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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먼저(0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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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559회 작성일 06-03-0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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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먼저
막10:35~45

남편의 하는 모든 일들이 항상 마음에 들지 않는 여인(Morabel Morgan)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노력해도 남편의 성격이나 생활태도, 습관이 전혀 변하질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더욱 악화되어 갔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남편이 이제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니까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성격도 이상하게 나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심한 절망감과 좌절감 속에서 그녀는, 자신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이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버린 원수 같은 남편과 헤어져야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성경의 한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녀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절대로 바뀌지 않는 남편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먼저 나를 바꾸어보자!

그때부터 그녀는 남편을 바꾸려하지 않고 자신을 바꾸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자기가 남편에게 바라고 있던 것들을 스스로 남편에게 베풀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편을 불평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칭찬하고, 격려했습니다. 항상 밝은 태도와 긍정적인 자세로 가정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남편에게서 일어납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남편이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싫어했던 남편의 성격, 생활태도, 습관들이 좋은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생활신조를 이렇게 정했습니다. ‘당신 먼저, 나는 나중에’ 이런 자세로 항상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변에서 되는 가정, 안되는 가정, 되는 인생, 안되는 인생, 되는 교회, 안되는 교회의 차이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가 ‘자기 소멸’의 종교라면, 힌두교나 거기에서 나온 종파들은 ‘자기 확대’의 종교입니다. 반면에 우리 기독교는 ‘자기 변화’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출발점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나’에게 둡니다. 내가 변하면 남편이나 아내도 변하고, 자녀들도 변하고,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변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 두고 ‘나’에게서부터 시작합니다. 개혁도, 회개도, 사랑의 실천도 ‘나’부터 시작하여 다른 사람과 주변으로 확대시킵니다. 아무튼 다른 사람 탓, 주변 환경 탓하지 않고, ‘나’만 변하면 모두 변한다고 믿는 것이 우리 기독교의 믿음입니다. 기독교 정신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를 가리켜 ‘책임의 종교’라고 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고,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서울 영세교회를 개척한 김종수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목회생활을 정리하면서 ‘다 나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책을 한 권 썼습니다. 그 분은 가정이나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항상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 가슴을 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다 나 때문입니다. 나의 부족 때문입니다. 나의 부덕 때문입니다. 나의 죄 때문입니다. 내가 잘 못했습니다. 나를 변화시켜주십시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들을 책망하기보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고 합니다. ‘얘들아, 이 아빠를 용서하라. 모두가 아빠가 부족해서 너희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구나. 너희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데, 대화시간도 갖고, 함께 놀이공원도 가고, 여행도 했어야 하는데, 교회 핑계로 너희들을 돌보지 못했구나. 모두가 아빠가 부족해서 그렇다. 이 아빠를 용서해다오’ 그러면 아이들도 울면서 ‘아니예오. 아빠, 우리가 잘못했어요.....’ 매사를 이렇게 살았더니 가정문제도 교회문제도 해결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변화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이 먼저 변하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불평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그 사람만 변하면 교회가 평화로울 텐데, 우리 직장에서 누구만 변하면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사실 이것은 자기중심적인 고약한 이기주의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살벌해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방어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아담이나 가인의 경우를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음).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 사이에 큰 불화가 생겼습니다. 결국 이들의 문제 원인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얼마나 심각하고 엄숙한 시간입니까?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 중 누구도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누가 크냐?’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요한과 야고보가 자기 어머니를 내세워 예수님께 권력을 요청했습니다. 주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 아들 둘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다른 제자들이 몹시 화를 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가 아주 험악해졌습니다. 사람마다 뜻이 같으면 화합하지만 이익이 같고, 욕심이 같으면 서로 다투게 됩니다. 君子는 和而不同이요, 小人은 同而不和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뜻으로 살기에 서로 다른 개성, 성격, 가치관 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화합하지만 소인은 눈앞의 이익을 따라 살기에 서로 비슷하면서도 화합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죽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지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성취를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지금 제자들이 이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서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주님의 아픔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여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주님의 고독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43~44)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 오히려 낮아집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매여 있는 것 자체가 벌써 불행의 시작인 것입니다. 섬기는 것이 참으로 높아지는 비결입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마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최후의 만찬 식탁에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식후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 물을 떠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주와 선생으로서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라. 이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이와 같은 주님의 행동과 교훈을 수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승천하셔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그제야 주님의 교훈과 본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

