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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삶Ⅲ, ‘죄 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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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199회 작성일 17-11-26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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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삶, ‘죄 사함

32:1~6

2017. 11/26. 11:00

빌리의 이야기

아름다운 호수가 오두막에서 빌리라는 소년과 누나 루시, 그리고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빌리가 실수로 할머니가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애완용 오리를 그만 죽이고 말았다. 잔뜩 겁이 난 빌리는 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죽은 오리를 호숫가에 묻었다. 자신이 말하지 않는 한 누구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누나 루시가 그의 행동을 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루시는 이 일로 빌리를 부려먹었다. 저녁식사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빌리를 보며 루시가 말했다. ‘할머니, 오늘 설거지는 빌리가 하겠대요.할머니는 거실로 나가며 빌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빌리는 무척 화가 났지만 비밀이 탈로 날까봐 얌전히 굴어야했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는 그들을 불러 각자 할 일을 알려주었다. ‘루시야, 너는 마당과 옥수수 밭에 잡초를 뽑아라. 그리고 빌리는 지난 장마 때 무너진 흙담을 쌓아라. 그 다음에 놀아도 늦지 않을 거야!할머니가 현관문을 나설 때 루시가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말했다. ‘할머니, 빌리는 잡초 뽑는 일도 하고 싶대요.할머니는 빌리를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나가 버렸다. 빌리는 종일 잡초를 뽑고 담을 쌓았다. 루시의 횡포는 점점 심했고, 빌리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당하느니 차라리 할머니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용서를 빌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빌리는 할머니에게 가서 자신이 할머니가 아끼고 사랑하는 오리를 죽여 호숫가에다 묻었다고 울면서 고백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빌리야,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난 네가 잘못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네가 말했으니 용서하마. 울지 마라.그러면서 할머니는 그동안 고생했다며 맛난 것 사먹으라고 용돈까지 주셨다. 빌리는 할머니의 품에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이 사실을 모르고 집으로 돌아온 루시는 여느 때처럼 빌리에게 이것저것 마구 시켰다. 그러나 빌리는 아무런 대꾸도 않고 씩 웃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루시가 방까지 따라 들어와 할머니에게 알리겠다고 위협했으나 빌리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미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고, 그 증거로 용돈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어려서 들었던 얘기라 기억을 더듬어 나름대로 꾸며보았다. 어쨌든 이 이야기가 전달하고자하는 것은 분명하다. 잘못을 털어놓지 않으면 이용을 당하며 고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죄를 예수님께 고백하여 용서받지 않으면 빌리가 누나 루시에게 당했던 것처럼 사단에게 그렇게 당하게 된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단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다. 반면 죄를 고백하여 사()함을 받으면 사단의 지배력도 영향력도 힘을 잃게 된다. 더 이상 사단의 위협이 두렵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확신의 삶 세 번째로 사단의 지배와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인 사죄의 확신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두 종류의 죄책감

앞의 이야기처럼 죄책감은 죄에서 비롯된 감정인데, 사단이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다. 이것은 계속 따라다니면서 우리를 괴롭히고 건강한 관계를 갖지 못하도록 영적 눌림을 준다. 나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또한 이웃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의 심리에 다양한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하지만 최근 심리학에서는 죄책감이 다양한 인간의 심리장애를 일으키는 부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행동을 유발하는 기능을 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성경적인 사고와 매우 연관이 깊다. 성경 역시 죄책감의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말씀하고 있다. 죄책감이 불행의 단초가 되는 것도 분명하지만 구원에 대한 열망, 은혜에 대한 갈망을 갖게 한다. 죄책감의 긍정적인 측면은 현재 자신의 상황이 위기라는 것과 그 위기를 스스로 돌파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위기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게 만드는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라고 한 말씀이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바울에 의해 기록된 서신들, 그 중에서도 로마서갈라디아서가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폴 투니어(P. Tournier)라는 기독교 심리학자는 부정적인 측면의 죄책감을 가짜 죄책감이라 하고, 긍정적인 측면의 죄책감을 진짜 죄책감이라고 했다. ‘불합리한 죄책감합당한 죄책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합당한 죄책감은 주님을 바라보게 하고, 주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만들지만 불합리한 죄책감은 신앙생활에서 사단의 올무로 작용한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가 좋은 예다. 문제는 이 불합리한 죄책감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죄(赦罪)의 확신이 필요하다.

 

불합리한 죄책감의 횡포

어떤 여인이 결혼을 했다. 그만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몇 년 후, 좋은 사람을 만나 재혼을 했는데, 그 역시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이 여인에게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며 악담을 퍼부었다. 상심이 너무 커서 이런 말도 안되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이 여인의 마음에 비수처럼 꼬치고 말았다. 첫 번째 남편도 교통사고로 죽고, 둘째 남편까지 죽고 보니 자신이 정말 남편을 잡아먹은 저주받은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 때부터 자기 때문에 두 명의 남편이 죽었다는 심각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스스로를 저주하면서 방안에만 틀어박혀 살았다.

 

여러분, 이 여인의 죄책감이 합당한가? 사단은 우리에게 이런 불합리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만든다. 그래야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에 의외로 이런 불합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많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자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것이 사단의 노림수다. 이단이나 사이비, 건강하지 못한 신앙인도 이렇게 불합리한 죄책감을 갖도록 해서 사람을 조정한다.

 

어떻게 불합리한 죄책감을 극복할까?

그러면 어떻게 이런 불합리한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물론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불합리한 죄책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흔들리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흔들릴 수는 있어도 무너져서는 안된다. 죄책감으로 무너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11:28)고 하신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그 주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확신(사죄의 확신)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물을 마시듯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이고, 죄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나는 주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정체성이다. 진짜 의로워서 의인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고 간주해주신 것이다. 바로 이 확신이 있어야 불합리한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다.

 

본문은 사죄의 확신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죄 사함의 복을 선언한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1). 이것이 복의 기반이고, 행복이 솟아나는 근본적인 특권이라는 뜻이다. 복의 기초, 행복한 삶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윗의 경험에서 비롯된 고백이다. 반면 죄, 혹은 죄로 비롯된 죄책감을 여름 가뭄”(4)에 비유하고 있다. 이스라엘 지역의 여름은 아주 메마른 시기(乾期). 단지 비가 적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 게다가 가로수가 한쪽으로 누울 만큼 사막의 뜨겁고(40이상) 강한(시속 100) 바람이 계속 분다. 성경은 이 바람을 동풍’(4:8)이라 하고, 이런 날이 50여일이 된다고 하여 아랍인은 캄신’(혹은 함신)이라 한다. 그러면 땅이 쩍쩍 벌어지고 모든 식물이 바짝 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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