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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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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838회 작성일 08-03-0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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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신앙의 특징

신2:1-7

2008. 3/9 11:00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회자가 프로그램에 참석한 주부들에게 질문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남편과 살겠는가? 그런데 대부분의 주부들이 함께 살지 않겠다.라는 대답을 했다. 난감하게 된 사회자는 혹시 이 자리에 현재의 남편과 다시 살고 싶은 분은 없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할머니 한 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사람들은 이 할머니를 보면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사회자는 진실한 사랑을 하는 부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다시 할머니, 정말 다시 태어나도 현재의 할아버지와 사실 것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 물론이지요. 우리 영감을 지금까지 길들이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익숙함이란 편하고 좋다. 그래서 사람들은 변화보다 편안함을 좋아하고 익숙함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익숙함 뒤에는 무디어짐과 권태로움이 있다. 감격도 감사도 없고, 비전도 도전도 없다. 그런데 생명의 역사는 익숙함과 조금 거리가 있다. 생명의 특징은 변화이고 성장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변화하고 성장한다. 신앙 역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이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장이 멈춘 사람도 있다. 가끔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착각이다. 그것은 성장하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성숙한 신앙과 익숙한 신앙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명한 삶의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다. 그것을 자신과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성숙한 신앙인이다. 반면 시간이 지나도 변화와 성장이 없는 사람이 있다. 물론 신앙생활을 무리없이 잘 소화해 낸다. 예배출석도 잘하고, 찬양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한다. 누가 보아도 모범적인 신앙인이다. 하지만 변화가 없다. 이런 사람을 익숙한 신앙인이라고 한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 익숙함을 성숙함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본인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익숙함의 내용들을 가지고 성숙이라고 착각하는데서 벗어나야 한다.


외국 소설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너도밤나무라는 나무가 있다. 그 이름의 유래가 참 재미있다. 모양새는 밤과 똑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종종 그 모양만 보고 밤으로 착각을 한다. 그런데 그것을 깨물어서 그 맛을 보면 밤이 아니란 걸 안다. 이렇게 그 겉모습에 속은 사람들로부터 너도 밤이냐는 빈정거림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신자들 중에도 다른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는 너도 신자!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심각하게 도전을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내 자신의 신앙이 올바르게 성장하고 있는지 늘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 이것이 익숙함에서 벗어나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래서 이 시간 변화가 있는 성숙한 신앙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감사하는 신앙이다.

1절, 우리가 회정하여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산을 두루 행하더니.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 헤맸다. 총 40년 동안이다. 그들이 이렇게 긴 세월을 전진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백성들 대다수가 원망하고 불평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을 든다면 원망과 불평의 시간이요, 가장 먼 길을 든다면 원망의 길이고 불평의 길이다.


살다보면 시험과 환란이 있다. 누구나 시험과 환란의 길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 시간이 길지 짧을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태도다. 그 시험과 환란 가운데서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면 금방 벗어난다. 거기서 오래 깨우칠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곧 건져주신다. 어떤 사람을 보면, 시험이 길겠구나, 시험과 환란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 근거는 시험과 환란의 자리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모습이다.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의 거리는 길어야 열흘에서 열나흘 길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거리를 40년 동안 헤맸다. 원망하고 불평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간단히 끝날 일, 일주일이면 끝날 일을 사십년 걸려서 행할 수도 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이런 일이 벌어진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지름길은 감사하면서 순종하는 길이다.


원망과 불평은 미숙한 모습이고, 감사와 찬양은 성숙함의 표시이다. 미숙한 신앙의 특징은 원망과 불평이다. 성숙이 되면 원망이 사라진 감사하는 신앙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했던 이유는 미숙한 원망하는 사람들 때문이었고, 또한 이 원망과 불평의 사람들을 다 죽이고 새로운 세대를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원망하면 다 죽는다. 미숙함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끝이다.


14절,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40년 동안 원망하는 사람들을 다 죽일 때까지 광야에서 방황하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도 불행이지만 공동체도 불행하게 만든다. 그것은 공동체의 전진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공동체 안에서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때문에 전체가 전진을 못하고 가로막히게 된다. 그러므로 나를 살리고 전체를 살리는 지름길은 원망과 불평을 감사로 바꾸는 일이다(참고, 민11:4).


