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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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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860회 작성일 09-05-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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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 바이러스
눅10:30~37.

2009. 5/3 11:00

친절한 사람이 잘 된다.
사랑받는 사람은 이유가 있다. 잘되는 사람도 이유가 있다. ‘친절’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친절한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친절한 사람과 사귀고 싶어 한다. 같은 물건이면 친절한 사람에게서 사고 싶고, 묻고 싶은 것 부탁하고 싶은 것도 친절한 사람에게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친절한 사람을 기억한다. 사소하지만 친절한 미소, 친절한 눈길, 친절한 말, 친절한 행동을 오래 기억한다. 요즈음 기업이나 공공기관을 보면 친절을 트레이드마크로 하고 있다. 친절은 고객만족, 나아가서 성공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옳고 그름보다는 친절을 택하는 편이 좋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보다는 사려 깊은 친절이 훨씬 위력이 클 때가 많기 때문이다. 똑똑하기보다는 친절한 편이 더 낫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어진마음으로 대한다. 그래서 탈무드는 ‘친절을 최고의 지혜’라고 말한다.


친절 베풀기.

성령의 다섯 번째 열매는 자비(慈悲)이다. 그런데 이 자비란 말은 불교를 대표하는 용어다. 그래서인지 몇 몇 번역 성경에서는 친절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이 두 용어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자비에서 자는 ‘귀여워하다’는 뜻으로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고, 비는 ‘동정’, ‘정감’ 등을 의미한 것으로 상대의 슬픔을 없애 주는 것이다. 상대의 아픔이나 슬픔을 제거하여 기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친절’이다. 친절은 사랑의 실제적인 표현으로 ‘행동하는 사랑’이다. 오늘 본문은 친절의 중요성과 더불어 친절의 내용,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다. 친절에 대해 톨스토이는 ‘친절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며 모든 비난을 해결한다. 그러므로 얽힌 것을 풀어내고 어려운 일을 수월하게 만들며 암담한 것들을 즐거움으로 바꾼다.’고 했고, 괴테는 ‘친절은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했는데, 우린 본문에서 친절의 이런 힘을 확인할 수가 있다(내용설명 생략). 친절은 위기에 처한 한 생명을 구하는 일이요, 그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 친절이다. 어떻게 이 소중한 친절을 실천할 수 있을까?


1. 친절은 다른 사람에 대한 민감함에서 시작한다.

친절은 언제나 주변에 대한 민감함으로부터 시작된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2:4)고 하였다. 여기서 ‘돌아보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필요와 상처에 관심을 갖고 민감하게 반응하라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게만 민감하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에는 분투하면서도 손해가 되거나 싫은 일은 철저히 외면한다. 하지만 친절한 사람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도 민감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눈과 귀를 열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형편을 보고, 그들을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친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본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인 간의 차이가 여기 있다. 이들 사이의 차이를 나타내는 동사가 나온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피하여 지나가다”(31,32)라는 동사를 사용했고, 사마리아인에게는 “가까이 가다, 붓다, 싸매다, 데리고 가다, 돌보아 주다”(34)라는 동사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다같이 강도 만난 사람의 형편을 보았다(31,32,33). 그런데 그 반응은 전혀 달랐다. 사마리아인이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 이유를 성경은 “불쌍히 여겨”(33)라는 동사로 설명하고 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없는 마음이 사마리아인에게 있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웃에 대한 민감성에서 생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이웃의 필요에 민감하지 못하면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들은 것이 아니다. 마음이 있어도 느끼질 못한다.

본문에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고,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우리들이다. 주님의 친절이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낸 것이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37)는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 역시 다른 사람에게 민감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보인다. 그들의 아픔이 보이고, 고통이 보이고, 필요가 보인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보이고, 도울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래서 친절을 베푸는 좋은 이웃이 될 수가 있다.


2. 참된 친절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베푸는 것이다.

나와 친한 사람, 좋아 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고, 그런 사람에게 더 베풀고, 그런 사람과 가까이 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성경은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그 경계를 뛰어넘어 원수에게까지 확장시킬 것(눅6:27,28)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런 친절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32~34), 신자는 그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하며(35), 이것이 하나님의 친절이기 때문이다(36).

친함이 친절의 동기라면 본문에 나온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래서 서로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가 불행해 지기를 바라는 관계였다. 그런 그가 강도를 만난 유대인을 도와야 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는 동족이면서 영적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도 돕지 않은 그를 무엇 때문에 도와야 하는가?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감정 따위는 내려놓고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었다(34,35). 조건을 따지지 않고 친절을 베푸는 것. 우리가 배워야 할 또 하나의 친절을 실천하는 자세이다.

