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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무릎을 꿇라(Kne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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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903회 작성일 09-12-2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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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무릎을 꿇라(Kneel).

눅7:36~50

2009. 12/20 11:00

무릎 꿇은 나무

록키산맥 해발 3,000ⅿ 지대를 수목한계선(timberline), 혹은 교목한계선(喬木限界線)이라고 부른다. 환경조건의 변화 때문에 수목의 생육이 어려운 한계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계선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는데, 이들은 바람과 추위 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하고 마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처럼 자란다. 그래서 이 나무들을 ‘무릎을 꿇은 나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나무들로 만들어진 악기가 세상에서 가장 공명이 잘 되는 명품악기라고 한다. 시련이 나무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도 많은 시련을 경험할수록 세상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명품인생이 된다.

 

무릎 꿇기

우리도 살다보면 한계에 직면할 때가 있다. 그 때가 바로 무릎을 꿇을 때이다. 물론 당시엔 힘들고 어렵지만 그것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고, 새 일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다. 특히 우리 신자들에겐 은혜의 보좌를 이 땅에서 누리는 순간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만났을 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사건은 그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살아있는 고기를 잡았던 육신의 어부였으나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하여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영혼의 어부가 되었다. 전혀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세상은 무릎을 꿇는 것을 실패라고 말한다. 그리고 남의 무릎을 꿇리는 사람을 영웅이라 말한다. 하지만 신앙은 그 반대다. 무릎을 꿇는 것이 축복의 지름길이고, 무릎을 잘 꿇는 사람이 영적 거인이다. 인생의 행복과 형통함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한 20년 전만 해도 ‘무릎 꿇기’는 교회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무릎 꿇고 기도하고, 무릎 꿇고 찬양하고, 무릎 꿇고 예배하고, 무릎 꿇고 섬겼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문화에서 이런 모습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특히 ‘의자시대’가 도래하면서 비천한 신분에 대한 체벌로, 서방문화의 유입과 함께 인권문제로 인식되면서 ‘무릎 꿇기’의 중요성과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사실 고대 동양사회에서 무릎 꿇기는 상대적 평등을 객관적으로 나타내는 예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무릎을 꿇는 것은 아주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무릎 꿇는 것은 ‘절’이라고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자세로 상대방에 대한 극진한 존경과 예의, 그리고 사랑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 주님께 대한 존경과 경외, 사랑의 표현으로서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전통이 사라지게 되어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예배자의 자세

헬라어로 ‘무릎을 꿇다.’는 말을 ‘프로스키네인’(proskynein)이라고 하는데, 신약성경에 59회나 사용되고 있다. 빈도수가 매우 높다. 그 만큼 성경은 무릎 꿇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무릎 꿇음은 ①예배의 자세, ②기도의 자세, ③섬김의 자세를 의미한다. 오늘 신자의 ‘삶 시리즈’ 열 한 번 째, ‘서로 무릎 꿇음’(Kneel)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초청받은 어느 바리새인 집에서 있었던,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인의 돌발적인 행동에서 비롯된 이야기다(내용설명 생략). 본문에 나온 이 여인의 행동은 예배자의 자세에 대한 좋은 귀감이 된다. 예배자로서 주님께 칭찬을 받는 삶을 위해 이 여인으로부터 예배자의 자세를 배우고자 한다.

 

1. 감사의 무릎

예배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는데, 가장 간단하면서도 보편적인 것이 ‘계시와 응답’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예배라고 한다. 이 응답의 가장 중요한 태도가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예배자가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가 바로 이것이다. 본문에서 주님도 여인의 이 마음을 소중히 보셨고, 반면 잔치의 초청자인 바리새인에게는 이 마음이 없다고 책망하셨다. 그렇다면 이런 감사의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과 용서에 대한 은혜에서 온다.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 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41~43).

 

그렇다. 은혜는 죄의식, 곧 용서의식에 비례하고, 감사는 은혜의식에 비례한다. 큰 죄인인데 그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고 여긴 사람은 그 만큼 은혜의식 또한 크고, 은혜의식이 크기에 감사의식 또한 큰 것이다. 이것은 우리 예배자가 가져야 할 아주 소중한 자세이다. 이런 감사의 무릎으로 예배를 드려야 감동이 있고,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는 살아있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본문의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 발아래에 엎드려 눈물로 그 발을 적셨다(44). 이 눈물은 자신의 큰 죄를 용서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47). 사람들은 감동받기를 원한다. 감동을 받을 때 영혼이 소생하고, 인생이 새로워진다. 침체된 영혼이 힘을 얻고, 낙심된 영혼이 소망을 얻는다. 완악한 마음이 녹아지고,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영적 감각이 살아나고,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된다. 예배가 이런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유일한 길이다. 구원의 주님 앞에 용서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무릎을 꿇고 예배에 참여할 때 이런 감동을 경험할 수가 있다.

