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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가치를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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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4,576회 작성일 23-08-1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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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가치를 보는 눈

11:33~36

2023. 8/13. 11:00(성령강림 후 열한 번째 주일

우리의 안경

인간의 인지활동은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또한 마감을 한다. 사람도, 사물도, 사안도, 사건도 보는 것을 통해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때 그냥 보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름의 어떤안경을 끼고 보고 있다. 이를 세계관이라고 한다. 스티브 윌킨스의은밀한 세계관이란 책을 보면, 우리 시대 사람들이 끼고 있는 안경이 소개되고 있다. 개인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는 개인주의안경, 모든 것을 상품으로 보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보는 소비주의안경, 인간도 물질로 환원시켜 보는 과학적 자연주의안경, 국가유지를 위한 국민의 충성심 확보를 위해 국가를 신격화시키는 국가주의안경, 인간의 모든 어려움을 심리적 문제로 보게 만드는 종교화된 심리주의안경 등이다. 이런 안경을 통해서 보지만 우리는 이런 안경을 끼고 보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안경을 통해서 보고, 그렇게 보인 세계를 참된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안경은 의식의 레이더망을 피해 은밀하게 스텔스기처럼 우리 마음에 침투한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을 그렇게 보게 만든 마음의 안경이 무엇인지,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본문은 이런 점을 우리에게 도전하는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참 가치를 보는 눈을 가지라는 것이다.

 

본문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유명한 두 사건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를 책망하셨다. 솔로몬 시대에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찾아왔으나 당시 사람들은 솔로몬보다 더 크신 주님께서 그들 곁에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이방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의 성의 없는 선포에 온 도성이 회개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요나 선지자보다 더 크신 주님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했다. 그래서 심판의 때에 스바 여왕과 니느웨 사람이 일어나 그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이방인은 그림자를 보고도 열광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참 빛을 보고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외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현재에 교훈을 받고자함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역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왜 그들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영적 무지와 안악함이라는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안경 때문에 참 가치를 보는 눈이 가려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등잔 밑을 못 보는, 솔로몬보다 크시고 요나보다 크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그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등불의 역할은 빛을 비추어 사물의 존재를 드러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몸의 등불이란 몸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몸이 올바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처럼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가리켜 몸의 등불이라고 한 것이다. 눈을 통하여 몸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몸이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밝은 눈, 성한 눈이 중요하다.

 

공간, 어느 자리에 있느냐?

우리는 우리 마음이 남이 들어오지 못하는 나의 사적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어떤 말을 듣거나 무엇을 보면 그것이 마음에 슬며시 들어와서 우리 마음에 텐트를 치고 아예 말뚝을 박는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보는 마음의 안경 일부가 되고, 그 안경으로 보고 판단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야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4:23). 그러면 어떻게 마음을 지킬까? 눈을 잘 관리해야 한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33). 이는 등불을 두는 장소’(공간)에 대한 말씀이다. 등불의 역할은 그것을 둔 장소에 따라 결정이 된다. 같은 밝기의 등불이지만 말 아래에 둔 것과 등경 위에 둔 것은 차이가 분명하다. 그러니 등불이 어느 자리에 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장애물이 없고 사방이 확 트인 곳에 있는 등불은 사방을 두루 환하게 비출 수가 있다. 그래서 등불의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게 된다.

 

눈도 마찬가지다. ‘말 아래에 둔 등불처럼 무언가에 가려진 눈은 사람도 사물도 사건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모든 것을 잘못 보게 만들고, 왜곡해서 보게 만드는 나쁜 눈’(34)이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와 해석을 하게 만들고, 왜곡된 삶의 태도를 갖게 만든다. 그러면 눈을 가려서 제대로 보게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전문용어로 프레임이라고 한다. 선입견, 혹은 편견, 흔히 말하는 안경이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이나 사물, 사건을 보면 그렇게 보인다. 정치권에서 왜 같은 사건이나 사안을 두고 여/야 간에 달리 해석을 하면서 티격태격 싸울까?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프레임을 가지고 사안이나 사건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란 눈을 바꾸는 것이다. 정과 욕심에 사로잡힌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바라보는 눈을 바꾸는 것이다. 대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주님중심 말씀중심으로 바라보는 눈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는 것이다. 모든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견이 사라지니 밝히 보게 되고, 똑 같은 사건이나 사안을 전혀 다르게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해석하게 되고,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된다. 기억할 것이 있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문제를 없애주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것은 주님도 마찬가지다. 그랬다면 성도나 교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제의 무풍지대를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성도도 많은 문제를 만나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기도하고 있다. 대신 성경과 주님은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시각)을 바꿔주시겠다고 말씀한다. 문제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면 문제에 대한 이해나 해석도, 태도도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고백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방향, 어디를 향해 있느냐?

