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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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18회 작성일 25-10-05 10:35본문
어떻게 유혹을 이길 수 있을까?
잠7:1~5
2025. 10/5, 11:00(성령강림 열여덟 번째 주일)
사단이 사람을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
지금 우리는 유혹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늙거나 젊거나, 또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도덕적인 위험이 매일 격증하고 있다. 우리가 타락이라고 부르는 도덕적 혼란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믿음 안에서 깨어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사단의 유혹에 넘어질 수가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배고픈 사자가 먹잇감을 찾고 있는 것처럼 사단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근신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단이 우리를 유혹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첫째,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말이다. 소위 ‘방심’이다. 작은 실수 하나가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는다. 큰 물고기도 작은 미끼에 걸려든다. 둘째, ‘딱 한 번인데 뭘’이라는 말이다. 사탄은 항상 딱 한 번이라는 말을 유혹의 무기로 사용한다.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이 유혹이다. ‘딱 한 잔!’이 만취로, 음주운전으로, 과실치사로 이어진다. ‘딱 한 번!’이 신성한 결혼과 가정을 파괴한다. 놀음이나 중독에 빠진 사람도 보면 ‘딱 한 번’으로 시작되었다. 셋째, ‘누구나 이렇게 사는데 뭘’이라는 말이다. 사단은 이렇게 속삭인다. ‘교회 다니는 사람도 다 술 먹고 담배 피워!’ ‘내가 아는 누구 집사, 누구 장로도 다 술 먹고 담배 피워! 다 그렇게 사는데 너만 그렇게 고지식할 필요가 있어?’ 소위 ‘잘못된’ 일반화, ‘과도한’ 보편화다. 많은 사람이 그럴 수는 있지만 다는 아니다. 많은 집사와 장로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다는 아니다. 경건하게 정직하게 성도답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유혹을 이기려면
본 장은 1장부터 9장까지 부모가 자녀에게 준 교훈 형식으로 된 잠언 중 하나로, 한 전도유망한 한 젊은이가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는 과정과 그 결말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지혜로운 아버지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를 통해서 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경계의 말씀이다. 음녀의 유혹은 본서 전반부에서 여러 번 다루어진 주제이지만 본 장만큼 유혹의 과정과 그 결말을 실감 나게 묘사한 곳은 없다.
유혹에는 예외가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극단적이긴 하지만 사람은 다 죽는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한다. 유혹도 마찬가지다. ‘남은 다 그래도 나는 아니야!’ 자신에 관해서 지나친 예외성을 가진 것이다. 물론 자기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탈무드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되 자만하지 말라. 자신의 능력을 키우되 과신하지 말라.’ 자신을 과신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라는 뜻이다.
본 장에서 유혹이란 그물에 걸린 한 젊은이의 모습을 보라!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하여 그의 집 쪽으로 가는데’(7,8). 그는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하여’ 그의 집 ‘쪽으로’ 갔다. 고대 중국의「삼십육계」라는 병서에 ‘삼십육계 주위상책’(三十六計 走爲上策)이란 말이 나온다. 서른여섯 가지 계책 중 도망가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는 뜻으로, 상황이 불리할 때는 후퇴하여 기회를 엿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의미다. 유혹에 넘어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비결도 ‘피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유혹의 자리를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다. 그런데 본 장의 젊은이는 ‘큰길에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하여 그의 집 쪽으로’ 갔다. 스스로 유혹의 자리로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본 장은 이 젊은이를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자’라고 한 것이다. 그가 왜 이런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행동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자기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스스로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약한 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있으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의 연약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는 것이다.
죄에 대해 민감하고 철저해야 한다.
