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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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839회 작성일 08-03-16 16:40본문
영적 사다리
벧후1:5~7
2008. 3/16 11:00
더하기의 비밀
수학의 기초는 더하기와 빼기다. 곱하기와 나누기도 더하기와 빼기를 빠르게 하는 목적이기에 결국은 더하기와 빼기를 잘 하는 것이 기본이고, 고등수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여러 가지 삶의 방식이 있지만 기본은 더하기와 빼기다. 누구에게나 자기 삶에 하나 더 보태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 꼭 빼버리고 싶은 것도 있다. 이렇듯 자기 삶에 무엇을 보태고 빼느냐에 따라 삶의 모양과 색깔이 바뀐다.
한 남자가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재산의 반은 장남이 가져라. 그리고 3분의 1은 둘째가 가지고, 마지막으로 9분의 1은 막내의 몫이다. 다만 그 어떤 것도 죽이지 말고 나누어 가져야 한다.’ 문제는 아버지가 남긴 낙타는 17마리였다. 세 아들은 낙타를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나누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나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현자 나스레딘이 그들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삼 형제의 안타까운 재산상속 문제를 듣고 해결해 주었다. 우선 자기가 타고 온 낙타 한 마리를 그들 낙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낙타는 모두 18마리가 되었다. 그래서 장남은 반을 가져야 하니까 9마리, 차남은 3분의 1이니 6마리, 막내는 9분의 1이니까 2마리를 가졌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다 나누었는데 한 마리가 남았다. 그것은 현자 나스레딘의 것이었다. 나스레딘은 이렇게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다시 낙타를 타고 자기 길을 갔다.
이것이 더하기와 빼기의 비밀입니다. 'Plus One'의 정신은 모든 이들이 행복해 지는 삶을 지향하는데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려는 것(더하기)보다 먼저 상대방에게 주는 것(빼기)이다. 이 세 아들처럼 자기 몫만 챙기려고 하면 해결의 길이 없다. 하지만 나스레딘처럼 자기 것을 기꺼이 내놓으면 문제가 아름답게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러스 원 정신은 남의 것을 빼서 내게 보태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 것을 빼서 남에게 보태는 것이다. 건강한 신앙생활의 비밀은 이 더하기와 빼기에 있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뺄 것이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더욱 힘써라.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자가 힘써야 할 일, 즉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 윤리에 대한 말씀이다. 신앙생활의 더하기에 대한 말씀이다.
믿음은 선물이다. 우리의 노력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 믿음이다. 하지만 구원이후 삶, 성결의 생활은 우리의 책임이다. 믿음으로 신앙생활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은 신앙생활의 시작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태어난 것과 같다. 태어난 후에는 양육과 훈련을 통해 자라나야 한다. 신자 역시 태어난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성결의 생활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현재 진행형이요, 또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힘써야 할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권한다. 여기서 ‘너희 구원’은 ‘너희 것이 된 구원’이란 뜻으로, 과거에 이미 얻은 구원, 중생을 의미한다. 그 구원을 완성하라. 즉 성결(현재의 구원)의 생활에 더욱 힘쓰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자신 역시 목표를 향하여 쫓아가는 존재라(빌3:12)고 고백한다. 그 목표는 구원의 완성이고, 쫓아가는 것은 힘쓰고 있다는 말이다.
골프용어 중에 'Never up, Never in'이라는 말이 있다. 공이 홀 컵(Hall cup)을 넘지 못하면 공은 절대로 홀 컵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홀 컵보다 멀리 보고 멀리 치지 않으면 홀 인(Hall in)할 수 없다는 말.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라는 뜻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해도 실패할 수 있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성공의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신앙적 체험이 없고 성장이 없는 이유는 ‘Never up’하기 때문이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노력하고 힘써야 하고,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는 도전도 필요하다. 여기에 신앙적인 체험이 있고, 감격이 있고, 신앙의 진보가 있다. 『만약 당신이 물 위로 걷고 싶으면 배 바깥으로 뛰어내려야 한다.』(존 오트버그 저)라는 긴 제목의 책이 있다. 안주하고 있는 배에서 뛰어 내려야 물 위로 걷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 프랑스의 사상가 폴 발레리의 ‘당신이 힘을 다하여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에 대한 전설이 있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쳤는데도 바다는 꿈쩍도 안 했다. 그런데 그 바다가 갈라지리라고 믿은 한 사람이 첫발을 바다에 내딛는 순간 바다가 갈라졌다고 한다. 순종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믿음의 길은 도전과 함께 열린다. 그래서 본문 5절과 10절에 ‘더욱 힘써’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
힘써야 할 것들-더해야 할 것들.
