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새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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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68회 작성일 26-03-08 16:17본문
영광의 새 이름
사62:1~5
2026. 3/8. 11:00(사순절 셋째 주일)
이름에 담긴 정체성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의 일부분이다. 이름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저 형태(몸짓)로만 존재하던 것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꽃)가 된다는 것이다. 이름은 내가 누구인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최초의 신호다. 이것이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먼저 통성명을 나눈 이유다. 사실 이름이라는 빈 그릇에 나라는 본질을 담아가는 과정이 인생인 셈이다. 누군가 이름을 부를 때, 그 이름에 담긴 의미는 무의식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고,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불려지는 이름대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틴어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이름에 예언이 담겨있다.’ 실제로 이름에 담긴 뜻을 의식하며 살다 보면, 그 뜻에 가까운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흔한 말로 이름대로 된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성경도 이름을 매우 중요시한다. 성경에 나온 사람의 이름이 약 3,237개 정도 된다고 한다(삼국지는 약 1,200개).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기호나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사명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과 사라는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뜻으로 그들이 장차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을 의미하고, 모세는 ‘물에서 건져내다.’라는 뜻으로 그가 민족의 구원자가 될 것을 미리 보여준다. 신약에서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삶과 사역, 곧 생애를 잘 반영하는 이름이다. 이런 점에서 이름은 곧 그 사람을 뜻한다. 그 사람의 정체성과 사명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름이다.
영광스러운 새로운 이름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소중한 이름을 새로운 이름으로 바꿔서 부르게 하는 사건(개명사건)이 가끔 나온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사래가 사라로, 야곱이 이스라엘로, 솔로몬이 여디디야로, 시몬이 베드로로, 사울이 바울로 그 이름이 바뀐 사건이 나온다. 이렇게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의 존재가 새롭게 바뀌었다는 의미다. 즉, 정체성의 전환을 의미한다.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새로운 이름 ‘세례명’을 준 것도 같은 의미다. 오늘 본문에도 이름이 바뀐 사건이 나오고 있다.
이사야서는 신/구약성경의 권수와 같은 66장으로 되어 있고, 내용도 구약 39권, 신약 27권처럼 죄에 대한 심판 예언으로 되어 있는 전반부(1~39장) 39장, 구원과 회복을 예언한 후반부(40~66장) 27장으로 되어 있다. 40장 이후 바벨론 포로에서의 회복을 강조한 선지자는 본장에선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다. 주전 587년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하면서 예루살렘 도성도 그 성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버림받은 자’(아주바, עֲזוּבָה), ‘황무지’(쉐마마, שְׁמָמָה)로 변했다. 이 ‘아주바’와 ‘쉐마마’가 그동안 예루살렘의 이름이었다. 즉, 바벨론 포로기라는 고난 속에서 방치와 폐허가 그의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부끄러운 이름을 지우고 영광스러운 새로운 이름을 주셨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이 영광스러운 새로운 이름이 ‘헵시바/헤프찌바’(חֶפְצִי־בָהּ)이고, ‘쁄라/쁘울라’(בְּעוּלָ֑ה)다.
하나님 손의 왕관
‘헵시바’(חֶפְצִי־בָ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라는 뜻이다. 과거의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마치 눈의 연기처럼 하나님의 근심거리였고 고통거리였다.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너는 내 기쁨이다.’라고 선포하시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시느냐에 있다. 하나님이 외면하시면 아주바(버림받은 자)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면 헵시바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며 ‘너는 나의 기쁨’(My delight is in her)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헵시바다. 그리고 ‘쁄라’(בְּעוּלָ֑ה)는 ‘결혼한 여인’이란 뜻이다.예루살렘이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되리라는 선포다. 이렇게 친밀한 부부관계로 말씀하신 것은 예루살렘이 더 이상 소박맞은 여인처럼 보호자도 관리자도 없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보호자)도 관리자도 없이 방치된 황무지와 같았던 예루살렘이 좋은 주인, 성실한 관리자이신 하나님을 만나 풍성하고 안전한 땅, 기름진 축복의 땅이 되리라는 선언이다. 더 이상 외롭거나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극진한 보호와 보살핌 속에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것이 쁄라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는가? 그 이유는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고(1b),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이런 열심을 쏟으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3). 하나님손의 아름다운 관, 하나님 손의 왕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왕관은 가장 귀하고 값진 보석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손의 왕관이란 ‘너는 내게 가장 빛나는 존재다.’라는 의미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런 이름을 주신 것이다. 다음은, 왕관은 왕의 권위와 승리를 상징한다. 예루살렘이 왕관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증거를 예루살렘을 통해 보여주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통 왕관은 머리에 쓰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이 손에 들고 계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손으로 쥐고 보호하시기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결코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강력한 보호와 소유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곧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이런 존재라는 것이고, 때문에 아주바와 쉐마마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지우고 헵시바와 쁘울라라는 영광스러운 새로운 이름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우리의 반응
세상은 종종 우리에게 가혹한 이름을 붙인다. 실패자, 낙오자, 파괴된 자, 잊혀진 자라는 이름표를 낙인(stigma)처럼 가슴에 붙이고 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영적 ‘아주바’(버림받은 자)이고, ‘쉐마마’(황무지)다. 우리 자신조차도 스스로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고립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과 자기 스스로 만든 낙인을 떼어내시고, 우리를 가장 친밀한 사랑의 파트너로 세워 주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 귀에 속삭이신다. ‘너는 헵시바야! 너는 쁄라야!’ ‘너는 나의 기쁨이고, 나의 자랑이고, 나의 영광이야!’ ‘너는 내 손에 있는 빛나는 면류관이야!’ ‘어떤 경우에도 내가 책임지고 너를 지켜줄게!’ 마치 신혼부부의 설렘과 기쁨, 그 순수한 사랑의 에너지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마음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무감으로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신랑처럼 우리를 열렬히 기뻐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5절에 잘 드러나고 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5b).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우선 세상의 소리에 귀 닫아야 한다. 세상은 우리를 ‘실패자’, ‘버림받은 자’,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황무지와 같은 자’라고 부른다. 어쩌면 당연한 소리다. 그들이 본 우리의 모습이 아주바나 쉐마마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다.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런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한다. 대신 하나님께 시선을 두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빛나는 왕관이다. 그러니 헵시바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사실, 나는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으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또한 쁄라의 소망을 품어야 한다. 돌보는 사람 없이 버려진 황무지 같던 우리 삶에 하나님의 통치와 연합이 시작되면, 그곳은 곧 풍성한 잔칫집이 될 것이다. 이번 한 주간, 우리를 ‘헵시바’와 ‘쁄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우리의 삶을 빚어가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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