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언어를 약의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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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6-05-24 16:34본문
칼의 언어를 약의 언어로
잠12:18
2026. 5/24. 11:00(청년 주일)
말의 영향력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 처칠이 국가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예고도 없이 처칠의 숙소를 방문했는데, 그때 처칠은 목욕 중이었다. 무안해진 루즈벨트가 방문을 닫으려고 하자 처칠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영국 수상은 미국 대통령에게 아무것도 감출 것이 없습니다.’ 이 말 한마디로 루즈벨트는 처칠을 친구 이상으로 신뢰하게 됐다고 한다.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그리고 재치 있는 말 한마디가 상대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고, 처칠은 결국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말은 양날의 검과 같다. 잘 사용하면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으나 잘 못 사용하면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다. 특히 말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자기표현의 시대에 그 영향력은 어디서나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말을 잘해서 관계폭을 넓혀 성공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말을 잘못하여 오해와 미움을 받거나 심지어 막말이 되어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 말을 많이 해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아무능과 오만의 대상으로 공격을 받기도 한다. 그러니 말은 많이 하는 것도 문제지만 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처럼 말은 이중성을 가지고 인간관계나 일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잠언에는 말에 대한 권면과 경계의 교훈이 자주 나온다. 본문도 그중에 하나다.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두 종류의 말
본문은 두 종류의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다.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 곧 ‘칼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지혜로운 혀를 가진 자’, 곧 ‘약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말에는 ‘칼의 언어’와 ‘약의 언어’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레브’(חֶרֶב)이다. 이는 단순히 철로 만든 ‘무기’를 넘어 ‘파괴’, ‘황폐함’, ‘단절’이라는 강력한 원초적 개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즉, ‘모든 생명력을 메마르게 하고, 관계를 난도질하여 주변을 폐허로 만들고, 적막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힘’을 뜻한다. 말을 이런 ‘칼’에 비유를 한 것은 우리의 말에 주변을 황폐하고 적막하게 만드는 파괴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약의 언어’도 있다. 여기서 ‘약’(藥)을 뜻하는 가장 대표적인 히브리어 단어는 ‘마르페’(מַרְפֵּא)다. 이 단어는 ‘치료하다.’, ‘고치다.’, ‘치유하다.’라는 뜻의 동사 ‘라파’(רָפָא)에서 유래했다. 여기서 말한 약은 단순한 알약이나 약초 같은 물질을 넘어 ‘치유’, ‘건강의 회복’, ‘마음의 평온함’을 모두 포괄하는 단어다. 잔인한 말은 칼이 되어 영혼을 베지만, 지혜롭고 선한 말은 상처받은 마음을 고치고, 회복시키는 최고의 ‘에센셜 메디신’(Essential Medicine, 필수 의약품/ 치료제)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말을 ‘칼의 언어’에서 ‘약의 언어’로 바꿀 수 있을까?
어떻게 바꿀까?
가장 완벽한 ‘약의 언어’를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사람들은 ‘율법의 돌’로 그녀를 죽이려 했지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용서의 말씀’으로 그녀의 무너진 삶을 회복하셨다. ‘죽이자!’, ‘죽여라!’고 외치는 칼의 언어를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라는 약의 언어로 바꾸신 것이다. 칼의 언어는 ‘나’ 중심적이다(내 감정, 내 판단, 내 속도). 그러나 약의 언어는 ‘너’ 중심적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중심적이다. 오늘 우리 입술에 묻은 독한 칼을 씻어내고, 상처 난 이웃의 가슴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하나님의 처방전’이 될 수 있을까? 즉, 어떻게 우리의 말을 ‘칼의 언어’에서 ‘약의 언어’로 바꿀 수 있을까? 물론 이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전환의 3단계
우리의 말에서 칼이 튀어 나가려는 순간, 다음 세 가지 필터(3P)를 거치는 것이다. 첫째가 ‘멈춤’(Pause)이다. 말하기 전의 잠깐(약 3초 정도) 멈춤은 대화의 품격을 바꾸는 엄청난 힘이 있다. 우리는 침묵을 어색하게 느껴 공백을 채우려고 하지만 사실 그 잠깐의 멈춤은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잠깐의 멈춤이 주는 3가지 기적이 있다. 우선 감정의 필터링(Pause for Control)이 일어난다. 욱하거나 감정적인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딱 3초만 멈추면 이성이 개입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후회할 말을 줄여주는 가장 확실한 브레이크다. 다음은 생각의 정리(Pause for Clarity)가 일어난다. 머릿속에서 엉켜있는 생각을 정리해 단어와 논리를 고를 수 있게 한다. 덕분에 이 말이 꼭 필요한가를 자문하면서 핵심만 깔끔하게 전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에 대한 존중(Pause for Respect)이다. 상대의 말이 끝나자마자 곧 내 말을 치고 나가는 것은 공격처럼 여겨져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잠시 멈추는 것은 ‘당신의 말을 잘 듣고 있다’라는 무언의 신호가 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대화에서 쉼표를 찍을 줄 아는 사람이다.
