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사랑합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70회 작성일 26-02-15 12:37본문
교회를 사랑합시다.
학1:1~11
2026. 2/15. 11:00
거자일소(去者日疎)
사자성어에 ‘거자일소’(去者日疎)라는 말이 있다. 친한 사람도 떨어져 있으면 멀어진다는 뜻이다.친했던 사람도 오래 만나지 못하면 멀어지게 되고, 서먹했던 사람도 자주 만나다 보면 친근해지는 것이 인간관계다. 그래서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는 비례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물리적 거리와 영적 거리도 비례한다. 비근한 예로 1주일에 10번 예배를 드린 사람과 단 한 번 드린 사람이 어떻게 주님과의 영적 거리가 같을 수 있겠는가? 하루에 1시간 이상 기도하는 사람과 생각날 때만 가끔 기도하는 사람이 결코 주님과의 거리가 같을 수가 없다. 사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훈련이다. 그리고 그 거리를 좁히는 방법이 여러 경건의 훈련이다. 예배생활을 비롯해서 기도생활, 찬양, 말씀, 전도, 봉사와 섬김의 생활이다.
신앙생활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곧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핵심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성도를 교회에 묶어두기 위한 꼼수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이렇게 한 것이다. 주일예배만 드리다 보니 일주일이 너무 길어 중간에 한 번 더 모이자 해서 생긴 것이 수요예배이고, 수요예배 이후 주일까지가 너무 길게 느껴져 중간 또 한 번 모인 것이 각 가정에서 모인 구역예배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매일 모이게 된 것이 새벽예배다. 모두가 자발성이었다. 그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고 싶어서 교회를 중심으로 부지런히 모이게 된 것이다. 모여서 기도하고, 모여서 예배드리고,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모여서 전도하고, 모여서 교제하고 섬겼다. 초대 예루살렘교회 성도가 그랬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가까이 해야 한다. 이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거리를 좁히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본문이 가르쳐주고 있다.
무관심이 문제다.
바벨론에서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유다백성은 가장 먼저 파괴된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였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기초를 놓던 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가 주전 538년이다. 포로지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되던 해다. 하지만 성전 건축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들의 부흥을 싫어하는 주변 민족의 심각한 반대와 모함으로 결국 지대만 놓고 건축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약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물론 처음에 안타까움도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고, 그저 현실 생활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선지자가 책망한 것처럼 핑계를 대면서 성전 건축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집 꾸미기에만 바빴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2,4).
이때 선지자 학개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일어나 백성을 크게 책망했다. 그 내용이 본문이다. 성전 건축에 대해선 시기상조 운운하며 방치하고 자기들 생활에만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성전 건축에 대한 관심이 없는 점을 지적했다. 이것은 결국 성전에 대한 무관심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다.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 제사의 중심, 공동체의 정체성, 그리고 신앙의 핵심을 상징한다. 특히존재의 이유였다. 이런 성전에 대한 무관심이 당시 사람들의 문제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말씀이 ‘이 백성’이란 표현이다(2). 하나님께서 유다를 ‘내’ 백성이라 하시지 않고 ‘이’ 백성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백성에 대해 하나님의 반응이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성전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든 사람이 ‘학개’ 선지자다. 선지자는 그들의 성전에 대한 무관심만 책망한 것이 아니다. 성전에 대한 무관심의 결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5,6). 열심히 수고하지만 수고의 결과가 변변치 못하고, 수익은 늘었어도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이유, 곧 형통하지 못한 이유를 밝혔다. 그 이유가 성전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데, 하나님께 무관심했으니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관심이 사랑이다.
현대인에게 이른바 4‘무’(無) 병이 있다. 무목적, 무감동, 무책임, 그리고 무관심이다. 그중 제일 무서운 건 무관심이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은 현대 사회를 황폐케 하는 최고의 악이 무관심이라고 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다. 아름다움의 반대도 추함이 아닌 무관심이다. 반면에 관심은 사랑이다.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되고 관심으로 사랑이 성숙해 간다. 사랑은 관심이란 자양분을 먹고 자라는 꽃이다. 그러므로 관심을 거두는 것은 곧 사랑을 거두는 것이다. 사랑에서 관심이 사라지면 그 사랑은 식기 때문이다. 신앙에서 최대의 적도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Lukewarm)를 의미하며, 이는 영적 죽음과 직결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태다. 공감과 관심이 관계의 질을 결정짓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관심이 주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주님의 몸인 교회와 그 몸의 지체인 성도를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에 대한 사랑이자 방법이다. 그러니 교회는 성도가 항상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할 중요한 대상이다.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
물론 교회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차고 넘친다. 여러 매체 등을 보면 이것을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 특히 많은 젊은이가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나가지 않는 사람(일명 ‘가나안’ 성도)이 크게 늘고 있다. 그런데도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인가? 라고 반문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 교회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몸이고, 성도는 그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다. 흔히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한다. 그냥 사람이 아니다. ‘사랑받는’ 사람이다.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 교회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13:1).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던 사람들이 교회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신 것은 그들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고,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기에 끝까지 품고 안고 업고 가신 것이다. 사랑하신 것이다.
흔히 부부는 닮는다고 한다. 왜 닮을까? 오랜 세월 함께 지내면서 닮으려고 애를 쓰기 때문이다. 원치 않아도 상대방이 좋아하니까 운동도 함께하고, 가고 싶은 곳도 함께 가고, 하고 싶은 일도 함께하고, 먹고 싶은 것도 함께 먹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걷다 보니 어느새 서로 닮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줄이거나 끊고 서로 맞춰가며 살기 때문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 나도 좋아하고, 주님께 기뻐하시는 것 나도 기뻐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나도 행하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이 있고, 주님의 시선이 있는 것에 마음과 시선을 두고 주님께 맞춰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할 이유, 지체를 소중히 여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마음이 있고, 주님의 시선이 향해 있고,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 소중히 여겨줄 때 좋아하며 보답하려고 한 것처럼 주님도 그렇다. 그러므로 교회를 더욱 사랑하자. 그 지체인 성도를 귀하게 여기며 뜨겁게 사랑하자. 문제가 많고, 흠이 많을수록 더욱 그리하자. 자격이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을 그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격도 가치도 없는 것을 그리한 것은 사랑이다.
▶영상(천국에서 한국 성도 중 가장 부자)
관련링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