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믿음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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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5회 작성일 25-11-16 14:38본문
감사는 믿음의 꽃이다.
합3:16~19
2025. 11/16, 11:00(성령강림 24번째, 추수감사 주일)
최악의 상황에도 최선을 생각하라!
어느 영어학원 광고지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당신에게 영어는 힘입니까? 짐입니까?’ 중요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둘 다라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영어공부는 영어를 힘이라고 생각하느냐 짐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힘이라고 생각한 사람이라야 짐이 되어도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예배가 힘이냐? 짐이냐?’ ‘직분이 힘이냐? 짐이냐?’ ‘사명이 힘이냐? 짐이냐?’ ‘섬기는 것이 힘이냐? 짐이냐?’ 이에 대한 대답에 따라 신앙의 질이 달라진다. 예배가 힘이고, 직분이 힘이고, 사명이 힘이고, 섬김이 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배에 집중하고, 직분에 충성하고, 사명에 헌신하고, 기쁘고 즐겁게 섬기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예배는 복이 되고, 직분이 복이 되고, 사명이 복이 된다. 섬기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이다. 생각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런 생각은 태도를 만든다. 그러니 생각이 중요하다.
한 농부와 그의 아내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돌풍(突風)이 몰아쳤다. 바람이 얼마나 강했던지 이 부부가 자고 있던 주택이 통째로 날아갔고, 이 부부는 침대에 누워있는 그대로 어느 들판에 떨어졌다. 그때 농부의 아내가 울기 시작했고, 농부는 아내가 놀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며 달랬다. 그러자 아내는 지금 자신이 놀라서 우는 것이 아니라면서 말했다. ‘여보! 내가 당신과 30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렇게 나란히 외출을 해본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지만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생각하는 여유다. 비록 내가 처한 현실이 최악이라도 최선을 생각하고, 최선으로 해석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과 해석은 농부의 아내처럼 감사로 감격으로 이어지게 된다.
믿음이 최선의 생각을 만든다.
그렇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생각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구약에 유명한 ‘감사’대장 선지자가 나온다. 유다 말기에 활동했던 ‘하박국’이라는 선지자다. 원래 그는 ‘불평’ 전문가였다. 그는 하나님께, 특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이 많았다. 그의 불평은 이런 것이었다. 그가 활동할 당시 유다 사회는 불의와 죄악, 특히 의인이 악인에게 핍박을 받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그는 이런 세상이 너무 싫었고, 특히 이런 세상에 대해 침묵만 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침묵하고 계시는지 모르겠다며 하나님께 불평을 쏟아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할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그는 또다시 불평하며 항의했다. 유다를 벌하기 위해 어떻게 유다보다 더 사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실 수 있냐는 것이다. 즉, 악인으로 하여금 어떻게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심판하게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것이 합1장의 내용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에게 결정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2:4)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통해 그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과 구원의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된다. 불평 전문가가 감사대장으로 바뀐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를 합3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지자가 이렇게 바뀐 것은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다. 상황은 더 악화 되었다(16). 침략자의 말발굽 소리가 온 땅을 진동하고, 온 국토가 폐허가 되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무화과나 포도알 하나 건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불평의 문을 꼭 닫고 감사와 찬송을 쏟아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실을 바라보는 그의 눈과 생각이 바뀌고, 현실에 대한 해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17~18). 여기에 그가 처한 상황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없다.’라는 단어다. 이 단어 무려 5회나 반복이 되고 있다.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그의 태도다. 그는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즐거워하며 기뻐한다.’라고 고백한다.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이 즐거운 이유이고, 하나님이 기쁨의 이유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래 그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불평 전문가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적인 믿음을 가진 다음 그의 태도가 이렇게 바뀌었다. 불평 전문가에서 감사대장이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감사의 절대조건이다. 믿음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을 생각하게 하고, 최악의 상황이나 사건을 최선으로 해석하게 한다. 이렇게 생각이 달라지고 해석이 달라지니까 자연스럽게 불평과 원망이 감사로 바뀌게 된 것이다.
금번 다니엘 기도회 셋째 날 간증 제목이 참 인상적이었다. ‘은혜라 쓰고 빚이라 읽는다.’ 믿음의 사람은 거저 받은 은혜에 사명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의미다. 믿음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은 고난이나 고통, 슬픔, 시험, 상처, 질병이라 쓰고 은혜로 감사로 읽게 만든다. 바울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사람이 그랬다. 바울에게는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는 심각한 질병(가시)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가시를 제거(치료)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를 드렸다(고후12:8). 여기서 3은 단순히 숫자 3을 뜻하지 않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의미다(3은 완전수).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거절이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그후 그는 자신의 질병을 기쁨이라 자랑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빌립보서에서는 그가 감옥에 갇힌 사건을 두고 다들 걱정하는데, 정작 그는 감사로 표현했다. 문제에 대한 이러한 그의 해석과 태도는 믿음에서 온 것이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에서 온 것이다(롬8:28).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보배라고 말씀하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말씀한 것이다.
감사는 믿음의 꽃이다.
믿음은 최악의 상황도 최선으로 보게 하고, 생각하게 하고, 해석하게 한다. 그래서 하박국과 같은 불평 전문가를 감사대장으로 만든 것이고, 바울처럼 치명적인 질병을 기쁨으로 자랑으로 여기게 만든 것이 믿음이다. 감옥에 갇힌 매우 불편하고 힘든 상황을 감사하게 만든 것이 믿음이다.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그래서’ 감사, ‘그러니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것까지’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며 살게 된다. 이런 사람이라야 범사의 감사, 무조건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사는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의 수준이고, 믿음의 열매다. 감사는 믿음의 ‘꽃’이다. 믿음의 최고봉이란 뜻이다. 감사가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주님은 믿음을 기뻐하시는데, 믿음의 꽃인 감사를 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구약시대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제물이었다. 그런데 이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제물을 드리는 제사를 드린 사람의 마음이다. 즉, ‘감사’하는 마음이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50:14,15,23).
우리 지역 출신으로, 헝가리 집시들의 아버지 박완주 선교사 이야기다. 그는 유학 중 상대방의 과실로 인한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는 의족을 한 불편한 몸으로 지금도 동유럽 헝가리에서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다. 그의 사고 소식을 듣고 그의 어머니가 처음엔 의족을 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통곡했다. 그러다 아들의 의족을 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정도면 우리 아들 목숨은 백 번도 더 잃었을 사고인데, 다리만 가져가시고 생명은 살려주셨네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김 선교사 어머니의 감사는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사고에 대한 믿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왜 하나님이 내 아들의 다리를 가져가셨나요?’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아들의 생명을 지켜주셨군요!’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감사는 상황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해석을 결정짓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처한 최악의 상황까지도 최선으로 보게 하고, 최선으로 생각하게 하고, 최선으로 해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것까지도’ 감사하게 된다. 우리 또한 이런 보배로운 믿음의 사람이다. 이 믿음으로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단풍처럼 감사로 물든 인생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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