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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주소서! ‘귀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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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660회 작성일 21-08-2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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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주소서! ‘

1:1~3

2021. 8/29. 11:00

편견의 무서움  
비평가 버나드 쇼(B. Shaw)는 영국사회를 관찰하면서 한 가지 심각한 병폐를 발견했다. 그것인 편견이다. 일례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은 로뎅의 작품을 싫어한 것이다. 그는 편견의 무서움을 알리기 위해 파티를 열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만 초청했다. 파티가 무르익어갈 무렵 그가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아주 귀한 그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서 그림 하나를 가지고와서 보여주었다. ‘여러분, 멋있지요? 로뎅의 작품입니다.’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지더니 웅성거리다가 혹독한 비판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급기야는 그것도 그림이냐!’는 비난까지 나왔다. 이런 비판과 비난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가 나와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그림을 잘못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그림은 로뎅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것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장내가 숙연해졌다.

 

이것이 편견이고, 편견의 무서움이다. 확인도 없이 로뎅의 작품이라는 말만으로 분통을 터뜨린 것이 편견이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미리 정해진 판단이다. 미리 세워놓은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편견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편견은 사실을 사실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하고, 갈등과 오해를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데 편견 자체도 무섭지만 편견에 감정이 섞이면 더욱 위험해진다. 이것을 감정적인편견이라고 하는데, 감정적 편견을 가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그냥 싫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싫어한다. 심지어는 그 사람과 관련된 것까지 싫어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런 감정적 편견을 잘 대변해주는 말이 흔히 사용되고 있는 내로남불이다.

 

들음을 거부하게 만든 편견

본문은 선지자 요나의 이야기다. 그는 이방인에 대한 감정적, 종교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요나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다. 요나가 선지자 활동을 할 때 여로보암세가 통치했는데, 그는 팽창주의 군사정책을 펼쳐 영토를 확장하고, 경제적으로도 나라를 크게 발전시켰다. 요나는 여로보암세의 이와 같은 부국강병 정책을 옹호하고 지지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잘못은 지적하지도 않았다(아모스나 호세아와 달리). 이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당시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주적(主敵)이자,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앗수르 제국의 수도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날마다 그 나라가 망하기를 바라고 있는 그에게 그곳에 가서 회개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2). 그러니 이런 하나님의 명령이 그에게는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명령거부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3).

 

성경을 보면 사역의 막중함과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사양한 사람은 있다(모세, 기드온, 예레미야). 그렇지만 대놓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한 사람은 요나가 유일하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도록 부름을 받은 선지자면서 그랬다. 요나는 동쪽의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일부러 거역하고, 반대 방향 다시스로 갔다. 그곳은 알려진 세상의 서쪽 끝이었다. 하나님의 명령과 정반대로 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소개했던 대로 요나는 좋게 말하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였고 애국자였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면 자기 민족밖에 모르는 배타적인 민족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니느웨의 영적 유익보다 이스라엘의 국익이 우선이었다. 또한 종교적으로 선민의식이 철저하여 무조건 하나님의 선민인 자기 민족이 옳다고 여겼다. , 악한 이교도인 니느웨을 향해 영적 우월감을 가졌고, 그들이 구원받는 것이 절대로 싫었던 것이다(4:1). 적어도 자기 나라에 위협이 되고 있는 앗수르는 반드시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나의 생각과 태도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편견이다. 폐쇄적인 민족주의와 도덕적 종교적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편견이 요나의 문제였다. 이와 같은 그의 편견이 앗수르에 대한 증오를 넘어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듣지 않고 거역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불만을 터뜨리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자신을 향한 주님의 뜻을 구하고 찾아서,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자신의 뜻을 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성숙이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안에서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편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그래야 영혼의 문이 열리고 온전한 들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서는 요나의 편견을 무너뜨리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튼 편견은 자신이 세워둔 기준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것을 그 기준에 따라 판단을 하고 평가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라는 것이 일방적인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그러니 듣는 것을 비롯하여 모든 것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잘못 듣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듣는 것을 왜곡시키거나 듣지 못하도록 귀를 닫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듣고 싶은 것,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적으로 듣게 만든다. 이것이 자신과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원인이다(4~15). 그러므로 편견을 넘어서야 듣기에 성공할 수 있다. , 온전한 들음, 온전한 순종에 이를 수 있다.

 
편견의 치료자, 예수님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한 마디로 편견의 희생자셨다. 자신을 주어 온전히 희생하셨음에도 온갖 비난과 루머에 시달리셨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 주정뱅이, 먹기를 탐하는 자, 죄인의 친구, 신성모독자 등.. 모두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이런 편견이 주님을 배척한 것이고, 십자가로 내몰았다.

 

그래서였을까? 주님의 사역은 편견을 무너뜨리고 바로 잡는 사역이었다. 편견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을 치료하는 사역이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이 부정하다는 민족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만나는 것을 꺼렸고,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는 것조차 꺼렸다. 그런데 주님은 일부러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셨고, 또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사마리아인 나병환자를 고쳐주시고, 선한 사마리아인을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당대 지역적 편견의 대표적인 희생자였던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셨고, 직업적 편견의 희생자인 세리를 비롯한 어부를 주로 제자로 삼으셨다. 또한 사회적 종교적 편견의 희생자인 세리와 창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죄인들과 스스럼없이 지내셨다. 많은 여성과 대화하셨고, 어린 아이를 환영하여 품에 안고 축복하셨다. 주님은 그들의 덧난 상처를 싸매주는 친구가 되어 주셨다. 시대가 합의한 편견을 거부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기득권자였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부자를 배제하신 것도 아니다. 아무튼 주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화목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화목을 깨는 이 편견의 치료자가 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직접 찾아가고,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셨다.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싸매주고, 고쳐주셨다.

 

편견을 넘어서

9장을 보면, 편견을 넘어서는 중요한 비결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사건이 나온다.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물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2). 이는 질병과 장애에 대한 제자들의 편견을 잘 보여주는 내용이다. 사실 질병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사고는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일찍이 이 문제로 논쟁을 벌이며 고민했던 사람이 욥기의 주인공 이다. 지금도 병이나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많다. 이런 편견이 당사자와 그 가족까지 힘들게 하고 있다. 이런 편견에 주님께서 놀라운 답을 주셨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3). 주님은 장애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기존의 인과응보적관점이 아닌 섭리적관점으로 해석하셨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시대가 합의한 편견, 어떤 사회가 합의한 편견에 갇혀있지 말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귀로 사람도, 환경도, 사건도 보고, 듣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개인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든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진 것이든 편견의 감옥을 벗어날 수 있다.

 

우리 삶의 중심은 변덕스러운 내가 아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 내 생각과 판단이 중심이 될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더 많은 편견을 만들어 낼 뿐이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생명까지 내놓으신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변함이 없는 주님의 말씀을 내 생각과 판단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편견은 쉽게 들어오지만 좀체 나가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편견과 싸우는 것은 그림자와 싸우는 것과 같다. 어떤 용사도 그림자와 싸워 이기는 방법이 있다. 그늘로 들어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날개 그늘아래 머무는 것이 편견을 극복하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내 사람의 중심에 모시는 것, 주님의 말씀을 내 생각과 판단의 중심에 놓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 관점이 아니라 주님의 관점으로 보고, 듣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그림자와 같은 편견을 극복하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주님 중심, 주님의 말씀중심의 삶으로 편견을 극복한 삶, 그래서 편견이 없는 삶이 되자. 이것이 항상 들음에 성공한 성도다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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