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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17, ‘거룩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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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846회 작성일 12-06-0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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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17, ‘거룩한 열정’

민25:1~13

2012. 6/3. 08:00  11:00

열정은 천재의 재능보다 낫다.

지난 주일에 경영자들이 늘 곁에 두고 싶은 사람 두 번째가 ‘열정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어떤 기자가 GE회장 잭 웰치(J. Welch)에게 ‘인재를 파악하는 기준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열정’이라고 답했다. 그는 일에 대해 파고드는 열정이 그 사람을 성장하게 만든다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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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승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꼽는다면 그것은 바로 열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너무 사소해서 땀 흘릴 만한 가치가 없는 일도 존재하지 않고, 실현되길 바라기엔 너무 큰 꿈도 존재하지 않는다. 열정은 목소리나 크기, 혹은 화려한 외모와 상관없다. 열정은 내면 깊은 곳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열정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 중 하나가 맥도날드사의 창업자 레이 크록(R. Kroc)이다. 그는 종이컵 행상이었다. 그는 종이컵을 팔아 모은 돈으로 시카고에서 햄버거와 감자튀김 장사를 시작했는데, 햄버거를 팔 때 빵이 가장 맛있게 익는 온도와 고기를 가장 부드럽게 익히는 법을 꼼꼼히 메모했다. 이 연구를 토대로 1955년 맥도날드사를 설립해 현재 120여 개국 3만 3000여 개의 점포를 가진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그가 사업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라 ‘열정’이라고 강조했던 것처럼 맥도날드사의 경영철학은 ‘열정’과 ‘경험’이다. 예술이든, 사업이든, 공부든, 심지어 신앙생활에도 열정이 중요하다. 열정이 있어야 무엇인가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래서 에머슨(R. W. Emerson)은 ‘열심 없이 성취된 일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어느 목사님은 입버릇처럼 ‘미치자. 크게 미치자. 예수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고 말한다고 한다. 신자는 주님께 미칠 때 주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고, 거룩한 향기를 드러낼 수가 있고, 거룩한 일을 행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오늘도 주님은 열정 있는 신앙인을 찾고 계시고, 우리 안에서 열정을 찾고 계신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신다. 그래서 이 시간은 복의 통로 열일곱 번째, ‘거룩한 열정’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거룩한 열정이어야 한다.

그런데 열정에는 잘못된 열정이 있다. 흔히 이를 ‘광기’(狂氣)라고 부른다. 이 역시 일종의 열정인데, 이와 같이 비뚤어진 잘못된 열정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만나기전 사울이 그랬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잡아가두는 일에 특별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정으로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남편(혹은 아내)의 잘못된 애정행각에 대한 열정이 가정에 큰 고통을 남기고, 개인의 잘못된 취미나 이단에 대한 열정이 그 인생을 망친다. 그러므로 올바른 열정, 거룩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품어야 할 그 올바른 열정, 거룩한 열정을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을 품고 살았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요,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다. 그는 이 일로 자신은 물론 그의 가문이 대대로 대제사장이 되는 복을 받았다.

 

바알브올 사건

본문은 22장에서 24장의 말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배경설명은 생략).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청했다(2). 여기서 “청하매”라는 단어는 단순한 초청이 아니라 달콤한 유혹을 뜻하고, 이 유혹에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했다.”(1)는 말씀에서 ‘음행’은 단순히 부적절한 성관계, 즉 육체적인 범죄가 아니라 영적인 범죄를 뜻한다. 모압의 신은 ‘바알’이다. 그런데 이 바알을 섬기는 예식은 신전에 모인 사람들이 신전의 여사제와 난잡한 성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스라엘의 음행은 바알에게 드리는 제사행위였다. 즉 우상숭배였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하였다’(완전히 밀착되고 연합되었다는 뜻)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3).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엄청나게 진노하셨다. 그래서 발락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 능력을 이스라엘을 향한 징벌로 쏟아 부으신 것이다. 우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염병이 돌게 했다. 그들은 손쓸 겨를도 없이 이웃이, 친구가, 가족이 쓰려져 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죽은 사람이 2만 4천명이 되었다(9). 더욱 심각한 것은 지도자들이었다. 이 탈선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지도자들이었다. 백성들은 그런 지도자들을 보고 담대하게 범죄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도자들 중에서 이 일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을 색출해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목을 매달라고 하셨다(4). 자신들의 실패, 가족들의 죽음, 그리고 지도자의 처형. 이 모든 일들을 한꺼번에 감당해야했던 이스라엘은 정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회막 앞에 모여들었고, 거기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통곡하였다(5).