수도사 안소니 드 멜로(Anthony De Mello)가 지은 이야깁니다. 여행객을 태운 버스가 어느 시골길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 산, 굽이굽이 흐르는 강, 푸른 평원 등. 모든 것이 한마디로 절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버스 안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 창밖에 펼쳐지는 이런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그들의 최고의 관심은 버스 안에서 누가 가장 앞자리에 앉을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누가 가장 많은 칭송을 받을 것인가, 누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인가에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들은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이 싸움을 하였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는 이 이야기를 통하여 크게 두 가지, 우리들의 삶의 ‘모순점’을 지적합니다. 하나는 창문에 커튼이 쳐져 있어서 바깥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경관을 못 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눈이 헛된 욕망에 가려져서 보아야 할 축복된 아름다운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살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아야 할 세상을 보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은 잘못된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일등이 되기 위하여, 남을 누르기 위하여, 남에게 칭송을 받기 위하여 전력투구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귀한 인생의 시간을 다 써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축복된 아름다운 세상을 보기 위해선 헛된 욕망으로 가려진 우리의 눈이 열리고, 우리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축복된 아름다운, 마땅히 보아야 할 세상을 볼 수가 있고, 마땅히 보아야 할 세상을 보아야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남을 위한 삶,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누가 가장 앞자리에 앉을 것인가, 누가 가장 많은 칭송을 받을 것인가, 누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평가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평가는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기중심에서 주님중심, 이웃중심으로 변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45절에서 주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나아가서 제자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다스리고 지배하고 군림하는 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온전히 남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한 평의 땅이나 한 칸의 집, 한 푼의 돈(재물)이나 한 권의 책, 한 벌 이상의 옷도 소유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소유, 무주택, 무보장. 이 3무(無)는 예수님의 생애를 특징짓는 단어들입니다. 대신 예수님의 삶은 몽땅 주는 삶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주고 싶은데, 가진 게 없어서...’ 없어서 못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없어서 못 준 것이 아닙니다.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정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다 주셨습니다. 당신의 목숨까지 불의한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생애에 감동한 신학자 본 훼퍼는 ‘예수님은 타자(他者)를 위한 존재’였다고 정의했습니다. 그 대신 그는 죄를 ‘자기를 위해 존재하려는 욕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주변을 한번 살펴보세요. 자기를 위해 존재하려는 욕망에서 모든 죄가 저질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관계,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자기를 위해 존재하려는 욕망 때문에 깨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좀 더 가지려는 욕심, 좀 더 높아지려는 욕심,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서려는 욕심. 이런 것들 때문에 불의와 불법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 주님을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신자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이 세상에 빛으로, 소금으로 드러나게 되고, 우리가 주님의 참 제자임을 세상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삶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제자가 ①버려야 할 것과 ②취해야 할 것, 그리고 ③좇아야 할 것이 모두 나옵니다. 제자가 버려야 할 것은 자기를 위해 존재하려는 욕망입니다. 취해야 할 것은 주님을 따르는데 요구되는 대가, 곧 십자가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묵묵히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좇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모범으로 보여주신 삶입니다. 주님처럼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삶이 무엇입니까?

톨스토이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주는 기쁨, 섬기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행복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행복의 비결은 자기를 만족시키는데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있고,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는 주님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주님 먼저, 나는 나중에!’ ‘당신 먼저, 나는 나중에!’라는 생활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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