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내 민족이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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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438회 작성일 08-03-03 10:54본문
나와 내 민족이 사는 길
대하7:11~17
2008. 3/2 11:00
근자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우리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여기에는 TV드라마가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고구려 개국 드라마 「주몽」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마지막 영웅 「연개소문」, 우리 민족의 영원한 자존심 관개토대왕의 「태왕 사신기」, 그리고 발해를 세운 「대조영」 등의 드라마가 우리로 하여금 고대사에 대한 눈을 뜨게 한 것 같다. 더불어 관련 서적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고조선이나 부여를 차지하고라도 삼국시대만 해도 우리나라 (고구려 최전성기)영토는 북으로 몽고와 시베리아까지, 서쪽으로 요하서쪽 만리장성까지, 동으로 연해주 일부와 우리 한반도가 그 무대였다. 그런데 고려말엽 이후, 특히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점점 쇠잔해져 결국 오늘에 이른 것이다. 우리 역사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원인은 말한다.
첫째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이다. 하나의 비근한 예지만 삼국 가운데 제일 크고 강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가 어떻게 멸망하였는가? 물론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에 의해 망했다. 그러나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다. 고구려 말기의 영웅이었던 연개소문이 임종시에 자기 아들들을 불러놓고서 간절히 권하기를 ‘내가 죽은 다음에도 너희들이 꼭 협력해서 나라를 잘 받들어라.’고 유언을 했다. 그러나 자기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후에 그 아들 남생(南生)과 남건(南建)이 권력 다툼을 했다. 남생이 국내에서 패하자 당나라로 도망을 갔다. 신라가 당병(唐兵)을 청하기 전에 남생이 먼저 당군(唐軍)을 평양으로 보내서 고구려를 멸망시킬 음모를 하였다. 사실 당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으로 진군하여 올 때에 그 길을 향도(嚮導)한 사람이 바로 남생이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가 망했다. 그 이후로 우리 민족은 남북만주 넓은 땅을 영원히 잃게 되었다. 골육상쟁이 큰 원인이었다.
둘째는 당파(黨派)와 파쟁(派爭)이다. 선조(宣祖)이후 조선왕조는 동인(東人) 서인(西人), 남인(南人) 북인(北人), 노론(老論) 소론(小論) 등 사색당파로 나뉘어 온갖 수단으로써 정권 쟁탈전을 계속하였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민족도 국가도 없었다. 그저 자기 당파의 정권과 세도만 생각했다. 결국 이런 정쟁이 무엇인가? 심하게 표현하면 골육상쟁 아닌가!
셋째는 공의(公義)가 없는 정치다. 「성서로 본 한국사」를 쓴 함석헌 선생은 조선의 역사를 ‘축대가 부러진 수레’에 비유했다. 하극상으로 세워진 나라, 그래서 공의를 상실한 나라라는 것이다. 물론 세종대왕이나 영조-정조대왕과 같이 훌륭한 왕이 있기 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고 조선은 시작부터 잘못되게 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 공동체의 터와 같은 공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령 자기 당파의 정권획득을 위해 온갖 수단을 썼고, 한 번 정권을 잡으며 정적(政敵)을 역적으로 몰아서 철저하게 제거하고, 그 다음에는 그 권력연장을 위해 역시 공의와 상관없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저 자기 당파, 자기 안일만을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학정(虐政)을 감행했다.
이런 와중에도 오늘날 우리나라가 경제대국으로서 영향력 있는 나라로 우뚝 선 것은 기적이요,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신자에게 ‘국경은 없으나 민족은 있다.’는 말이 있다. 신자는 이중국적자이다. 신자의 진정한 시민권은 천국에 있고(빌3:20), 천국시민(엡2:19)이다. 동시에 이 당에 있는 한 나라의 시민이다. 여기에 신자의 갈등이 있고, 또한 사명이 있다. 한편으론 천국시민으로서 참 본향을 사모하며 나아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론 이 땅의 시민으로서 그 본분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가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코자 온 겨레가 비폭력으로 궐기했던 삼일절이었다. 이 애국의 절기에 본문말씀을 통해 나라사랑의 방법, 혹은 나와 내 민족이 잘 되는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본문 14절 말씀은 일찍이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첫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이 구절에 손을 얹고 대통령 직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선서했다. 그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이 구절의 말씀대로 모든 정치를 하기로 맹세한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과 자신의 궁을 위한 20년 동안의 긴 역사(役事)를 마친 후, 수많은 제물로 하나님께 성전봉헌예배와 그 유명한 기도를 드렸다(6:). 본문은 솔로몬의 예배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께서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염병으로 내 백성 가운데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12~14).
특히 이 본문에서 강조되어 있는 것은 민족적인 큰 재난과 환난 가운데서 사는 길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간단하게 세 가지로 말씀하셨다.
첫째는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
둘째는 스스로 겸비하라.
셋째는 기도하라.
그리하여 범사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너희 죄를 사하고 너희 사는 땅을 고쳐 주리라 말씀하셨다.
오늘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이 말씀을 중심으로 나와 내 민족이 사는 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그 악할 길에서 떠나라.
그 악한 길에서 떠나라. 여기서 ‘떠나라’고 하는 말은 ‘돌이키라’는 뜻이다. 즉 악한 길에서 돌이키라, 회개하라는 뜻이다. 회개를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voia)’라 한다. 마음과 생각을 바꾼다(돌이킨다)는 뜻이다. 회개는 전인격적인 사건이다. 지적으로 죄를 깨닫고, 정서적으로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며, 의지적으로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회개는 종교적인 구호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요, 주님의 은총을 받고, 또한 회복하는 방법이다. 하나님 앞에서 못 고칠 죄인이 없고,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지만 단 조건이 있다. 그것은 회개다. 회개는 나를 살리고, 내 가정과 교회, 민족을 살리는 길이다.