 

하나님을 위한 ‘비느하스’의 열정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정말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시므온 지파의 족장 중 한 사람인 ‘시므리’가 미디안 여자 ‘고스비’와 함께, 그렇게 회막 앞에서 울며불며 엎드려 있는 회중 앞을 지나서 자기 천막으로 들어간 것이다(6).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 하나님의 진노를 조롱하는 행위였다. 그 때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일어나서 창을 들고 두 남녀를 따라 들어가 그들을 창으로 찔렀다(7,8). 그 역시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위하여 기도하고, 위하여 축복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제사장이 창을 들고 가서 그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축복해야 할 백성을 죽였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나 죽였다. 제사장이 살인을 하다니!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백성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고, 그에게 큰 복이 주어졌다. 그 복이 바로 ‘평화의 언약’이다. 이 언약의 내용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시겠다(12,13)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이해와는 차이가 있지만)여기에는 살인까지도 정당화될 수 있는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무너뜨리고, 짓밟고, 더럽히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다. 싯딤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무너뜨리고 더럽히는 행위였다. 그래서 택하신 자기 백성 2만 4천명을 전염병으로 죽게 한 것이다(9). 하나님께서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종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된 것도 그가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기 때문이다. 항상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눈이 향해 있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이방인에게 짓밟혀 폐허가 되게 하심도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시므리의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습게 여기는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벼랑 끝에 매달려있는 이스라엘을 밀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스라엘은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적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다. 그런데 그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이스라엘을 다시 살게 한 사람이 ‘비느하스’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그 열정을 가지고 일어섰다. 그의 행동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렸다(11).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벼랑 끝에 매달려있는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다. 아무튼 비느하스의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열정이 자기 민족을 위기에서 구하고, 그와 그의 가문이 대대로 복을 받게 된 것이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열정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도전하거나 훼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웃사와 아효사건, 삼하6:7 참조). 반면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비느하스의 행동에 이런 복을 주신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을 회복하는데 거룩한 열정을 쏟자!

 

살아 있는 신앙

광양 제철소에 철강석을 녹이는 고로(高爐)가 있다. 이것이 제철소의 심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고로는 한번 불을 붙이면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불을 끄지 않는다. 고로의 수명이 약 15년인데, 그 15년간 매일 24시간 계속 불을 붙인다. 한번 불을 끄면 고로 안의 녹던 철강석이 굳어서 폭탄으로도 잘 처리가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24시간 3교대로 15년간 계속 쉬지 않고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 불이 꺼지면 고로도 못쓸 뿐 아니라 제철소도 완전히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두, 예외 없이 마음의 고로에 불이 붙어있는 사람들이다. 열정이 있는 신앙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열정이 식으면 그 신앙 역시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주님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미지근한 것을 싫어하신다. 입에서 토해 버리겠다고 하셨다(계3:16). 그러면서 주님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다’(계3:15)고, ‘열심을 내라’(:19)고 하셨다. 우리 모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섬기자!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거룩한 열정을 갖자! 말씀과 기도에 더욱 열정을 가지고, 찬양과 섬김에 열정을 품고, 거룩한 예배를 위하여 열정을 품자! 이런 거룩한 열정이 우리로 살아 있는 신앙인, 주님의 복을 누리고, 그 복을 퍼뜨리는 통로가 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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