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성의 비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404회 작성일 08-04-06 15:21본문
접근성의 비밀
시73:22~28, 약4:8~10
2008. 4/6 11:00
가까이 할수록 호감을 갖는다.
지금이야 에펠탑(Eiffel tower)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물이지만 이 탑이 세워질 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에펠탑은 1889년에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만국박람회의 조형물로 세워졌다. 이 건설계획이 발표되자 파리의 지식인과 시민들이 극심하게 반대를 했다. 파리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어떤 예술가는 에펠탑이 파리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고까지 공격했다. 이러한 반대에서도 불구하고 파리시는 20년 후에 에펠탑을 철거한다는 약속을 하고 건설을 했다. 그런데 에펠탑이 일단 건설되어 자태를 드러내자 시민들의 반응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에펠탑에 대한 평가는 점차 긍정적으로 변했고 마침내 시민들은 에펠탑을 극찬하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을까? 심리학에서는 이를 ‘단순노출효과’라 부른다. 어떤 대상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그 대상에 대해 점차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는 현상이다. 분명 에펠탑은 그 엄청난 높이로 인하여 파리시민들에게 쉽게 노출되었다. 이러한 노출이 날마다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에펠탑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이처럼 반복노출을 통해 형성된 호감을 ‘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 부른다. 처음엔 싫더라도 보고 또 보면 없던 정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영업사원은 이 에펠탑효과를 영업기법에 응용했는데, 그는 이것을 ‘좌우지간 기법’이라고 불렀다. 좌우지간 찾아가고, 좌우지간 만나고, 좌우지간 이야기하면 결국 성사가 된다는 것이다. 좌우지간 만나고 이야기하다보니 관심을 보이지 않던 사람도 관심을 보이게 되고, 심지어는 싫어하던 사람도 좋은 감정을 갖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접근성의 원리, 혹은 접근성의 비밀이다.
가까이 함의 대상이 중요하다.
관계에 있어서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는 중요하다. 착하고 순한 사람도 거친 환경에 처하고 거친 사람들을 만나면 생각이나 말, 행동이 거칠어진다. 하지만 좋은 환경에 있고 좋은 사람을 가까이하면 거친 사람도 다듬어지고, 불손한 사람도 공손해진다. 무익한 사람이 유익해지고, 무능하고 무지한 사람이 유능하고 유식해진다. 21세기는 ‘노하우(know-how)보다 노후(know-who)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술이나 방법보다 사람, 즉 사람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렇다.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다.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를 가까이 하느냐. 이것이 관건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기독교를 기적의 종교라고 한다. 갈릴리의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기독교회의 초석이 된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다. 그들은 절대로 주목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대부분이 당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갈릴리 출신에다 배움을 갖지 못한 어부들이었다. 그런데 역사상 그들만큼 주목을 받은 사람도 드물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예수님을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문의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28)고 말하고 있다. 인생의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우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우리의 존재와 소속과 신분이 바뀌게 된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롬3:23,6:23).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은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생명과 영생을 가진 존재로 바뀌었고, 본래 소속과 신분이 마귀의 자녀 진노의 자녀로 지옥에 가야할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으로 그 소속과 신분이 바뀐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 안에 바뀐 우리의 존재와 소속, 그리고 신분을 이렇게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2:9). 이 모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누리게 된 복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함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도 영향을 준다. 어둠은 우리의 힘으로 몰아낼 수 없다.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을 하고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쏟아도 안된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자연히 사라진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다. 오직 빛 되신 주님을 가까이하면 삶의 어두운 부분들이 사라진다. 우리의 삶을 묶고 있는 모든 어둠의 세력들이 사라지고, 어둠의 장막이 무너지고, 어두운 성품들이 사라진다.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된다.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악한 습관들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어둠의 세력과 더불어 우리 안에 살고 있던 질병, 고통, 아픔, 상처들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대신 거룩한 성품들(벧후1:4)과 습관들로 채워지게 된다.
또한 쇠붙이들이 자석을 가까이하면 자력이 생겨서 다른 쇠붙이들을 끌어당기듯 주님을 가까이 하면 주변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접근성의 힘이다.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대의 관심은 골리앗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말과 그의 큰 키와 어마어마한 창과 칼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골리앗과 맞설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집중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이었다. 그의 입에선 하나님 이야기만 나왔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맞서 싸웠다. 그리고 승리했다(삼상17장). 쇠붙이가 자석에 붙어야 자력이 생기는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 편에 서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다. 교회나 신자들의 삶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함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막을 건너는 6가지 방법』이란 책에, 사막을 건너는 방법으로 지도를 의지하지 말고 나침판을 의지하라는 말이 나온다. 지도란 인간의 축척된 지식, 기술, 경험의 상징이다. 그런데 사막에서는 이런 것이 무용지물이란 말이다. 바람이 불면 밤사이에 지형이 바뀌고 지도상에 표시된 길이나 좌표가 사라지는 곳이 사막이다. 그래서 지도는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서남북의 방위는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방위를 잡아주는 나침판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인생이라는 사막을 성공적으로 건너기 위해선 인간의 축적된 지식, 기술, 경험의 상징인 지도보다 변하지 않는 나침판을 의지해야 한다. 변하지 않는 나침판이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즉 그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인생의 사막을 성공적으로 건널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할 중요한 이유이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복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의 조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세상으로 향했던 우리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한걸음씩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서는 영적 훈련이고,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이 영적훈련의 목표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함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첫째가 회개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담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고 결실치 못하게 만들고, 우리의 기도를 헛되게 한다. 모든 경건한 행위들을 무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죄이다. 이렇게 하나님과 막히고 뒤틀린 관계를 뚫고 정상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회개’다.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탄식하는 상한 심령,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신다(시51:17)고 성경은 말씀한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까이 할 것을 권하면서, 그 조건으로 손(행위와 생활의 주체)을 깨끗이 하고, 마음(생각과 사상의 주체)을 성결케 할 것을 요구한다(약4:8). 또한 이것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중요한 방법이다(찬송가 338장 참조).
둘째는 겸손이다. 겸손은 야고보 사도가 제시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두 번째 조건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낮추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높이는 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내 자신을 겸손히 낮추면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나를 높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또한 낮은 곳에 고인다. 주님도 마찬가지다. 겸손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주님을 가까이 만나는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 주님은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분이시다(성탄이 이를 증명함). 하나님도 교만한 사람은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셋째는 사모하는 마음이다. 간절히 기다리고 기대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시다.”(시107:9). 또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고,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시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들이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이다. 모든 것이 여기서 결판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이 찬양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말씀을 듣고 같이 예배를 드렸는데, 어떤 사람은 지금 여기에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강한 임재와 은혜를 받고 어떤 사람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몸은 여기에 앉아 있지만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다. 불교인들이 부처에게 3천배를 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사랑하는 주님께 3천배를 드리기로 결심을 했다. 단박에 끝낼 것으로 생각하고 벽에 예수님의 사진을 붙여놓고 절을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어 며칠동안 나누어서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참으로 피상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인들이 3천배를 드리는 그러한 정성, 수고, 아픔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드린 적이 있는가! 참으로 부끄러웠다. 사랑은 공허한 구호나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구체적인 실천이다. 사랑에는 자신의 수고와 아픔, 정성을 드리는 구체적인 행위가 따라야한다. 이와 같은 삶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기다리고 기대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가까이 하신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28). 복 받은 삶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다. 복 받을 사람은 주님을 늘 가까이한다. 주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주님의 발아래 엎드려 기도하고, 그리고 발아래서 주님을 섬겼던 마리아처럼 회개와 겸손, 사모함으로 날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 되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