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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무덤으로 만든 사람,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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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416회 작성일 12-11-1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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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무덤으로 만든 사람, ‘가인’

창4:1~15

2012. 11/11. 08:00 11:00

밧티즘(butism)

인생은 실패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그릇된 반응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반면에 성공은 실패를 딛고 일어섬으로 만들어진다. 아기가 걷기까지 보통 2,000번의 넘어짐을 경험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숱한 넘어짐을 통해 걸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성장은 실패를 빼고 언급할 수 없다. 성장의 이면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실패의 경험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패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실패를 거울삼아 탁월한 창조와 성공의 가능성을 찾게 해주는 ‘좋은 실패’가 있고, 아무런 배움도 없이 단순히 반복되는 ‘나쁜 실패’가 있다. 그래서 ‘실패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①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②실패가 가지는 좋은 측면을 활용하여 제2의 실패를 막고, 나아가 ③실패를 창조와 성공, 발전의 동력으로 삼고자하는 학문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이 ‘실패학’이 기업과 학계에 큰 유행이라고 한다.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 실패를 발전과 성공의 동력으로 삼기 위해서 실패를 연구하는 것이다. 소위 ‘땅에서 넘어진 자는 그 땅을 짚고 일어서라!’는 정신과 통한다. 주로 실패한 전직 경영자들이 성공비결 대신 ‘나처럼 하면 이렇게 망한다.’고 가르친다. 한마디로 ‘실패한 사람’이 ‘성공한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 셈인데, 그들은 한 때 실패를 했지만 결코 패배자가 아님을 당당히 증명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밧티즘’(butism)이라 부른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실수를 했다. 그러나(but) 실패는 아니다! 실패는 했다. 그러나(but) 패배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실패학은 ‘재기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단 한 번의 실패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 실패 때문에 포기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에는 실패 때문에 포기한 사람들이 많다. 아담의 장남 ‘가인’(Cain)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동생 아벨과 함께 각자의 소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 한 마디로 예배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단 한 번의 실패가 그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는 무덤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자기 동생을 죽인 형으로 영원히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자손들에게로 이어져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택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악한 세력이 된다. 가인이 그 악한 세력의 조상이 되고, 또한 통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을 복의 통로가 되도록 아담 가정의 장자로 주셨는데, 그의 아버지 아담처럼 결국은 죄의 통로, 반역의 통로, 저주의 통로가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제사로 모든 것을 결정하실 만큼 마음이 좁은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단 하나, 단 한 번의 잘못이나 실수로 사람을 벌하거나 포기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량이 없으시다. 무수한 잘못과 실수에도 참고 기다리며 기꺼이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자식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잘해보겠다는데 그것을 받아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다시 일어서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다(눅15:).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가인이 자신이 드린 제사의 문제점을 파악해서 시정했더라면 그 역시 아벨처럼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마땅히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실패를 거울삼아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기보다 자신이 거절당했다는 거절감에만 사로잡혔고, 그 거절감은 ‘안색이 변할 만큼’(5)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한 번의 실패가 그의 무덤이 되고 만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주변에는 이런 안타까운 가인‘족’(族)이 많다. 그 실패가 끝이 아닌데 말이다!

 

질투가 문제였다!

그렇다면 가인은 왜 실패를 재기의 기회로 삼지 못했을까? 왜 실패를 거울삼아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제사가 거절되었다는 거절감에만 사로잡혀 분노를 품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실패를 재기의 기회로 삼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가인과 아벨의 차이를 ‘믿음의 차이’로 정리한 것이다(11:4). 그렇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satisfied) 할 수가 없는 것이다(히11:6). 다른 하나는 비교의식에서 온 ‘질투심’ 때문이다.