올빼미는 주로 밤에 활동하며 작은 동물이나 벌레를 사냥하는 밤의 제왕이라 불린다. 사람도 밤에 주로 활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올빼미 족이라고 한다. 잘 아는 대로 올빼미는 밝은 낮에는 태산(太山)도 보지 못하나 밤에는 아주 작은 물체까지도 뚜렷하게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흔히 밝은 면 긍정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어두운 면 부정적인 것만 잘 보는 사람을 올빼미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께서 하신 일마다 시비를 걸고 평가절하했던 많은 사람이 이 올빼미 시각을 가졌던 것이다. 때문에 주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악의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눈이 고장이 나서 주님이 행하신 선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눈이 성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34). 이는 눈의 중요성과 더불어 눈의 영향력을 강조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성한 눈이란 건강한 눈을 뜻한다. , 밝게 보고, 멀리 보고, 바로 보고, 집중적으로 보는 눈이다. 눈은 하루에 약 25천 번 깜빡인다. 깜빡이면서 눈물샘에서 나온 액으로 안구를 계속해서 씻어낸다. 작은 먼지 하나도 눈에 남지 않도록 깨끗하게 씻어준다. 이렇게 눈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밝게 사물도 보고, 사람도 보고, 글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눈의 경우, 안구를 깨끗이 씻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눈의 초점이다. 초점이 하나’(single focus)여야 한다. 그래야 사물을 밝히 보고, 제대로 볼 수가 있다. 주님은 이것을 성한 눈이라고 하셨다. 결국, 이것은 눈의 방향성 문제다. 어디를 보고, 무엇을 보느냐의 문제다. , 어디에, 무엇에 초점을 두고 있느냐의 문제다. 앞에서 신앙생활은 눈 바꾸는 것이라고 했는데, 모든 시선을 완전히 주께 돌려서 주님께 나의 시선을 맞추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주님의 나라에 나의 시선을 맞추는 것이다. 어느 찬양가사처럼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나라와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이렇게 주님과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사는 것이 성한 눈이다. 이런 사람은 올빼미처럼 어두운 면을 보지 않고 밝고 건강한 면을 보게 되고, 파리처럼 썩고 냄새나는 시궁창과 같은 무너질 이 땅의 것을 보지 않고 썩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게 된다.

 

바라봄의 법칙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실험결과가 있다. 스웨덴 웁살라 대학이 실시한 것인데, 실험 참가자에게 0.03초 동안 행복한 표정이 담긴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사진의 표정과 같은 표정을 짓고,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 , 행복한 사람이 느끼고 있는 표정을 0.03초 동안 보여주었는데, 그 사진을 본 사람도 똑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것은 행복한 사람 곁에 있으면서 행복한 사람을 보기만 해도 행복한 사람을 닮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와 함께 있고,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을 가리켜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났다면 반드시 성장해야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눈이다. 바른 시각(관점)으로 보는눈의 훈련을 해야 한다. 특히 어떻게 보느냐, 무엇을 보고 어디를 보느냐, 나의 관점이 건강한가, 성경적인가를 항상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늘 무엇을 생각하며 사는데, 그 생각을 생각해야 한다. 생각이 건강하지 못하면 삶이 건강하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무엇을 보고 사는데, 그 보는 것을 잘 살펴야 한다. 잘 보고 있는지, 제대로 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그래서 참 가치를 보는 눈을 회복할 수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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