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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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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9회 작성일 25-11-0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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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거울이다!

1:21~25

2025. 11/2, 11:00(성령강림 22번째 주일)

현대인과 거울

누구나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반드시 들여다보는 물건이 있다. 그것은 거울이다. 특히 현대인은 거울에 참 익숙하다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고집을 나설 때 또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한다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보는 행위는 현대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절차이자 의식이고보편적인 라이프스타일이다그것은 요즘 짓는 아파트나 연립주택 현관문 옆에 커다란 거울을 설치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대부분의 여성은 가방 속에 콤팩트를 가지고 다니며 언제든지 거울을 볼 준비가 되어 있다요즘에는 스마트폰의 셀카 기능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언제든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이것이 일상이다. 왜 이렇게 자주 거울을 보는 걸까? 물론 거울의 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이 자신의 얼굴이 남에게 좋아 보이는지 안 좋아 보이는지또 스스로 만족스러운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하기 위해서다

 

거울의 효과

거울이라는 물건이 생겨난 지는 오래지만모든 사람이 거울을 소유한 역사는 매우 짧다근대 이전까지,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까지 거울은 소수의 귀족과 부자의 전유물이었다그래서 거울을 가진 귀족이나 부자는 늘 자신의 얼굴과 몸치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사실 몸치장이라는 행위 자체가 거울의 산물이다거울을 보면 자신이 좋아 보이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런 판단을 근거로 더욱 치장에 몰입하고 거기에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입했다반면에 거울이 없어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는 하층민은 자신을 치장할 동기를 얻지 못했다동기가 없으니 항상 차림새가 남루했다. 물론 하층민은 상대적으로 시간과 자원이 없기도 했지만 자기 모습을 볼 수가 없고, 판단할 수도 없기에 더욱 몸치장과 멀어졌다. 그리고 차림새만 남루한 것이 아니다자신을 보지 못하면 행동도 비루해지기 쉽다.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그의 책미디어의 이해에서 이런 말을 했다. ‘거울의 역사는 의상예절그리고 자아에 대한 감각의 역사에서 중요한 장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그는 어떤 빈민가의 학교 교장이 교실마다 커다란 거울을 설치해 학생들의 학습 능률을 놀랍도록 높인 사례를 들었다거의 거울을 보지 않고 살던 빈민가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그런데 거울을 보자 비로소 자신에 대한 시각적 감각이 생겨나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자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거울이란 자신을 보며 타인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확인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도구그러니 돈이 없어서 거울을 살 수 없었던 근대 이전의 하층민에게는 자기개발에 대한 동기는 물론 자아에 대한 의식조차 희미했을 것이다이런 하층민을 보는 귀족의 시선은 한마디로 경멸이었다그러므로 예의 없고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를 비루하게 살아가는 하층민의 삶의 태도는 타고났다기보다 거울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이 말은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거울이라고 하는 것, 특히 거울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가 있다. 또한 거울을 소유한다는 것이 대단한 특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거울을 보니까 자의식이 생기고, 자의식을 갖게 되니까 자기를 성찰하게 되고, 자기를 성찰하며 자기를 바로 세워 성숙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거울의 효과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하는 말씀(자의식)

성경은 이러한 거울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거울을 말씀에 비유를 한 것이다. 본문이 바로 그것이다. 말씀이 곧 거울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곧 나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 말씀이라는 것이다. 말씀의 거울을 통해 가장 먼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자의식’)을 갖게 된다. 남루한 차림새로 하루하루를 비루하게 살았던 빈민가 아이들이 거울을 보고 자신에 대한 시각적 감각(자의식)이 생겨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거울을 통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소중하고 빛나는 존재인지를 알게 한다. 성경에는 우리의 자의식을 깨닫게 해주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창조 이야기부터 이런 점을 강조한다(1).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께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2장에서 인간을 위하여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곳을 누리도록 하심도 마찬가지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43:4).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46:3~5). 내가 이런 존재라는 것을 말씀의 거울을 보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말씀을 보고서 이런 소중한 자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한 하나님의 걸작품이고, 하나님께 보배롭고 존귀한 사랑받는 존재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업고 안고 품고 온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여기서 경건한 자존감이 만들어지게 된다.

