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없는 행복(至福)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다시 없는 행복(至福)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170회 작성일 11-02-06 15:47

본문

다시 없는 행복(至福)

마5:1~12

2011. 2/6   08:00. 11:00

하늘의 감탄사, 팔복!

‘올레’(olleh)를 외치는 어느 통신사의 광고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 나무꾼이 도끼로 나무를 찍었는데 그 나무가 쓰러지면서 지나가던 멧돼지를 덤으로 잡았을 때, 나무꾼의 도끼가 연못에 빠졌는데 산신령이 아닌 미녀 삼총사가 금도끼를 가지고 나왔을 때, 아이들이 숲에서 보물찾기를 하던 중 한 소년이 보물이 적힌 종이가 아니라 산삼을 발견했을 때, 그들이 하나같이 외친 소리가 ‘올레’이다. 허황된 이야기지만 신선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매력적인 광고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올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리고 세상이 인정하는 최고의 감탄사라는 이야기이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러고 보면 성경은 온통 ‘올레’의 사건들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비롯해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에덴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신 것. 인간이 범죄로 하나님을 배신하였으나 배신한 인간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마지막에는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인간의 죄와 그 죄로 인한 모든 불행을 청산하기 위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신 것 등.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들에 우리는 감탄사 ‘올레’를 외칠 수밖에 없다. 특히 하나님이시면서 친히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삶과 사역, 가르침은 그 자체가 ‘올레’이다. 본문은 예수님의 교훈들 중 으뜸인 산상수훈(마5:~7:)의 서론에 해당되는 ‘팔복’(Beatitudes)이다. 그리고 이 팔복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진정한 ‘올레’이다. 앞으로 이 하늘의 감탄사 팔복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지난 1월 한 달 동안 ‘잘되는’, 그리고 ‘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이는 팔복과 깊은 관련이 있다.

 

팔복은 명령이 아니라 선언이다.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경 전체를 보석반지에 비유한다면 산상수훈은 그 반지의 보석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만큼 산상수훈의 내용이 값지고 탁월하다는 뜻이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실천해야 할 윤리(율법이나 계명이나 규칙이나 규범)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신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이다. 신자다운 모습과 삶의 태도에 대한 말씀이다. 사실 오늘날 세상은 참된 신자를 찾고 있고,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전도도 중요하지만 참된 신앙인으로서 살기를 결단하는 일이다. 그러면 신자는 영적인 힘과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고, 교회는 부흥하게 될 것이다. 교회사에 나타난 진정한 부흥은 신자들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이 말씀에 충실할 때였다.

 

주님은 여기서 신자가 어떤 존재인가를 ‘복의 선포’ 형식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한 마디로 신자는 ‘행복한 자’라는 말씀이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아직 주님의 복을 받을만한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했는데, 주님의 복을 받기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주님의 받을 받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은혜’의 선언이다. 그래서 팔복은 우리를 땅바닥에 꿇어 엎드리게 하는 말씀이다.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이후에 주어지는 주님의 요구에 대하여 눈물로 응답하게 하는 말씀이다. 팔복이 없다면 기독교 역시 유대교처럼 행위의 종교가 되었을 것이고, 우리는 산상수훈이라는 또 다른 율법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의 일방적인 복의 선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은 천국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팔복은 인간의 외향적인 '행위'(Doing)가 아닌 내면의 '존재'(Being)를 우선 선언한 것이다. 이와 같은 팔복의 성격은 은혜의 종교인 우리 기독교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복이 있나니”

 

본문에 이 표현이 (원문에서는 문장 첫 머리)모두 아홉 번 나온다. 그래서 팔복이 아니라 구복(九福)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마지막은 여덟 번째 복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본다. 이것은 명령문이나 우리 말 성경에서처럼 서술문이 아니고 ‘선언문’으로 되어 있다. 가난한 자에게 더 가난할 것을 요구하거나 우는 자에게 더 울 것을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복을 선언하고 우는 자에게 복을 선언한 것이다. 이는 팔복이 어떤 윤리적 행위를 위한 실천 덕목이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아니다. 오히려 총체적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고 그것에 따른 영성생활의 행복을 노래한 것이다. 즉 존재의 변화, 변화된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팔복의 성격과 함께 주님의 행복관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팔복이 말하는 복의 특징