가정이나 회사, 교회도 마찬가지다. 전진이 잘 안되는 가정을 보면 가정(회사) 내에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전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집중적으로 그 한 사람을 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원망하는 사람이 감사와 찬송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나 자신의 성숙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성숙을 위하여, 공동체의 전진을 위하여 모이면 감사하고 찬송하고 간증을 나누어 원망지수, 불평지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신앙성숙을 경험할 수 있고, 작은 힘 가지고도 멀리까지 갈 수 있는 전진하는 인생이 될 수 있다.


2. 주어진 힘을 섬기는데 사용한다.

4~5절,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사는 사람과 은혜의 논리, 혹은 약속의 논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는 논리는 주로 힘의 논리다. 마치 정글처럼 힘 있는 자가 뺏고 취하고 누리고 지배한다. 말 그대로 힘이 정의다. 그러나 하나님의 논리는 은혜의 논리이고 약속의 논리다. 신자는 약속의 논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 함께 읽은 4~5절은 바로 이 약속의 논리에 따라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힘의 논리라면 에돔의 땅을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논리로 그 땅은 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일 땅은 에돔 족속에게 주었고, 이스라엘에게 준 땅은 가나안이기 때문이다. 힘의 논리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약속하신 땅만 취하라. 약속의 논리를 따라 살라!


6~7절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힘이 있다고 정복하여 탈취하고 빼앗지 말고 오히려 돈 내고 사먹으라는 말씀이다. 주신 것만 누리라는 말씀이다.


구약 미가서를 보면, 여기서 강조한 내용도 하나님이 주신 것만 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이 행복하고 공동체가 잘되는 비결이다. 그것을 넘어서 더 가지려고 하기에 갈등과 다툼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품으면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이것이 죄다. 죄는 개인이든 공동체든 썩게 만든다. 하나님이 주신 남자(여자), 하나님이 주신 가정, 하나님이 주신 생업, 하나님이 주신 물질, 하나님이 주신 명예, 하나님이 주신 것들만 누리면 부작용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취하려고 하니까 그때부터 무리수가 생기고 썩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을 본문말씀에 적용하면 약속의 논리를 따라 살라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내가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느냐 안받았느냐! 내게 주어진 약속인가 아닌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하다. 성숙함의 특징, 성숙한 신앙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힘, 내게 주어진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성숙한 사람은 이 힘을 섬기는데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데 사용한다. 하나님께 영광,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은 군림하는데, 자기를 나타내는데 사용한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사용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는 약속의 논리에 따라 살기 때문이고, 후자는 힘의 논리를 따라 살기 때문이다.


내가 못하는 이유를 힘이 없어서라고 한다면 이것은 신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약속의 땅이 아니야. 이것이 정답이다. 내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주님이 원치 않으면 하지 않고, 비록 내 힘과 능력 밖의 일일지라도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도전하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왜냐하면 신자는 자기 힘, 자기 지혜, 자기 경험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 능력, 지혜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윗 왕이 위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왕이었다. 권력자였지만 항상 모든 일에 앞서 주님의 뜻을 물었다. 하나님 제가 이 길로 가야 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는 힘을 가지고 남용하지 않았다. 그 힘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의 뜻을 묻고 섬기는 자로 서 있었다. 반면에 사울은 처음엔 무척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왕이 되어 힘이 주어지자 군림하기 시작했다. 선지자 사무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삼상13:8~12), 급기야는 하나님의 명령도 불순종했다(삼상15:8~9).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언제부터 병들기 시작하느냐! 세상의 논리, 힘의 논리가 들어올 때다. 교회 안에서 힘의 논리가 횡행하면 그때부터 교회는 세상에게 삼킨바 된 것이다. 세상의 힘이 교회를 삼킨 것을 세속화라고 한다. 세속화란 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복음화는 약속의 논리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힘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취하지 않고, 비록 힘이 없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공급하신 능력을 신뢰하여 나아가서 취하고 다스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강하고 굳건하게 서야한다. 그리고 그 힘을 가지고 섬겨야한다. 이것이 바로 성숙함이다.


익숙한 신앙과 성숙한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는 변화에 있다. 변화되어야 성숙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성숙은 시험과 환란 가운데 원망하는 신앙이 아니라 항상 감사와 찬양과 순종하는 신앙이다. 약속의 논리를 따라 주님께서 주신 힘을 선한 일, 섬기고, 살리고 세우는 일, 주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 선용하는 신실한 종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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