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도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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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76회 작성일 25-09-28 12:30본문
밤에도 찬양하라!
시134:1~3
2025. 9/28, 11:00(성령강림 열일곱 번째 주일)
삶의 자리
본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를 가진 마지막 시이다. 본 시에 대한 배경(삶의 자리)을 두 가지로 설명한다. 하나는, 절기에 순례를 마치고 성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이 밤새 성전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레위인)을 축복하고, 밤새 성전을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돌아가는 순례자를 축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롯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천주교 예식에 예배의 마지막 순서로 예배를 인도한 신부와 예배에 참석한 성도 사이에 서로 축복하는 시간이 있다. 인도자가 회중에게 ‘주님의 복이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면 회중이 인도자에게 ‘신부님과 함께’라고 화답하면서 예배를 마친다. 서로 축복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마치 한 폭의 경건한 아름다움을 지닌 성화를 보는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밤에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유일하게 낮이 아닌 밤에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라는 것이다. 물론 각기 다른 지역에서 출발하여 성전으로 오는 것이기에, 또한 순례 도중에 변수가 있을 수 있기에 성전에 도착하는 시간도 다를 것이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밤에 성전을 올라가야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본 시는 이런 사람이 부른 노래라는 것이다. 둘 다 개연성이 있는 주장이고, 나는 후자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한다.
탄원으로 시작하여 축복으로 마치다.
시편 120편~134편까지 15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예배하러 갈 때 불렀던 찬송이다. 그런데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그 시작인 120편은 환란 중에 있는 자신을 도와달라는 탄원으로 시작하고,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마지막 시인 본문은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고 하는 축복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니까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전체 구조가 ‘탄원’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시편 전체의 구조도 이와 같다. 시편이 5권으로 되어 있는데, 1~3권은 주로 비탄시(탄식시)가 많고, 4권과 5권은 감사와 찬양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즉, 탄식(비탄)으로 시작해서 감사(찬양)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성도의 삶이고, 삶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끝은 주님의 은혜 안에서 감사와 찬양과 축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도 감사로 찬양으로 축복으로 마감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렇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소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탄식으로 시작된 인생을 축복으로 끝을 맺을 수 있을까?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 여기서 ‘밤’은 순례자들이 도착한 시간이지만 꼭 물리적인 밤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무리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영혼의 어두운 밤을 보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시간, 마음이 헛헛하고 공허한 모든 시간, 사랑하는 이가 떠나서 외롭고 고독한 시간, 뜻하지 않는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시간, 사실 이 모든 시간이 다 영혼의 밤이다. 바로 이 밤에도 하나님의 성전에 서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배의 자리를 찾고, 지켜야 한다. 이것이 탄식으로 시작된 인생을 축복으로 끝을 맺을 수 있는 비결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밤에 여호와의 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종들’은 누구일까? 늦은 저녁 시간에 도착한 순례자들이다(물론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일 수도 있음). 즉, 인생의 밤에 하나님의 전을 찾은 예배자인 것이다. 바로 나와 여러분이다. 물론 우리가 평안할 때도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는 것, 예배 자리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곧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비결이다. 탄식과 비탄을 감사로 찬양으로 축복으로 바꾸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인생의 밤이 깊을수록 예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예배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한다. 예배는 인생의 올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길이다. 비행기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할 때 짙은 구름이나 안개, 폭풍, 혹은 야간 비행에서 시계(視界)가 불량해져서 ‘공간감각상실’을 유발할 수 있다. 즉, 왜곡된 방향감각이 일어난다. 어느 쪽이 위쪽인지 아래쪽인지 혼란이 일어나 가파른 산이라고 생각해서 위쪽으로 방향을 바꿨는데, 그만 땅이나 바다로 추락하게 된다고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방향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면 인생이 추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방향이,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밤에 예배는 올바른 방향과 길을 보여준다. 인생의 밤이 깊을수록 예배의 자리를 찾고, 지키고, 헌신해야 할 이유다.