 

자기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성찰)

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면 자연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소위 자기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실학자 박지원의양반전에 가난한 양반의 빚을 갚아주고 상민인데 양반이 된 부자가 나온다. 고을 수령이 상민에서 양반이 된 부자에게 양반이 지켜야 할 규례를 이렇게 알려주었다. ‘양반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 이것을 어겨서는 안 되느니라. 양반은 절대로 천한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옛사람의 아름다운 일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세워야 하느니라. 새벽 네 시가 되면 일어나 이부자리를 잘 정돈한 다음 등불을 밝히고 꿇어앉는데, 앉을 때는 정신을 맑게 가다듬어 눈으로 코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두 발꿈치는 가지런히 한데 모아 엉덩이를 괴어야 하며, 그 자세로 꼿꼿이 앉아동래박의(과거 시험을 위한 일종의 수험서)를 얼음 위에 박 밀 듯이 술술 외워야 하느니라.’ 양반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다.

 

이런 삶을 위해 먼저 요구되는 것이 성찰이다. 성찰이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며 살피는 일이다. 상민으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길들어진 상민의 기질이 무엇이고, 습관이나 행동이 무엇인지, 가치관 등이 무엇인지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이런 것을 바로잡을 수가 있고, 또한 앞에서 말한 양반으로서 갖춰야 할 것을 채워갈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은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니 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울과 같은 말씀을 주신 것이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살펴서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고, 필요한 부분은 치장하는 것처럼 말씀을 통해 이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거울은 단지 우리의 겉모습만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겉은 물론이고 속까지, 영혼까지 성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이란 거울을 통해 꼼꼼히 살펴야 한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말씀(실천)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잘못되었는데도, 고치지 않고 뒤돌아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울을 본 이유가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필요한 것은 더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중요한 이유도 이것이다. 말씀의 거울을 통해 현재 자신의 상태를 진단하고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다. 진단만 하고 조치를 하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성찰(진단)에는 항상 실천(조치)이 전제되어 있다. 실천 없는 성찰은 공허한 일이다. 사람에게 변화는 실천할 때 일어난다. 알고 깨달은 바를 실천할 때 사람이 변하고, 인격이 성장한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잊어버리는 자’(23,24)라고 말씀한 것이다. 순종이 없는 들음은 무익한 것이다. 말씀을 들었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경건해졌다고, 자신이 좀 더 그럴듯한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고 착각이다. 위대한 사람 옆에 서 있다고 내가 저절로 위대해지지 않는다. 배부른 사람 옆에 있다고 내가 배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다. 순종보다 더 나은 스승도, 진정한 말씀의 해석도 없다. 실천되지 않은 말씀은 변화와 성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영적 능력은 말씀의 실천에 있다. 수년 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우리에게 영적 능력이 없는 것, 변화와 성숙이 없는 것, 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자신만은 볼 수 없는 아이러니를 가진 존재다그러니 자신을 보고 싶은 열망이 생길 수밖에 없고이런 열망이 거울을 탄생시켰다. 19세기 들어 거울이 대량 생산됨으로 거울의 대중화가 이뤄졌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마찬가지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성경을 가진 시대가 되었다. 누구나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영적 거울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듣는 모든 행위가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는 행위와 같다. 거울이 단순한 장식이 아닌 것처럼 말씀도 그렇다. 우리가 수시로 거울을 보듯 말씀도 그렇게 해야 한다. 또한 거울을 보고 다듬고 가꾸는 것처럼 말씀으로 우리의 삶과 영혼을 다듬고 가꿔야 한다. 삶의 변화와 영적 성장과 성숙을 원한다면, 영적으로 능력있는 삶을 원한다면 더욱 그래야 한다. 말씀을 자주 보고 듣고, 또한 실천해야 한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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