북 왕조 이스라엘의 아합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다. 그가 행한 많은 악행 중에 선량하고 신실한 농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그를 돌로 쳐 죽여 개들의 밥이 되게 한 사건이 있다(왕상21:15). 이 때문에 왕은 하나님의 진노를 크게 사게 되었고, 하나님은 선지자 엘리야를 그에게 보내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셨다. 즉 재앙으로 아합과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을 다 멸할 것이요, 성읍에서 죽은 자들은 그 시체를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들은 새들이 먹으리라(왕상21:21~24) 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은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행보도 천천히 했다(왕상21:27). 하나님께 회개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즉시 응답하시기를 그 심판을 아들의 시대로 유보하셨다. 아합과 같이 악한 사람도 회개의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 이를 기쁘게 받으신 것이다.
한 청년이 눈이 아파서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진찰 후 살인적인 병균에 감염되어 실명이 될 것이며, 속히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까지 위험하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이 청년을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전에 다녔던 교회를 찾아갔다. 너무 답답하여 그저 엎드려 있는데 지나온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특히 교만하고 방탕하고 불순종한 모습들이 그의 마음을 때렸다. 그는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잘못 살아온 지난날을 눈물로 회개하였다. 저녁 내내 얼마나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지 눈눈이 퉁퉁 부었다. 그는 수술을 결심하고 병원을 찾았고, 수술 전에 다시 한번 검사를 하게 되었는데, 의사가 깜짝 놀라며 그 살인적인 병균이 감쪽같이 살아졌다는 것이었다. 회개의 눈물을 통해 그 병균이 깨끗이 씻겨나간 것이다. 회개가 바로 이렇다. 회개는 우리 마음의 독, 영혼의 독인 죄를 씻는 능력이다. 죄가 씻겨지면 다른 것들도 다 회복된다.
그러므로 회개가 사는 길이요, 살리는 길이다. 부흥의 길이다(14下). 하나님은 자기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그러므로 회개하는 개인이나 공동체에게는 희망이 있다. 성경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고 말씀하신다.
2. 스스로 겸비하라.
이 ‘겸비’, ‘겸손’은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할 때 내게 대해서는 제일 장점을 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제일 단점을 본다. 나의 제일 잘한 장점과 다른 사람의 제일 못한 단점과 비교하니까 아무래도 내가 낫다. 그러기에 사람마다 저 잘난 재미에 사는 것이다. 북한 지역에 ‘민충이’라는 벌레가 있다고 한다. 민충이가 쑥대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며 ‘천하가 작구나’라고 한단다. 참으로 가소로운 일 아닌가! 기껏 쑥대 위에 올라 천하를 논하다니. 이는 주변을 통해서 자신을 볼 때 흔히 범하기 쉬운 어리석음이다.
이 민충이처럼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해 보는 사람은 자기가 잘난 줄 안다. 그래서 교만해진다. 참된 겸손은 어디서 오는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볼 때에 생긴다. 하나님 앞에 있는 나를 생각할 때,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미련하고 얼마나 비겁하고 얼마나 추한가! 도저히 머리를 들 수 없는 존재, 그래서 자연히 겸손해진다. 그러기에 참된 겸손은 참된 믿음에서 온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교만하다. 한자어에 ‘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말이 있다. 쇠똥벌레가 굴러오는 수레를 항거하여 싸운다는 말이다. 분수에 지나친 행동을 두고 한 말이다. 요즘 하나님과 싸우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 그대로 당랑거철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연히 미련하고 교만하다. 자기가 최고인 줄 착각하여 천하가 작아 보인다. 그러다가 망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바로 보는 사람이면 자연히 겸손해진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라고 하였다. 꼭 이대로 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복을 주신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3. 기도하라.
월남전에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어느 미국 기자가 월남 전쟁이 끝나자마자 우리나라로 왔다. 이제 전쟁이 일어날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늦어도 6개월 안에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확신을 했다. 그런데 그가 1년가량 우리나라를 돌아본 다음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곳곳에 세워진 교회들을 보고, 그곳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교회가 있는 한 안전하다는 의미다.
기도란 자기의 부족, 자기 자신과 주변에 대한 절망에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이렇게 부족하고, 내가 이렇게 약하고, 내가 이렇게 절망적이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오, 하나님, 내게 지혜도 능력도 용기도 주시고, 나의 모든 필요한 것을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서 이웃과 나라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로서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 이웃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이 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기도는 숨쉬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영혼의 호흡이라 한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우리의 영혼이 사는 것이다. 오직 기도만이 하늘의 권세를 움직이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하늘이 3년 6개월 동안 닫혔고, 또 기도했더니 축복의 소나기가 내렸다. 오직 기도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선지자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리라.”(삼13:23)고 하였다. 우리 역시 기도를 쉬는 죄를 범치 않기를 바란다. 이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너와 네 열조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네게 복을 주실 뿐더러 땅을 고쳐 주시고. 황폐한 강산에 축복을 하여 주시고. 천재지변도 거두어 주시겠다.
지구상에서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요즈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유행하는 말이 ‘고소영’, ‘강부자’다. 고소영은 고려대-소망교회-영남인사들의 머리글자이고, 강부자는 강남의 부자들의 약자다. 결국 이 정부의 연고주의와 도덕성을 꼬집는 말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서론에서 역사학자들이 지적한 우리 민족을 퇴락(頹落)하게 만든 그 구악(舊惡)들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솔로몬 왕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열조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구악을 문자 그대로 떠나야 되겠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로 살펴서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나와 내 민족이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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