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세 가지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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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431회 작성일 08-03-24 16:37본문
부활의 세 가지 승리
고전15:50~58
2008. 3/23(부활주일) 11:00
요즈음 ‘잘사는 법’ 웰 빙(well-being)에 이어, ‘잘 죽는 법’ 웰 다잉(well-dying) 또한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있다. ‘삶’ 못 지 않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졌다는 뜻이다. 웰 다잉 열풍은 이미 독일의 ‘죽음준비학교’, 프랑스의 ‘임종치료학과’, 일본의 ‘존엄한 죽음’등에서 일어났었다.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하여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종교를 찾는다. 종교들은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만,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가르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다. 불교의 석가모니도 죽어 8개의 무덤에 나뉘어 묻혔고(會者定離 生者必滅), 유교의 공자도 죽어 그의 고향 곡부(曲阜)에 묻혔고, 이슬람의 마호메트도 죽어 메카에 묻혔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부활)이다. 그래서 빈 무덤은 우리 기독교의 자랑이요, 십자가와 함께 중요한 상징이다. 이는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임을 입증한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아무리 험한 시험과 역경이 몰아친다 할지라도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지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을 생각하면, 낙심과 절망은 떠나가고 어떤 고난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소망과 용기가 넘친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새 소망과 용기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승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승리를 선물로 받는다.
첫째, 죄와 질병으로부터의 승리
죄의 권세는 성난 파도처럼 강둑과 하천을 휩쓸고 흘려 내려오는 홍수의 세력과 같다. 그래서 죄 값은 사망이라(롬6:23)고 하였고,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겔18:4)고 하였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 죄와 관련이 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오고 고통이 오고 슬픔이 오고 질병이 오고 모든 불행이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죄의 세력을 꺾으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특히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다. 내가 당해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께서 대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은 나의 죄에 대한 죽음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그런데 주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것이다. 이는 죄로부터 승리를 의미한다. 모든 불행으로부터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을 가지면 모든 죄에서 자유함을 물론 건강하고 행복한 삶도 보장받는다.
한 심리학자가 정신병원의 환자를 대상으로 ‘왜 이렇게 정신병에 많이 걸려서 고생을 하는가?’ 연구했다. 그 결과 정신병자의 75%가 죄책감으로 고민하다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한다. 인간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학(自虐)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원망, 불평하면 정신병에 걸린다. 18세기 영국 희극작가 죠지 쿨만(G. Colman)은 ‘모든 의사를 찾아가도 고치지 못한 병이 있으면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치료비는 무료이다. 단,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하는 믿음만 가지고 나아오라. 그대의 병은 완전히 고침을 받으리라.’라고 말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욕타임스>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교회 안다니고 술집 다니는 사람보다 장수한다는 연구 결과를 실었다. 영국의 <더 타임스> 일간지에서는 교회 주일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7년 이상 장수한다고 했다. 신앙생활을 잘하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전국의 의과대학에서는 종교와 질병과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환자를 진료할 때 종교와 신앙을 접목하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주님께서는 죄의 세력을 멸하고 물리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죄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하여 부활하셨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을 믿는 신자도 죄악의 세력을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롬8: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57). 주님은 나의 죄악과 모든 불행을 다 해결해 주셨다.
둘째, 죽음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의 승리.
현대인들은 일곱 가지 두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다. 가난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늙음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것들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특히 죽음은 인간의 무기력함과 무능력을 그대로 폭로하고 있다. 신선을 공부하던 노자도 죽었고, 불사약을 구하던 진시황도,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던 나폴레옹도, ‘정복할 땅이 없다.’고 통곡했던 알렉산더도 죽음을 막지 못했다. 또한 죽음은 인정사정이 없다. 삼대독자도 보아주지 않고 청상과부의 아들도 아끼지 않는다. 유망한 청년도 보아주지 않고 갓 결혼한 신랑도 신부도 아끼지 않는다. 참으로 답답하고 무서운 것이 죽음이다.
이와 같은 죽음의 문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의 해결책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다(고전15:20~22, 55~57). 주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의미를 바꾸어버렸다. 인간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죽음은 마침표였고 끝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한자로 사망(死亡)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은 이 마침표를 쉼표로, 끝을 시작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성경은 죽음을 잠시 쉬는 것(계6:11, 14:13), 잠자는 것(행7:60)으로 표현한다. 이는 곧 깨어날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을 가지면 부활의 생명이 죽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주님의 제자들과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히11:33~40)이 이를 증명한다.
셋째, 불의에 대한 의의 승리.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탐욕과 간계, 시기와 질투, 음모와 불의에 대한 고발이다. 주님은 죄가 없는 분이셨다. 이것은 당시 유대지역의 총독 빌라도가 두 번이나 고백한(요18:38, 19:6) 사실이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 음모와 간계 때문에, 백성들의 배신과 정치세력들의 불의에 의해 희생을 당하셨다. 그래서 의와 진리는 십자가에 달리고, 불의가 일시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선은 무덤에 깊이 묻히고, 악이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암흑이 온 세상을 삼킨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사람들은 권세로 무덤 문을 막고 권력으로 그곳을 지켰다. 돈으로 거짓을 퍼뜨렸지만 주님은 그것을 깨뜨리고 무덤에서 나오셨다. 이는 의의 승리, 진리의 승리, 선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다. 물론 여전히 세상은 불의와 거짓과 악이 지배하고 있다. 그렇지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것들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확보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롬멜 장군은 1944년 6월 1일 독일 군대에게 프랑스 서부 해안의 경계를 한층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왜냐하면 연합군에게 프랑스 상륙을 허용하게 된다면 독일군이 한층 불리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기상이 악화되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프랑스 서부 해안을 덮고 있었다. 기상 상황을 본 롬멜 장군은 안개가 낀 며칠 동안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도 되겠다고 판단해 6일 날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롬멜 장군이 안심하고 자리를 비운 그 다음날 연합군의 대대적인 상륙 작전이 시작되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 역사는 그날을 가리켜서 ‘디데이(D-day)’라고 부른다. 연합군이 독일을 패배시키고 세계대전을 결정적인 승리의 자리로 바꿨던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날이란 뜻이다. 물론 디데이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했다. 하지만 결국 독일이 패하고 연합군이 승리를 한다. 그런데 역사는 이 대전(大戰)이 끝나던 날을 ‘디데이’라 하지 않고, ‘브이데이(V-day)’라 했다.
신자의 디데이는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여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날이야말로 신자의 디데이인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단의 모든 계교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놓았지만 아직도 사단의 격렬한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의 브이데이는 주님께서 재림하여 사단을 완전히 멸하고,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될 때다. 지금 우리는 ‘디데이’와 ‘브이데이’ 가운데 살고 있다. 그 긴장지대에서 살고 있다. 때문에 갈등은 있지만 결정적인 승리(D-day)를 확보해 둔 상황이다.
여기 강호정 집사님이 해놓은 꽃꽂이를 보라. 가시는 십자가의 고난을 상징하고 아름다운 장미과 백합은 부활의 승리를 상징한다. 우리 영혼을 찌르는 죄악의 가시, 죽음의 가시, 온갖 불의와 거짓과 악의 가시들을 뚫고 장미꽃처럼, 백합처럼 활짝 피어난 것이 주님의 부활이다. 이런 부활의 축복, 부활의 승리가 우리 삶과 가정과 교회와 일터에 가득하도록 부활의 신앙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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