그러면 무엇을 힘써야 할까! 우리의 믿음에 무엇을 더해야 할까? 사도 베드로는 우리 믿음에 더해야 할 덕목 7가지를 아주 정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5~7). 덕에서부터 사랑까지 이 7가지 덕목은 영적 사다리와 같고, 아름다운 무지개의 일곱 색깔과 같은 영적 무지개다. 이것들을 더하기하라는 말씀이다.
1. 믿음에 덕을 더하라.
한자로 덕을 ‘大’, 혹은 ‘泰’로 풀이를 한다. 이는 ‘크다’는 뜻이다. 넓고 큰 마음과 바른 성품을 나타낸다. 또한 덕을 ‘得’으로도 풀이를 한다. 예를 들어 ‘누구의 덕이다.’ 혹은 ‘누구의 덕을 봤다.’할 때 덕이 득(得)이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덕이다. 그러므로 덕의 특징은 그릇이 넓고 크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여 즐거움을 주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 혹은 영적인 것이든 상대방이 기쁨을 느끼도록 하고 유익하게 한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즐거움을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덕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德不孤 必有隣), 덕을 최고의 도덕적 가치로 생각한다.
바울은 신자의 행동 원리를 덕을 세우는 것(고전10:23)에 두고 있다. 그리고 이 덕을 세우는 것이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고전10:31),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고전10:32~33) 삶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에 이 덕을 더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덕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배울 수 있는 도덕적 탁월성이다. 그러면 예수님의 삶이 무엇인가? 우선 자신의 모든 권리를 스스로 내려놓음이요(빌2:5~), 섬김을 받기보다 스스로 섬기는 종으로 낮아지심(요13:14)과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심(마10:45)이다. 신앙생활이란 이와 같은 주님의 삶을 닮아 가는 것인데, 믿음에 이 덕이 더해질 때 신자다움이 드러나고, 세상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이것이다. 덕이 부족한 점이다.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의 열정은 누구도 따라올 수가 없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모이고, 찬양하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선교하는 나라가 없다. 그런데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한국교회 신자들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잘못될 수 없다. 어떻게 주님이 주신 보배로운 믿음에 잘못이 있겠는가? 단지 덕이 부족해서 믿음이 왜곡되고 있을 뿐이다. 믿음에 덕을 더하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보배로운 믿음이 바르게 드러나도록 믿음에 덕을 더하기 바란다.
2. 덕에 지식을 더하라.
이 지식은 단순한 정보나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기술/재주) 이상이다. 신자가 덕 있는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분별력을 뜻한다. 신자의 고상하고 탁월한 덕이 있는 삶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을 유지하는 비결이 분별력이다. 가끔 훌륭한 신자가 실족한 경우를 본다. 심지어는 이단에게 유혹된 경우도 있다. 덕을 갖춘 믿음일지라도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분별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족하기도 하고 유혹에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에 지식을 더해야 한다.
그러면 이 지식은 어디서 오는가? 첫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왕상3장). 솔로몬이 왕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었다. 그는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일천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대한 응답으로 무엇이든 원하는 바를 구하라고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다. 이 때 솔로몬은 백성들의 송사를 올바로 베풀 수 있도록 지혜를 구했다. 이 지혜가 바로 분별력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분별력(지혜)을 주셨다. 하나님은 지식의 근본이다. 하나님을 믿고 아는 것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지식을 얻는 비결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그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고 했다. 어두운 밤길을 걷는데 빛처럼 절실한 것은 없다. 빛이 없으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내가 가야할 방향도, 선택해야 할 길도 알 수가 없다. 빛이 있어야 내가 현재 있는 위치와 가야할 방향과 길을 알 수가 있다. 그 분별과 선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바로 이 빛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은 지식의 창고다. 바울은 아시아를 떠나면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초청하여 이런 설교를 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9-31). 그러면서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했다. 말씀의 지식이 있으면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다 분별합니다. 어떤 유혹과 시험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보라. 사단의 시험을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마4:1~11).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특징이 이 말씀 안에 풍성히 거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말씀에 철저히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풍성한 영적 지식을 갖기 바라며, 덕에 이 지식을 더하자.
애플 컴퓨터사의 사장 스티븐 잡스가 펩시콜라의 사장 존 스컬리를 영입하기 위해 좋은 근무조건과 거액의 연봉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영입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잡스의 이 말에 스컬리가 움직였다. ‘당신은 남은 평생을 설탕물 만드는 일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우리의 일을 도울 것인가?’ 현실의 익숙함에 안주냐, 변화와 성장을 통한 성숙이냐. 우리의 중요한 선택이다. 주님은 설탕물이나 만드는 편안함에 안주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힘들어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도전하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내 자신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 목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 여기에 도달하는 영적 사다리가 오늘 본문이다. 이 시간에는 그 두 단계인 ‘믿음에 덕과 덕에 지식’에 대해서만 말씀드렸는데, 금번 고난주간특별새벽시간에 이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모두 금번 특별새벽예배에 참석하여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숙한 신자로 성장하는 계기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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