눅6:36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하셨다. 이는 친절의 대헌장과 같은 말씀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자비하심이란 ①사람을 가리지 않는 친절, ②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을 의미한다. 사랑의 특징이 사람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기회있는 대로 필요한 사람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것이 참 사랑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친절은 모르는 사람, 좋아하지 않는 사람, 갚을 것이 없는 사람, 심지어는 원수에게 베푸는 것이다. 이는 주님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기억하신 바가 되는 것이다(눅6:38). 그래서 성경은 주님 때문에, 주님의 이름으로 조건을 따지지 말고 친절을 베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맛있기로 소문난 제과점이 있었다. 어느 날 남루한 차림을 한 걸인이 찾아와 빵을 주문했다. 가게 종업원은 빵을 포장하고도 건네주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가게 주인이 달려와 정중한 자세로 빵을 직접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는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 한 장을 꺼내 빵 값을 치렀다. 주인은 공손히 돈을 받으며 ‘찾아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며 허리까지 굽혀 인사를 했다. 그가 돌아간 뒤 의아해하는 종업원에게 주인이 말했다. ‘평소 우리 가게에 오는 손님은 모두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이지. 그들이 우리 가게를 찾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세. 그러나 아까 그 손님이 우리 빵을 맛보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며 돈을 모았을 지를 생각해보게. 그러면 그가 얼마나 특별한 손님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일세.’ 이후 주인의 거지에 대한 친절한 태도는 미담이 되어 빠르게 전해졌고, 그 제과점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교회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있다. 그것은 서로 ‘친소’(親疎)를 따지는 것이다. 세상은 끼리끼리지만 신앙은 그것을 넘어선다. 오히려 서먹하고 친하지 않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야 교회의 담장을 넘어서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는 원수에게까지 친절의 손을 뻗칠 수가 있는 것이다.


3. 희생은 친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희생이 없이 이루어진 일은 없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거기엔 반드시 희생이 있고, 의미 있는 일은 더욱 그렇다. 친절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본문에서 사마리아인의 희생을 확인할 수가 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험한 산길이라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위험한 곳이다. 언제 강도들이 다시 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일이다.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이 사람을 도운 것이다. 거기에다 여행에 필요한 기름과 포도주를 그의 상처에 쏟아 붙고, 낙타에 그를 태워 주막까지 데리고 와서 그를 돌보와 주었다. 다음 날 자신의 여비까지 다 털어서 주막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의 안위를 부탁하였고, 게다가 추가경비까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34,35). 우린 여기서 사마리아인의 탁월한 친절을 보고 있다. 자신과 상관도 없는 사람을 위한 아낌없는 희생이 그의 친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가 믿는 사람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친절의 대명사가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35절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는 말씀에 주목하기 바란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다. 그리고 주막은 교회이다. 여기에 교회에 대한 주님의 명령과 약속이 나온다. 그것은 교회가 주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야 하고(“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라(“부비가 더 들면”)는 명령,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내가 돌아올 때”)과, 그 수고를 반드시 갚아주시겠다(“갚으리라”)는 약속이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시면서 까지 친절의 본을 보여주신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길을 따라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신자는 친절이 그의 이름이고, 친절이 그의 재산이고, 친절이 그의 특기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친절을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희생이 필요 한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우리 인생의 상징이고, 이 인생길에서 여러 종류의 강도를 만나 고통하는 이웃들이 많다. 교회와 신자는 이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 사명이 있다


친절로 주변을 적시라.
헬런 켈러는 ‘삭막한 인생을 친절로 적시는 사람이 되라’고 했고, 테레사 수녀는 ‘당신을 거쳐 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더욱 좋아지고, 행복해져서 떠나게 하라. 하나님의 사랑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도록 하라. 당신의 얼굴에 친절이, 당신의 눈에도 친절이, 당신의 미소 속에 친절이, 당신의 따뜻한 인사 속에도 친절이 서려있게 하라’고 했다. 우리 서로 친절한 미소, 친절한 말, 친절한 인사, 친절한 행동으로 삭막한 인생을 적시도록 하자. 친절은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이 강하다. 나부터, 사소한 것부터, 지금부터 실천하여 주변으로 친절을 퍼뜨리며 살자. 마음이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 하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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