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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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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0,959회 작성일 22-01-3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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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만 사랑하기

22:34~40

2022. 1/30. 11:00

폐하이옵니다!

옛날 헬라의 도시국가에 한 왕이 있었다. 많은 처첩이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왕을 사랑했다. 그래서 왕은 그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날 사랑하니 나 또한 그대들에게 보답하고 싶소. 그러니 소원을 말하시오. 나라의 주권만 남겨놓고 무엇이든 그대들이 원하는 것을 선물로 주겠소.’ 그러자 처첩들이 보석, 재물과 같은 것을 달라고 경쟁적으로 요구했고, 왕은 원하는 것을 모두 받아 적었다. 그런데 평소 처첩들 중에 덕이 있기로 이름난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은 아무 것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왕이 그 여인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 것이오? 가지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이오?’ 그 여인이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폐하이옵니다.’ 왕 자신을 갖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왕이 크게 기뻐했다.

 

 

요청()이 관계의 질을 결정짓는다.

상상을 해보라! 왕이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흐뭇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지혜로운 요청인가? 사실 왕을 가지면 재물도, 영예도, 말 그대로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다 보장된 것이 아닌가? 질문을 보면 수준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차이는 지속적으로 묻는 질문의 차이에 있다.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성공한 사람은 더 나은 질문을 하고, 그 결과로 더 나은 답을 얻는다. 마찬가지로 요청하는 것을 보면 관계의 질을 알 수가 있다. 관계에 따라 요청의 내용도 달라진다. 하경이가 집에 올 때면 몇 시에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는데 데리러 올 사람?’ 하고 카톡으로 문자를 보낸다. 가족이니까 이런 요청문자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아무에게나 이런 문자를 보낼 수가 없다. 왕 자신을 원한다는 여인의 요청은 자신을 왕에게 이미 다 주었기에, 그리고 그만큼 왕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이런 요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런 요청을 받고 왕이 기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누군가에게 어떤 요청을 받는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그만큼 그가 나를 신뢰한다는 의미, 그만한 능력이 되고, 또한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많은 요청이 나온다. 명령이나 권면, 특히 십계명을 비롯한 각종 계명이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성경에 나온 많은 요청을 접할 때, 그 요청에 올바르게 반응을 하지는 못하지만 감사하게 된다. 주님께서 이런 요청을 하실 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의미, 그만큼 나에게 기대하신다는 의미로 여기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고,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요청할 만큼 깊은 사이로 여기신다는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를 따르라! 힘써 섬겨라! 충성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등등. 그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고, 신뢰와 기대가 있기에 이런 요청을 우리에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밀을 아는 사람에겐 주님의 요청은 짐이 아니라 은혜이고, 기쁨이고, 감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요청이 클수록 은혜도 기쁨도 감사도 커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먼저 이런 삶을 사셨기에 이런 요청을 하신 것이다. 주님은 이미 몽땅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다(5:8). 그래서 우리에게 요청을 하시게 된 것이다. ‘내 자신을 몽땅 너에게 주었으니 너도 네 자신을 나에게 몽땅 다오.’ 이것이 본문에 나오는 최고 계명의 정신이다.

 

 

몽땅 다오!

본문은 한 율법사와의 대화에서 주신 말씀이다. 한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묻자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7~40). 한 마디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성경(구약)이 강조하는 핵심계명이라는 것이다. , 성경의 핵심, 신앙생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라고 힘(마가복음)을 다하라.는 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이것은 전존재와 삶 전체, 모든 뜻과 계획, 목표, 모든 열정을 뜻한다. 그리고 다하라는 명령형이 4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을 잘 보여준다. , 모든 것을 건다는 의미다. 전인격을 기울이고, 자신의 전존재를 쏟는다는 의미다. 부분적인 것, 혹은 한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틀어라는 의미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몽땅 주었으니까 너희도 내게 몽땅 달라는 의미다.

 

 

사실 말씀 자체는 부담스러운 내용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말한 접근법으로 이 계명을 바라보면 이토록 감사하고, 기쁘고, 흐뭇한 말씀도 없다. 생각을 해보라!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토록 사랑하고, 신뢰하고, 기대하셔서 이런 엄청난 요구를 하신단 말인가? 그뿐만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몽땅 요구할 만큼 친밀하게 여기신다는 뜻이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라고 이런 요구를 하시는지 그저 감격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의 요청에 감사하면서 기꺼이 순종했다. 그 예()가 우리 지역에서 목회를 하다가 순교한 손양원 목사님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여순사건 때 공산주의에 빠진 친구에 의해 두 아들이 순교를 당했다. 아들들의 장례식장에서 목사님이 9가지 감사고백을 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할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남과 차남을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감사합니다.

 

솔직히 두 아들의 장례식장에서 이런 감사가 재정신이라고 생각하는가? 보통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감사의 고백을 드린 것은 별 볼일 없는 죄인인 자신의 가문에 순교의 은혜, 순교의 영광을 주셨다는 것이다. 자격 없는 자신의 자식들을 순교의 제물로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망극한 순간에도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에도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채찍질을 당하고 복음증거 금지령까지 받았다. 이때 사도들이 보인 반응이 무척 인상적이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5:41).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 받은 핍박을 기쁘게 여겼다. 주님을 위한 고난, 주님의 복음을 위한 핍박을 주님과 관계의 친밀함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좋은 믿음 Vs 약한 믿음

흔히 우리는 믿음이 좋다.’, 혹은 믿음이 약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또한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 기준은 주로 외적인 경건활동에 두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이것은 주님과의 친밀도에 있다. , ‘믿음이 좋다.’ 말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하다는 뜻이고,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주님과의 관계가 서먹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주님과 관계의 친밀함을 대변하는 척도일까? 그것은 계명이다. 특히 사랑의 계명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주님과의 친밀함을 뜻한다. 그러면 사랑의 계명이 무엇인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이렇게 요청한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37). 사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과 친밀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삶의 위기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랑에 있다. 다른 것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여로 인해 힘든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힘들어진다. 사는 것도 힘들고, 기도하는 것도 힘들고, 말씀을 듣고 보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것도 힘들다. 섬기는 것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신앙생활 자체가 힘들다. 그러나 사랑의 힘이 작동되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 사랑은 엄청난 힘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사랑을 계명의 최고, 성경의 핵심,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을 빼면 신앙을 이야기할 수 없다. 주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사실 사랑하면 이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사랑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사랑은 대상에게 집중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잘 보여준 것이 사랑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하브(אהב). 이는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강한 집착이나 몰두, 집중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 대상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붙는 것이 사랑이다.그래서 사랑의 계명이 주님과 친밀함을 대변하는 척도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향하여 드리는 시간이나 열정, 물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밤낮없이 생각하며 시도 때도 없이 만나고 연락을 한다. 서로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낱낱이 보고하면서 떨어져 있으나 함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서로를 느끼고 공감한다.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사이는 친밀감이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님과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함께, 더욱 알차게라는 표어로 새해를 시작한지 벌써 한 달이 되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과 친밀감을 더욱 쌓아가는, 그래서 영적 성숙을 이루자! saturated! 주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그 사랑이 흘러넘치는 한해, 그 넘치는 사랑에 사랑으로감격스럽게 반응하는 나날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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