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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구경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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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8회 작성일 26-02-0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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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구경꾼은 없다.

벧전2:9

2026. 2/8. 11:00

교회 쇼핑족(Church Shopper)

교회 쇼핑족이란 말을 들어보았는가? 성도와 관련된 신조어다. 이는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성도의 신앙 모습을 잘 나타내주는 말이라 생각한다. 교회 쇼핑족이란 마치 상점에서 물건을 골라 사듯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방식으로 교회를 선택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교회 쇼핑족에는 네 부류가 있다고 한다.

첫째, ‘안개교인이다. 예배만 드리고 어떤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교인을 말한다.

둘째, ‘가면교인이다. 출석하는 교회는 있지만 다른 교회나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신앙적 욕구를 채우는 교인을 말한다.

셋째, ‘쇼핑몰교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갖춰진 교회에서 헌신도 책임도 하지 않으면서 각종 프로그램을 누리는 교인을 말한다.

넷째, ‘유목민교인이다. 한 교회에 정착하지 않고 신앙적 욕구에 따라 여기저기로 떠돌아다니는 교인을 말한다.

 

그러니 교회 쇼핑족은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자신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다. 문제는 교회에 이런 사람이 증가하고 있기에 이런 말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쇼핑하듯 더 나은 서비스더 나은 자녀교육 시스템, 더 쾌적한 예배 환경을 찾아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의 모습도 바뀌고 있다. 상품도 브랜드화가 되고, 대형마트만 살아남는 것처럼 그래서 교회도 브랜드화되고 대형 교회만 살아남게 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회 안에 주인의식과 책임감이 있는 헌신적인 성도는 사라지고 그저 교회 마당만 밟는 구경꾼만 넘쳐나게 되었다. 그러니 개인도 교회도 그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구경꾼의 심리

구경꾼(방관자) 심리는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지 않게 되거나, 도움 제공이 지연되는 현상을 말한다. ,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거나 위험에 처했을 때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방관자 심리에는 세 가지 심리적 메커니즘을 통해 발생한다. 하나는 책임분산이다. 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책임감을 덜 느낀다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수의 무지다. 다른 사람이 행동하지 않으면 이 상황이 심각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닐 수 있다고 잘못 해석하게 되어 아무도 행동에 나서지 않다는 것이다. 셋째는 평가 불안이다. 잘못 개입하여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까 걱정하는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불안감이 더욱 커져 행동을 망설이게 된다. 이와 같은 방관자 심리가 교회 쇼핑족을 더욱 많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M. Luther King)은 이런 말을 했다.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격렬한 외침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가 그 능력을 잃어가는 것도 세상이 악하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해서가 아니라 성도와 교회가 구경꾼, 혹은 방관자로 전락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적 구경꾼(방관자) 심리는 신앙생활에서 열정을 잃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마치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구경꾼/방관자 심리는 사단이 우리의 신앙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전략 중 하나다.

 

교회에 구경꾼은 없다!

개혁교회는 태생적으로 참여적인교회다. 모두가 구경꾼’(Bench Warmer)이 아닌 선수인 교회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신학적 기초가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론이다. 구약시대에는 레위인과 일반 백성으로 나뉘어 하나님을 섬겼고, 신약시대에도 중세시대엔 성직자와 평신도가 분명히 구분되었다. 사역의 주체는 성직자였고, 평신도는 거룩한(?) 소비자에 불과했다. 이 점은 예배에서 더욱 분명했다. 예배는 성직자가 주도했고 들리지도 않는 예배에 성도는 그냥 구경꾼으로만 앉아 있었다. 이에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들이 개혁자들이고, 모든 성도가 적극적인 참여자이고 영적 생산자라고 부르짖었다. 운동경기로 말하면 성도는 벤치 워머가 아니라 선수라는 것이다. 모두가 사역자(일꾼)라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만인제사장론이다. 본문이 곧 이점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럼에도 교회 안에 구경꾼이 많고, 문제는 그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가나안’(교회에 나가지 않는) 성도가 늘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조차 헌신, 희생, 섬김, 책임, 충성과 같은 소중한 영적 자산이자 가치가 낡은 가치강요된 의무로 인식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삶과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적/ 시대적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물론 교회와 성도는 시대적 변화에도 민감해야 하겠지만 시대에 물들지 않아야 하고, 더 나아가 시대를 변화시켜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섬길 수 있는 교회, 사랑할 수 있는 지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른다. 교회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이 큰 특권이고 영광이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성도는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과 몸의 지체를 사랑하고 섬길 수가 있겠는가? 교회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서 그 영광에 참여하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다. 시류에 편승하여 편리함만 추구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우리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자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주님은 우리를 달아보고 계신다. 주님께서 정하신 기준에 부합한지 평가하고 계신다.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25:21)라는 멋진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구경꾼에서 헌신자로

이덕주 교수가 쓴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에 나온 내용이다. 백만명구령운동이 한창이던 19099, 평북 영변에서 감리교 성도를 중심으로 십일조회가 조직되었다. 돈이 아닌 시간의 십일조를 바치기로 서약한 여성의 모임이다. 그들은 1년에 5주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고, 2주 동안 교리와 전도법에 관한 교육을 받고, 3주 동안은 둘씩 짝지어’(6:7) 각 지역을 다니며 전도했다. 경제력이 없는 여인들이기에 여행 경비는 선교사들이 지원했다. 그들의 헌신은 선교사들을 감동시켰다. 1910년 영변에서 활동하던 감리교 여선교사 에스티의 보고에 의하면. 어떤 부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주님이 제게 이 같은 기쁨을 주셨는데, 이 정도밖에 드리지 못한다면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매 석 달 중에 한 달은 집안일을 하고, 나머지는 주님께 바치기로 했습니다.’ 1년의 를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이 부인은 여행 경비를 제외하곤 한 푼도 받지 않고 자신이 약속한 날 이상을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선교사는 십일조회란 이름을 바꿔야할 것 같다고 했다. 이 아니라 그 이상을 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십일조회는 해주, 인천, 서울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십일조회는 물질보다 소중한 시간을 바친 우리나라 초대 성도의 헌신과 섬김을 잘 보여준다. 이런 헌신과 희생을 통해 우리 한국교회는 선교역사에 유래가 드문 성장을 이룬 교회가 되었다. 이런 아름다운 전통을 가진 교회가 우리 한국교회다.

 

자신을 드린 헌신자가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의미 있는 일에 귀하게 쓰임을 받는다. 성경에서 그 예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였다(2:1-12). 많은 사람이 몰려와 주님의 계신 집의 문 앞까지도 빈자리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주님 앞에 왔던 중풍병자였다. 또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빌립보에 갔을 때다. 안식일에 몇 명의 여성을 만나 복음을 전했는데, 마음을 열어 주님을 영접했을 뿐 아니라 복음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루디아 하나뿐이었다(16:11-15). 오늘도 많은 사람이 주님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 구경꾼아닌 참여자가 얼마나 될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참여로 그치지 않고, ‘헌신자로까지 자신을 드리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어쨌든 여러모로 부족하고 문제도 많은 우리에게 헌신자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주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부탁드린다. 모두 힘을 내어 자신을 주님께 헌신자로 드려서, 주님의 사역에 귀하게 쓰임 받는, 그래서 주님께 칭찬받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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