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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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06회 작성일 25-06-22 16:34본문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고후13:13
2025. 6/22 11:00(성령강림 셋째 주일)
성령의 교통하심
기독교 상담 심리학자 래리 크랩(Larry Crabb)의 말이다. ‘영적 공동체가 아닌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비극이다. 아니, 그러한 공동체에서 살면서 거기에 만족하고, 그곳이 영적 공동체라 생각하는 것은 훨씬 더 심각한 비극이다.’ 오늘날 교회가 진정한 영적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이런 교회를 영적 공동체라 생각하고 거기에 안주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이런 비극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 없는 친밀한 관계, 사랑, 위로는 영적 우정의 모조품이라고 래리 크랩은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영적 공동체가 되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풍성하게 경험되는 곳이어야 한다. 본문이 이와 같은 영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예배에서 사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축도문이다. 삼위 하나님이 각각 은혜와 사랑과 교통(교제)을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간단한 말씀은 예배의 복을 잘 보여준다. 예배는 성자 하나님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교통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이와 같은 복의 통로가 예배다. 사실 성도에게 이보다 완벽한 복은 없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삼위 하나님의 이 축복의 약속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배를 통해 이런 복을 경험하고, 세상으로 나가 이런 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축도가 예배순서 맨 마지막에 있는 이유다. 동시에 영적 공동체인 교회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성자 하나님의 ‘은혜’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본질이다. 사실 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없는 교회는 육적 관계 맺음으로 가득한 세상 단체나 진배없다. 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교회를 세상 모든 단체나 조직과 차별화하는 본질적인 요소다. 이런 이유로 여러 결함과 문제가 많음에도 교회를 영적 공동체라고 부른 것이다. 아무튼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사귐의 깊이(교제)를 누리도록 창조된 공동체이고, 성도는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가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영적 공동체를 세울 수 있을까?
영적 친구와 지도자
영적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지만 죄인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모여서 세우자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 공동체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세워진다. 하나는, 믿음으로 행하는 ‘영적 친구’다. 함께 모여 예배로, 찬양으로, 기도로, 말씀으로, 섬김으로 성령 안에서 깊은 영적 우정을 나누는 영적 친구들에 의해 영적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영적 우정이라고 할만한 관계, 곧 영적 친구가 있는가? 영적 친구란 속내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정죄나 비난 대신 용납해 주고, 더 깊은 경건의 자리로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죄책감과 수치심과 실망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신의 속내를 다른 사람에게 쉽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판단 받거나 거절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위로를 받고, 염려하지 않고 속내를 다 털어놓을 수 있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와 갈망을 나눌 뿐 아니라, 그것이 거룩이라는 방향을 향하게 만드는 것이 영적 우정이다. 이런 영적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영적 친구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이런 영적 친구여야 하고 또 누군가는 우리에게 이런 영적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영적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여러분은 이런 영적 친구가 있는가? 이런 친구가 되고 있는가?
또 하나, 경건한 어른 ‘영적 지도자’다. 영적 지도자는 직분이 아니다. 영적 지도자는 소위 ‘경건한 어른’이다. 하나님을 깊이 알고 선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다. 즉,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말을 걸고, 기꺼이 함께 해주고, 마음 놓고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고, 동행해 주는 사람, 그래서 좋은 영적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 경건한 어른이다. 여러분에게 이런 경건한 어른이 있는가? 누군가에게 이런 경건한 어른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경건한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인가?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문제를 가지고 함께 나눌 수 있는 경건한 어른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둔 지혜로운 조언뿐만 아니라 함께 있으며, 함께 기도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어느 공동체든지 어른이 있어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의 문제로 어른이 없음을 탄식하는 목소리가 높다. 세월과 함께 우리 교회에 경건한 어른이 많아지기를 소원한다. 여러분 모두에게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져 가는 은혜를 주님께서 부어주시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서로를 경건의 자리로 이끄는 좋은 영적 친구, 경건한 어른이 되어 우리 교회를 건강한 영적 공동체로 세우자.