 

2. 헌신의 무릎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여인이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은 그녀와는 무관한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한 여인의 비명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위독한 환자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첫 번째 병원에서는 돈 없는 환자라는 이유로 거절했고, 두 번째로 찾은 병원도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고 거절했다. 그리고 세 번째 병원으로 가는 도중 환자는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품에서 죽게 되었다. 그녀는 여인의 주검을 안고, ‘이제부터 내가 서 있을 곳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곁이다.’고 결심을 하고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그들과 함께 살았다. 바로 그 사람이 테레사 수녀다. 그녀는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부유한 가정을 떠났고, 안정된 직장도 버렸고, 편안한 모든 삶을 포기했다. 그리고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릎으로 살았다. 이것이 바로 헌신이다.

 

헌신은 예배의 또 하나 중요한 요소이자, 자세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고 하였다. 여기서 “영적”이란 말은 ‘합당한’(reasonable)이란 뜻이다. 즉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헌신)이 올바른 예배의 자세라는 것이다. 본문에 나온 죄 많은 여인의 태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녀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었다. 다른 곳에 보면 그 가격이 3백 데나리온 상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요12:5). 당시 노동자 1년 품삯에 해당되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큰돈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그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그냥 쏟아 부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을 다 동원하여 주님께 섬기고 있는 모습이다. 값비싼 물질을 드리고, 여성에게 영예의 상징인 소중한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몸의 가장 더러운 부위로 생각되는 발을 씻고, 눈물로 그 발을 적시며 거기에 입을 맞추었다. 예배가 바로 이런 것이다. 주님 앞에 나의 전존재를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의 무릎이다.

 

헌신은 사람 앞에서 재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 향기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재가 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재가 될 때 그 제물이 비로소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참된 헌신은 자신의 소유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주님을 향하여 태워드리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 예배에 감격이 있고, 감동이 있고, 주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가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살아있는 참된 예배로 주님께 영광돌리기를 바란다.

 

3. 몰입의 무릎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긍정의 심리학’이라는 학문은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행복하지 못하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람이 ‘가장 행복해 할 때’가 언제인지를 연구해 보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떤 한 가지 일에 ‘몰입’할 때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그림에 몰입할 때, 음악하는 사람은 음악에 몰입할 때,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에 몰입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자의 행복은 언제인가? 그것은 예수님께 ‘몰입하는 삶’을 살 때이다. 주님께 대한 몰입은 형용할 수 없는 삶의 기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예배가 바로 그것이다. 예배는 자신을 잊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몰입의 무릎을 꿇는 것이 예배다. 이와 같은 예배자의 태도를 찬송가 204장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찬송은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찬양이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204장 3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와 같은 거룩한 영적 몰입이 예배다. 여기에 감동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6~18)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주님께 몰입하라.’는 말씀이다. 본문의 죄 많은 여인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 여인이 창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창기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의 대명사였고, 이런 여인이 공적인 자리에 나타나는 것은 죽음을 무릅쓴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했다. 본문도 암시를 하고 있듯 이런 여인과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적인 자리로 나섰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며, 자신의 전 재산과 같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다. 그녀는 주위의 시선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주님 섬김을 계속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의 주님만 보인’ 까닭이다. 이런 거룩한 영적 몰입이 있는 곳에 예배의 영광이 나타나고, 예배의 기쁨과 감격을 경험할 수가 있다. 예배를 통한 각종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다. 예배를 통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일어나게 된다. 본문의 죄 많은 여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를 소망한다. 찬송가 204장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릎 꿇음에 있다.

히브리어로 ‘축복하다.’는 단어를 ‘바라크’(Barak)라고 한다. 여기에는 ‘무릎을 꿇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즉 복과 무릎 꿇음이 같은 단어라는 것이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곧 복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무릎은 ‘힘’을 상징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을 굽힌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복과 무릎이 동의어로 쓰인 것이다. 앞에서 성경이 말한 ‘무릎 꿇음’의 의미를 기도의 자세, 섬김의 자세, 예배의 자세로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것을 누리는 인생이 되는 비결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주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이고, 섬김의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의 무릎을 꿇음에 있다. 하나님의 복은 무릎 꿇음에 있다. 하나님의 복은 물질이 풍부하고, 권세가 있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린데 있지 않다. 하나님께 부부가 손을 잡고 기도하는 모습, 부모가 어린 자녀와 함께 예배하는 모습, 더불어 섬기는 모습,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고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복된 신자의 모습이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한다. 하루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린다. 또 하루가 시작되면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낙타 무릎이 기도의 무릎에 비유되곤 한 것이다. 낙타는 바로 우리 자신이고, 주인은 주님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 짐을 주시기도 하고, 내려주시기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낙타처럼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다. 세상과 그 권력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비겁하고 비참한 일이지만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행복이고, 은총이다. 본문의 죄 많은 여인처럼 주님 앞에 감사의 무릎, 헌신의 무릎, 몰입의 무릎을 꿇어 예배의 감격과 감동, 은총을 받아 누리는 삶이 되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복이 되게 하는 사랑과 행복 비타민 ‘K’는 ‘서로 무릎 꿇음’(Kneel dow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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