유혹은 독약과 같지만 달콤하게 다가온다. 재미를 줄 것 같고, 부귀영화를 줄 것 같고, 행복을 줄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유혹은 늪처럼 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벗어나기가 힘들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에스키모인은 늑대를 사냥할 때 예리한 칼에다가 칼날이 보이지 않도록 피를 묻혀 얼린 다음 그것을 얼음판에 거꾸로 세워놓는다고 한다. 피 냄새를 맡고 늑대가 찾아와서 정신없이 칼에 얼어붙은 피를 핥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늑대의 혀가 감춰진 예리한 칼에 베이고 피가 흥건히 묻어나지만, 늑대는 추위에 혀의 감각이 둔해져 있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결국 많은 피를 쏟은 늑대는 서서히 죽어가게 되고, 에스키모인은 아주 쉽게 늑대사냥에 성공하게 된다. 사단의 유혹도 이와 같다.
요청에 응하게 하는 심리기법 중에 ‘문 안에 발 들여놓기’(foot in the door)가 있다. 이는 작은 부탁을 먼저 들어주면 점점 더 큰 요구도 들어주기 쉬워지는 심리학적 설득 기법을 의미한다(예, 마트에서 시식). 사단이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기법이 바로 이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작은 틈만 보여도 그것을 빌미로 우리 안으로 들와 유혹하여 무너뜨린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이 틈을 타지 못하도록 틈을 주지 말라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한다. 흉내도 내지 말라는 의미다. 철저하게 차단하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뱀으로 위장한 사단에게 너무 쉽게 곁은 내준 것이 문제였고, ‘먹어봐’라는 사단의 유혹에 단호하게 ‘아니오’를 외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본문에 나온 어리석은 젊은이도 마찬가지다. 대로에서 뒷골목으로, 금지된 집(음녀의 집)으로 가까이 가는 것도 문제지만 음녀의 유혹을 과감히 물리치지 못한 것이 더 문제다. 본문에 젊은이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 있다.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9). 그가 음녀의 집을 찾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만 상황을 바꿀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음녀의 말을 듣고 ‘곧’그녀를 따라갔고(22),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되었다(23). 무엇이든 처음이 중요하다. 처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열 번이 되고,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초장에 물리쳐야 한다. 틈을 주지 말고 처음부터 단호하고 철저해야 한다. 길바닥에서 자더라도 음녀의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 귀를 틀어막고 음녀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음녀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유혹을 이기는 방법이다.
지혜를 사랑하라!
어떻게 해야 예외 없는 사단의 유혹에서 효과적으로 피하고, 또한 초장부터 그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을까? 그 비결이 함께 봉독했던 본문이다. 본 장의 구조를 보면, 비슷한 의미를 가진 서론(1~5)과 결론(24~27) 부분의 말씀이 음녀의 유혹에 빠진 젊은이의 이야기(6~23)를 감싸고 있다. 이는 유혹을 효과적으로 피하고, 또한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말씀(지혜)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말씀을 눈동자처럼 지키고, 손가락에 매고, 마음 판에 새기라는 것이다(1~3). 그만큼 말씀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이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지키고, 간직하고, 말씀대로 살게 된다. 즉, 생활화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음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된다.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 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5).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말씀(지혜)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4). 여기서 아버지의 가르침, 곧 지혜를 ‘누이’로 또는 ‘친족’으로 부르라 명한다. 이때 ‘누이’는 아내나 신부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아4:9, 5:1)이고, 친족은 ‘친밀한 친구’란 뜻이다. 남편에게 있어서 아내보다 친밀한 사람은 없다. 부부처럼 친밀한 사이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부사이를 무촌이라고 한다. 결국 둘 다 ‘아내’를 의미한다. 지혜를 이렇게 ‘아내’로 의인화한 것은 5절부터 나오는 ‘음녀’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혜, 곧 말씀을 ‘아내’라 하라고 한 것은 말씀을 사랑하라는 의미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처럼 말씀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음녀나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이것이 너를 지켜서음녀에게, 말로 호리는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리라.’(5).그렇다. 내가 말씀을 지키면 말씀이 나를 지켜준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면 말씀이 나를 소중히 여기고, 말씀을 사랑하면 말씀이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음녀와 이방 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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