 저는 누구와 함께 하느냐, 누구와 동행하고, 누구와 함께 교제하고 섬기고 나누고 일하며 살아가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동행하면 즐겁고 행복하다. 우리 신자의 행복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 순간마다 주님과 동행하는데 있다. 나아가 한 주님을 섬기는 지체들과 함께 주님을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고, 나누고, 섬기고, 봉사하는 생활이 행복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행복한 곳이요, 신자들의 삶은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문제다. 행복의 조건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한 곳이 되지 못하고 있는 교회, 행복하지 못한 신자의 삶에 대하여 우리는 심심히 반성해야 한다.


지금 수요예배시간에 고린도전서를 강해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의 문제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교인들끼리 서로 반목하여 각종 문제들로 엉켜 있었다. 그러니 교회는 행복한 곳이 될 수가 없고, 교인들의 삶 또한 행복하지 못했다.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 원인으로 신앙의 미성숙과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있음을 지적하며, 특히 교회 지도자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서 비롯된 교회분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지도자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교회 지도자는 1)섬기는 일꾼이지 섬김의 대상이라 아니라는 것. 2)하나님의 계획에 함께 참여한 사람들, 서로 동역자라는 것. 그리고 3)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를 따라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지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는 주님을 섬기는 일꾼이요, 서로 동역자다. 자기 경험이나 힘, 방법이 아닌 주님께 받아서 받은 대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자랑할 것도 내 세울 것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신자의 행복은 먼저 자신이 주님의 일꾼이라는 정체성과 지체들과의 아름다운 동역에 있다. 이 시간 행복한 교제, 섬김, 봉사와 나눔을 위한 아름다운 동역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한다. 


1. 경()/ 서로 존중하라.

어느 부부 세미나에서 강사가 100명의 남편들에게,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외로움과 아내로부터 무능하다고 무시를 당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단 6명의 남편을 제외한 모두가 전자를 택했다. 무능하다고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는 외로움이 났다는 것이다. 어디 남편들뿐이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것이 충족이 될 때 자기 정체감은 물론 소속감, 그리고 건강한 관계를 갖게 된다. 건강한 관계에서 행복한 동역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행복한 동역의 중요한 요소는 상호존중이다. 관계에서 상호존중은 참으로 중요하다. 상호존중 없이는 친구관계, 가정생활, 교회생활, 일반 공동체 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없다. 그리고 관계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인데, 소통이 잘되면 관계는 건강하게 이루어진다. 이 상호존중이 소통의 시작이고, 과정이고, 끝이다. 

 

존중하다,를 영어로 respect라 한다. 이 단어는 라틴어 respicere(레스피쎄레)에서 왔다. 라틴어 레스피쎄레는 다시 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다시 본다.는 말은 깊이 새겨서 본다.는 의미다. 그 사람을,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다시 깊이 새겨서 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새겨서 듣고 그의 행동을 깊이 새겨서 보는 것. 바로 이것이 존중이다. 에릭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에서, 상대방의 고유의 개성에 눈길을 돌리는 능력이 존중이라.고 했다.


또한 다시 본다.는 말은 새롭게 본다.는 의미이다. 즉 다른 방향, 입장, 관점에서 본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는 나-중심으로 보았는데, 이제는 너-중심으로 보는 것, 관점을 바꾸어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전혀 새롭게 보인다. 흔히 나 오늘 그 사람 다시 봤구먼. 하는 표현을 쓴다. 이는 그 동안 내가 아는 대로가 아닌 새로운 면을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다른 방향, 입장,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같은 일이나 사건도 전혀 새롭게 해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 존중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지면 그 사람이 전혀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이해가 되고, 새롭게 평가하게 된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행복한 동역자로 서기 위해선 바로 상호 존중하는 마음과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놀람의 감탄사를 연발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무식한 말이 무엇인줄 아는가? 나는 한 마디만 들어도 알고, 한 눈에 척 알아본다.는 말이다. 자기가 무슨 하나님인가! 척보면 알게, 이처럼 무식하고 무서운 표현은 없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고, 엄청난 교만이다. 우리는 모른다. 내 자신도 모른데 남을 어떻게 알겠는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존중하는 마음과 태도로 항상 상대방에게 눈길을 돌려 그 사람의 입장과 관점에서 깊이 듣고 새겨 보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이해의 폭이 넓혀지고 도울 일도 발견하여 서로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2. 신()/ 서로 신뢰하라.

서비스에도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다고 한다. 칼 알브레히트(Karl Albrecht, 독일의 할인점 ALDI의 대표, 세계 제3위의 부자)란 사람의 주장이다. 그조직 외부에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려면 먼저 조직내부에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서비스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종업원의 응대태도 불량을 서비스 칠거지악이라 불렀다.