둘째는 ‘기도’(Pray)이다. 말하기 전에 잠깐 멈추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그 멈춤의 시간을 ‘기도’로 채우는 것이다. 말하기 전의 기도는 내 입술의 제어권을 스스로 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겸손한 태도다. 말은 한번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는 화살 같다는 것을 기도를 통해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그러니 기도는 영적, 심리적인 안전장치인 셈이다.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께 열납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라는 고백처럼, 말하기 전의 기도는 나의 언어를 아름답게 빚어내는 최고의 방법이다. 내 말문이 열리기 전에 기도하면, 신기하게도 상대의 마음과 형편을 헤아릴 수 있는 넉넉한 귀가 먼저 열리곤 한다.
그리고 셋째는 ‘정화’(Purify)이다. 정화는 멈춤과 기도의 결과다. 물이 탁할 때는 가만히 두어야 흙 앙금이 가라앉고 맑은 물이 되듯, 우리의 말도 멈춤과 기도를 통해 비로소 정화된다. 말을 정화한다는 것은 독소를 빼는 것(Detox)이다.마음에 있는 미움, 시기, 원망, 혹은 은근히 상대를 깔보는 마음을 말하기 전에 걸러내는 작업이다. 이런 마음을 걸러내야 깨끗한 말이 나온다. 말은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의 공간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다.정화된 말은 나 혼자 맑아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주변과 상대까지 깨끗하게 치유하고 정화되어야 좋은 말 맑고 깨끗한 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물론 주변 사람까지 말의 공간이 정화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3단계를 거쳐 칼의 언어가 약의 언어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강림과 말
교회력으로 오늘이 ‘성령강림 주일’이다. 즉, 지상 모든 교회의 생일이다. 그런데 이 성령강림 때에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곧 말의 회복, 소통의 회복이다. 원래 인류는 말이 하나였다. 바벨탑 사건과 함께 말이 혼잡해졌고,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노아 홍수 이후, 인류가 자구책으로 만든 것이 바벨탑이다(창11:). 이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이었고, 도전이었다. 이를 불쾌하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멈추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서로 소통할 수 없도록 했다. 이로 인류는 흩어지게 되었고, 서로 험악한 칼의 언어를 쏟아내면서 싸우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에서 ‘싸움의 용어’(칼의 언어)가 가장 발달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멈추게 한 사건이 성령강림이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각 사람 위에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임했고,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을 각자의 본토 방언으로 알아듣는 역사가 일어났다. 단절된 언어가 하늘의 언어로 통합되고 치유되는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은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가 회복되는 사건이다. 그래서 성령의 사람은 비방하고 상처 주는 칼의 언어를 버리고, 위로하고 세워주는 은혜로운 약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혀는 성령으로 잘 길들여 질 때만 살리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늘도 성령님의 다스림 속에서 상처를 주던 말이 위로의 말로, 미움의 언어가 사랑의 언어로, 분열의 언어가 화평의 언어로, 칼의 언어가 약의 언어로 바뀌어 주님께 기쁘게 열납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소망한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도 우리의 말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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