여기에 나오는 ‘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이’(Μακαριοι)인데, 이는 신자가 누리는 행복의 최상급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로, ‘복된 상태’를 뜻한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신자는 ‘장차’ 행복한 자가 될 것이라는 기원의 의미가 아니라 ‘이미’ 행복한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어에는 없지만)영어성경은 복이란 단어 다음에 현재형 동사 ‘are’를 첨가해 놓았다. 이것은 신자의 ‘복된 상태’를 강조하기 위함이다(W. Barclay). 키텔(Kittel)은 이 복을 ‘천국에의 참여를 통해 오는 특이한 즐거움’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이를 세속적인 복과 구분하여 ‘지복’(至福, 다시 없는 행복)이라고 부른다. 이 복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복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나타낸다. 성경의 저자들은 ‘복되신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1:11)고 하였고, 또한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6:15)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인간의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임을 강조한 것이다. 복의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다. 죄인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주님의 거룩한 영,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행복이 시작된다. 팔복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지금 내가 가난하고 핍박을 받고 있어도 복의 원천이신 그 분 안에 있고, 그 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고, 그 분이 기억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팔복은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즉 팔복은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고, 복이다. 오직 은혜의 결과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 복에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있다. 행복은 하나님께 바치는 데서 시작된다. 영어 성경은 ‘마카리오이’를 ‘blessed’로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은 ‘bless’이다. 이 ‘bless’의 어원은 ‘blood’(피)이다. 이 단어가 고전영어에서는 ‘피의 제사로 하나님께 드린다.’(to God by blood ritual)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팔복이 희생(헌신)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신자의 복은 주님의 보혈(희생)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이에 응답하는 삶이 신자의 행복인 것이다. 팔복의 내용을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가 있다. 세속적인 복이 상향(上向) 지향적인 것에 반하여 팔복의 내용은 모두가 하향(下向)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팔복은 매우 역설적인 복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이 되시기 위하여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자기 것을 모두 비워내는 끝없는 희생과 헌신이 요구된다. 신자의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소유의 철학으로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는 만족이 없다. 그러나 헌신의 철학으로 인생을 사람은 작은 일에서도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받는 기쁨은 받는 순간뿐이고, 더 주지 않음에 대하여 불평으로 바뀌게 된지만 주는 기쁨은 물결처럼 끝없이 이어져간다. 그래서 에릭 프롬(E. Fromm)은 ‘소유지향에서 존재지향으로 문화가 바뀔 때에만 인류의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소유하고자 하는 열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의 포로가 되게 할 따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드리는 것을 배우는 순간, 인간은 놀랍게도 자유를 경험하고,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데 있다.

 

셋째, 복은, 특히 팔복은 현재 상태에 대한 위로와 격려이다. 이는 부정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미래(종말론적)의 복을 현재로 끌어와서 믿음으로 누리는 행복을 서술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마카리오스’는 ‘축하한다.’ 또는 ‘괜찮다.’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분위기로 팔복을 읽으면 그 의도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음이 가난한가? 축하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울고 있는가? 괜찮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위로해 주실 것이다.......’ 팔복은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 그래서 환경이나 상황을 초월하여 자신이 얼마나 복된 존재인가를 깨닫고, 그것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동시에 팔복은 제자들이 소유해야 할 ‘영적 자질’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팔복은 권면이고 도전이며 명령이다(앞으로 저의 설교는 여기에 초점을 둠). 그래서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 의에 대한 목마름, 긍휼히 여김 등 영적 자질에 해당되는 것들이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윌리엄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복의 성격을 이렇게 정의했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이나 어떤 강한 자의 힘에 의해 소멸되거나 빼앗길 수 없는 만족스러움, 생의 고통, 슬픔, 상실, 죽음을 통해서도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기쁨, 인생의 노년기, 생의 실패, 야망의 좌절, 환경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희망, 현실에서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성공에 대해 곁눈질 할 필요가 없는 자족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아름답고 거룩한 복은 주님 안에서 신자에게 허락된 것들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현실이 되는 데는 아직 거리가 있다. 그래서 이 팔복은 그 하나하나가 지복(至福)인 동시에 지복에 이르는 길이다. 즉 신자의 복된 상태의 선언임과 동시에 그곳으로 나아가는 방향지시표(direction)이다.

 

그리스도의 초상(肖像)

네덜란드의 신학자 호이벨(Albert Van den Heuvel)은 팔복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이라고 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팔복을 가만히 보면 마치 예수님의 보는 것 같다. 8가지 색을 가진 수 천 개의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진 예수님의 모자이크 초상화와 같다. 예수님 안에는 완전한 겸손과 온유, 자비와 청결, 화평,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에 대한 충성이 있다. 때문에 팔복은 신자됨의 참된 표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팔복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배워야 할 것은 마음이 가난하셨고, 늘 우셨고, 온유하셨고, 옳은 일에 굶주리셨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고, 동기와 목적과 삶의 초점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하셨고, 언제나 그 마음에 평화를 가지고 계셨고, 옳은 일에 목숨을 거셨던 우리 주님의 성품이다. 이와 같은 주님의 모습, 주님의 성품을 우리가 닮아가야 한다. 신앙생활이란 항상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올레’가 있다. 바로 팔복이다. 팔복은 세상이 주는 감탄사가 아니라 하늘의 감탄사이다. 팔복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아 만족스러움과 기쁨, 희망과 자족을 누리는 ‘다시 없는 행복’의 삶으로 다가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6 / 42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