송축하라. 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시인은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특히 성소를 향해 손을 들고 송축하라고 촉구한다(2).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성전을 찾은 사람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들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다. 여기서 ‘송축하라’는 히브리어로 ‘바라크’(בָּרַךְ)인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무릎을 꿇다.’이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축복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경배하다.’ 등 의미로 사용되고, 이 중에서 ‘축복하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3절의 ‘복을 주실지어다.’도 바라크). 그런데 특이하게도 시편에서는 이 단어가 감사와 찬양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물론 감사와 찬양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는데도 말이다(우리 성경은 이를 구별하기 위해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송축하다.’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감사와 찬양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하면 감사와 찬양이 복과 관련이 깊다는 의미다. 그래서 바라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의미를 확장해서 인생의 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바라크를 요청한 것은 감사와 찬양이 어둔은 밤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닥친 인생의 어두운 밤을 감사와 찬양을 통해 축복으로 바꾼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과 실라의 이야기다.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전도여행 중이었다. 그들이 가려고 했던 곳은 소아시아 북쪽 지역이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마케도니아 지역으로 인도하셨고, 그래서 도착한 곳이 빌립보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유대인의 회당이 없는 곳이 거의 없었는데,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다. 거의 영적 불모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은 전도 하다 점하는 귀신이 들린 여인을 만났고, 그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다. 이 일로 풍속을 어지럽힌 자란 죄명으로 붙잡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뜻하지 않는 어두운 밤을 만난 것이다. 이때 그들이 보인 반응이 놀랍다. 하나님께서 가라해서 왔고, 귀신이 붙잡혀 살고 있는 불쌍한 여인을 귀신에게서 풀어주는 선한 일을 했는데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큰 고초를 받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밤중에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했다. 인생의 밤에도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땅이 흔들려 감옥 문이 열리고, 묶였던 쇠사슬이 풀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간수와 그의 가족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영적 불모의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이 모두가 인생의 밤에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찬양한 것 때문이다. 그저 아무 탈 없고,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소원하던 것이 다 이루어질 때는 누구나 노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밤이 되면 노래를 멈추게 되고, 심지어 원망과 저주를 쏟아내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일 것이다. 그러나 밤에도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밤에도 하나님을 송축해야 한다. 그래야 인생을 축복으로 끝맺을 수 있다.
왕자와 꾀꼬리
이솝 우화에 나온 이야기다. 어느 왕자에게 노래를 아주 잘하는 황금 꾀꼬리가 한 마리 있었다. 왕자는 이 꾀꼬리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고, 왕자는 이 꾀꼬리를 아끼고 사랑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꾀꼬리가 노래를 부르지 않고 그냥 시무룩해 있었다. 왕자가 그 이유를 묻자, 꾀꼬리가 대답했다. ‘왕자님, 저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요. 개구리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습니다.’ 그러자 왕자가 꾀꼬리를 위로하며 말했다. ‘개구리 소리 때문에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온통 주변이 개구리 소리만 들리지 않느냐, 그러니 네가 더욱 열심히 노래를 불러서 저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다오.’
이 짤막한 이야기는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인생의 밤이 깊을수록 우리가 찬양해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교훈한다. 우리가 쉬지 않고 찬양해야 할 이유는 세상의 온갖 더럽고 악하고 추한 개구리 소리 때문이다. 그 소리를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이 찬양이다. 내 안의 시끄러운 개구리 소리를 비롯하여, 우리 생활 주변에서 쏟아져 나오는 시끄러운 개구리 소리를 잠재울 수 있는 비결이다. 우리 찬송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의 주만 보이도다.’ 그렇다. 찬양하면 슬픔이 기쁨이 되고, 탄식이 기도가 되고, 불평과 원망이 감사가 된다. 혹시 지금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예배의 자리로 나아와 찬양하라. 두려움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새로운 아침을 열어주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찬미의 제사를 드려라. 찬양만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밤에 하나님 앞에 서서 손을 들고 드리는 찬양을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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