경건한 어른이 되려면
영적 공동체를 위한 영적 친구, 경건한 어른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부단한 훈련이 요구된다. 첫째는, ‘길들임’이다. 무엇인가에 혹은 누군가에게 길들여지는 것에 대해 현대인은 몹시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성도는 우리 주님께 길이 들여져야 한다. 말씀과 기도, 예배 등 경건생활에 길이 들고, 섬김에 길이 들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좋은 영적 친구가 될 수 있고, 또한 경건한 어른이 될 수가 있다. 이렇게 길이 잘 든 사람을 가리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한다. 온유를 헬라어로 ‘프라우테스’(πραΰτης)라고 하는데, 통제된 힘을 의미한다. 즉, 야성적 본성을 길들이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길을 들이는 훈련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주님께 흠뻑 물이 드는 것이다. 또한 지체 서로에게 길이 들여져야 한다. 어린 왕자에게 사막의 여우가 한 말처럼, ‘사랑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께 길이 들고, 서로에게 길이 든 사람이라야 영적 우정을 나누는 영적 친구가 될 수 있고, 이런 사람이라야 경건한 어른이 될 수가 있다.
둘째는,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참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 삶의 일부이다. 사랑, 성공,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이 참고 기다려야 한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때때로 지루하고 힘들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지금 나의 존재는 참고 기다림의 결과다.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가 참고 기다려주고, 아내 혹은 남편, 자녀, 친구, 주변 사람들이 참고 기다려준 결과다. 그들이 참고 기다려주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아기의 걸음마). 참고 기다림은 영적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큰 덕목이다. 참음과 기다림은 모든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랑의 실현력이며,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은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산 위에서 기다리면 함께 내려올 수 있고, 강가에서 기다리면 함께 강을 건널 수 있고, 식탁에서 기다리면 모두 같이 먹을 수 있다. 외로운 노래도 기다리면 함께 부를 수 있다. 사물도 사람도 참고 기다리면 채워지고 세워지고 성숙해진다. 그래서 영적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영적 친구가 된다. 이렇게 사람들을 영적 친구로 세워가는 사람이 경건한 어른이다. 아무튼 성도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갈6:9). 그 참고 기다림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군가의 영적 친구와 경건한 어른으로 빚어가는 중인 것이다.
셋째는, 참고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참고 기다림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참고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처신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실 참고 기다리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이다. 기도는 참고 기다림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기도해야 참을 수 있고, 또한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또한 기도는 영적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우리 과업이 아니라 주님의 일임을 인정하는 태도다. 기도는 내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작정 참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기도하면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참고 기다리는 동안 영적 공동체에 대한 갈망은 점점 더 깊어져 가고, 그 갈망은 영적 공동체로 이어지게 된다. E.M. 바운즈의 말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이다.’ 기도가 영적 친구와 경건한 어른을 만들고, 영적 공동체를 세운다.
모델이 되라!
끝으로 거룩한 삶으로 모법을 보이는 것이다. 래리 크랩의 말이다. ‘다른 사람을 거룩함에 이르도록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거룩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사람에 좋은 영향을 주어 따르게 하는 방법은 먼저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란 뜻이다. 내가 먼저 거룩을 추구하는 경건한 삶을 살면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주어 그들도 그런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 좋은 예가 있다.
그는 14세에 세례를 받았지만 형식적인 신앙인이었다. 16세 때부터 도벽과 거짓말, 음주에 빠졌다. 심지어 어머니의 임종 순간에도 술에 취한 채 거리를 배회했다. 가족의 질책과 스스로 고민 끝에 독일 할레 대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그렇다고 소명의식이 투철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 친구의 권유로 한 가정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했다. 찬송을 부르고 인쇄된 설교문을 읽은 후, 한 형제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복을 구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떠날 형제였다. 그 형제의 경건한 모습이 뇌리에 박힌 그는 처음으로 믿음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가지게 되었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졌다. 그날 이후, 그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게 되었고, 회심한 지 두 달 만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아의 아버지로 5만 번 기도 응답을 체험하여 기도의 대명사가 된 ‘조지 뮬러’(George Müller)다. 한 사람의 경건한 모습이 위대한 기도의 사람을 탄생시킨 것이다. 어디든지 모델이 중요하다. 모델을 보고 다른 사람도 따라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예외가 아니다. 모델로서 경건한 어른이 있으면 영적 친구들이 세워지고, 영적 우정이 풍성해져 영적 공동체가 세워지게 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 그래서 지체 간에 서로 잘 길들여지고, 참고 기다리며 기도해서 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영적 공동체를 만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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