 

셰익스피어(W. Shakespeare)는 질투를 ‘사람의 고기를 먹는 푸른 눈의 괴물’이라고 했다. 질투는 파괴적이고 악마적이라는 뜻이다.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데, 악마가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속삭였다. ‘무엇이든지 네 소원을 한 가지만 말하라. 그러면 들어주겠다. 대신 네 친구는 너의 갑절로 주겠다.’ 이 사람은 악마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악마에게 자신의 눈을 하나 썩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 친구의 두 눈을 썩게 할 수 있으니까! 한 마디로 친구가 잘되는 것을 죽어도 용납할 수가 없다는 심사다. 이것이 질투의 특징이다. 그런데 이 질투는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는 ‘도공은 도공에게 질투를 하고, 목수는 목수에게, 걸인은 걸인에게, 시인은 시인에게 질투한다.’고 했다. 우리 속담에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다. 이와 같이 질투는 가까운 사람에게서 느낀다. 나와 깊은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없으면 질투도 없다. 질투는 비교의 산물이고, 판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master it!

비교의 산물이고 판단의 산물인 질투는 대개 비교의식에 의한 열등감에서 출발한다. 물론 질투가 부러움의 감정으로 바뀌면 분발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질투는 삶의 여정 중에서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마음의 신호다. 질투는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가야하는가에 대한 목표와 의지를 생기게 한다. 그래서 질투의 순간에 자신을 되돌아본다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질투가 분노와 미움의 감정으로 바뀌면 파괴적인 불행을 초래한다. 가인의 경우가 좋은 예다. 가인의 경우도 그 상대가 자기 동생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동생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잘되는 것에 강한 질투를 느낀 것이다. 그리고 그 질투의 감정으로 인하여 분노와 미움에 사로잡혀 재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예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본문에서 ‘안색이 변했다’(6)는 것은 ‘얼굴이 굳어졌다’는 뜻인데, 강한 분노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와 같은 가인의 질투와 질투에 의한 분노의 감정은 자기 안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자기성찰보다 ‘너 때문이야’라고 하는 (책임전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패나 불행의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기보다 밖에서 찾는다. 책임을 전가시키고, 화풀이를 할 수 있는 희생양을 찾는 것이다. 가인도 그랬다. 그래서 아벨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패의 원인이 아벨 때문이 아니라 가인 자신 때문이다.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라고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셨다. 이는 네가 잘했다면 왜 떳떳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자들은 본문의 제사문제를 의식과 제물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 전체를 포괄한다고 한다. “아벨과 그의 제물”(4), “가인과 그의 제물”(5)이 이를 반영한다. 즉 가인의 제사는 그의 제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온 그의 삶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삶이 결여된 예배, 이것이 가인의 제사였다. 그리고 이런 제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다. 이는 후대이긴 하지만 이사야 1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10~~17). 신약에서 바울도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합당한, 올바른) 예배니라.”(롬12:1)고 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고 그것을 고치려고 하기보다 아벨의 탓으로 돌려 그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master it!’(7). 그 분노의 감정을 다스려라, 그 감정의 주인이 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그 감정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된 것이다(8). 질투로 인한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것’이 가인이 실패를 재기의 기회로 삼지 못한 또 하나의 원인이다.

 

가인처럼 되지 말자!

본문은 예배의 실패, 즉 잘못된 예배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준다. 가인은 예배의 실패로 인하여 동생 아벨을 질투하였고, 그 질투는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는 살인으로 이어졌다. 또한 실패에 올바로 반응을 보이지 못한 가인의 태도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고, 실수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실패를 통하여 화려하게 재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실패를 자신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린 사람이 있다. 가인은 단 한 번의 실패로 비참하게 무너졌다. 그것은 비교의식으로 인해 질투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실패를 거울삼아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기보다 거절당했다는 거절감에만 사로잡힌 분노 때문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지 못하고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태도가 그를 영원한 패배자로 만들었고, 저주의 통로가 되게 했다. 살다보면 우리 역시 이런 상황과 문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가인처럼 되지 말라고 거울로 가인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의식을 감사로, 질투를 분발의 동기로, 부단한 자기 성찰을 통해 실패에서 교훈을 찾고, 부정적인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그것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주인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은 우리가 승리자가 되고,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가인의 길을 극복하는 비별이다. 이런 사람에게 실패나 실수는 무덤이 아니라 재기의 발판이 된다. 화려하게 비상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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