첫째, 무관심(apathy)

둘째, 무시(brush-off)

셋째, 냉담(coldness)

넷째, 생색 혹은 건방떨기(condescension)

다섯째, 로봇화(robotism)

여섯째, 규정핑계(rule book)

일곱째, 뺑뺑이 돌리기(runaround)


이 일곱 가지를 요약하여 표현하면, 신뢰가 깨지는 순간이다. 그 결과 고객은 다시 그 곳을 찾지 않는다. 것이다. 판매 왕 출신으로 지금은 동기부여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토드 던칸의 책『최고의 세일즈맨은 신뢰를 판다.』에 보면, 빙산의 법칙이 나온다. 바다에 떠있는 빙산은 전체의 일부분이다. 보이는 것은 10%이고 90%는 수면에 아래 감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수면의 위의 10%가 아니라 그 아래 감추어져 있는 90%이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깨어지면 가라앉기 때문이다. 그 수면 아래 있는 90%가 신뢰라는 것이다. 믿음이 신앙과 생활의 기초이듯, 관계의 기초는 신뢰이다. 모든 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진다. 신뢰가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이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무신불입(無信不立)이란 말이 있다. 지난 대선에서 어떤 후보가 사용한 말이다. 신뢰가 없으면 서지 못한다는 뜻이다.  


신뢰는 인격이다. 채근담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신뢰하는 사람은 모두가 반드시 성실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성실하기 때문이고(信人者 人未必盡誠 己則獨誠矣),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사람은 모두가 속이지 않더라도 자기가 먼저 스스로를 속이기 때문이다(疑人者 人未必皆詐 己則先詐矣).고 했다. 신뢰는 성실한 인격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다. 신뢰는 건강한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고, 심지어는 생산성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중한 신뢰를 우리의 삶과 모든 관계에 채우고 더욱 풍성하게 키워가야 한다. 문제는 신뢰가 이렇게 소중하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신뢰를 갖기는 어렵고 힘들다. 어떻게 우리의 삶과 관계 속에 신뢰를 채우고 풍성하게 키워갈 수 있을까? 그리하여 행복하고 아름다운 동역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는 그 비결을 기도에서 찾는다. 태양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만물이 충만한 활력으로 노래를 부르듯, 하나님의 눈길이 닿는 곳에서는 신뢰가 더욱 큰 활력을 얻는다. 그 비결이 기도의 골방이다.(『기도의 심장』중에서). 곳곳에 주님의 눈길이 닿도록 기도하자. 그리하여 우리의 개인의 삶이나 가정, 교회, 소속된 공동체에 신뢰를 채우고 풍성히 키워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3. 화()/ 서로 화목하라.

선지자 아모스는 동행의 조건으로 뜻의 일치를 강조했다.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3:3). 뜻이 하나가 되어야 함께 할 수 있다. 함께 동행할 수 있고, 함께 일할 수 있고, 함께 교제하고 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뜻을 합하여 한 뜻을 이루는 조건이 앞에서 말씀드린 상호존중과 상호신뢰다. 경()과 신()이 없이는 뜻을 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뜻이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화()를 기대할 수가 있다. 서로 뜻이 맞아 사이좋은 상태(국어사전)가 화()이기 때문이다. 화목은 상호존중, 상호신뢰와 함께 아름다운 동역의 절대적인 요소다.


화목(火木)이 되어야 화목(和睦)하다.는 말이 있다. 앞의 화목은 땔감이다. 이것은 자기희생을 의미한다. 밥을 하거나 차가운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땔감이 필요하듯, 화목의 생활을 위해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 사이의 화목을 위해 친히 화목(火木)이 되셨다(롬3:25). 그래서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 사이에 화목, 곧 평화(화평)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엡2:11~19). 화목을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처럼 자기희생이 요구된다. 사랑이 식고, 섬김과 봉사가 없고, 미움과 다툼으로 관계가 깨진 곳에 내 자신을 던져 화목(和睦)의 화목(火木)이 되어야 한다. 비로소 그곳에 사랑의 불꽃, 섬김과 봉사의 불꽃이 치솟아 화목이 일어나게 된다.


싸움이 한창인 전쟁터를 한번 상상해 보자. 그곳에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온전한 것이 있겠는가?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 그 자체다. 화목이 없는 삶, 가정, 교회, 사회도 마찬가지다. 말 그대로 무덤이고 지옥이다. 그러므로 화목 없이는 생명도, 소망도, 기쁨도 없다. 형통도 기대할 수 없다. 복선지문 막미어화목(福善之門 莫美於和睦)란 말이 있다. 축복의 원천으로 화목보다 훌륭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모든 행복은 화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서로 뜻이 맞아 사이가 좋아야 건강한 관계가 이루어지고, 아름답고 행복한 동역이 가능한 것이다. 신앙생활, 교회생활도 마찬가지다. 뜻이 맞고 사이가 좋아야 한다. 서로 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단히 나를 비우고, 내려놓아 한다. 먼저 화목(火木)이 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섬기는 일꾼들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서로 동역자다. 자신의 지혜, 경험, 능력으로 섬기지 않고 주신 은사대로 받아서 섬기는 사람들이다. 섬기되 서로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어 섬겨야 하는 일꾼들이다. 그러기 위해선 세 가지 요소가 꼭 필요하다. 그것은 경()과 신()과 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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