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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수단으로 삼은 사람, ‘시므온과 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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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733회 작성일 13-03-17 15:41

본문

신앙을 수단으로 삼은 사람, ‘시므온과 레위’

창34:18~31

2013. 3/17. 08:00, 11:00

신앙은 내게 무엇인가?

신자로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여정에서 잠시 멈춰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의 신앙 입장은 어느 쪽인가? 삶을 위한 신앙인가? 신앙을 위한 삶인가? 신앙에 두 가지 큰 관점이 있다. 신앙을 내 삶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하기 위한 ‘도구’로 볼 것이냐? 아니면 내 삶 자체는 생각지 않고, 순전히 ‘신앙 그 자체’를 위한 신앙으로 볼 것이냐? 얼핏 둘 다 맞는 말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 이 두 관점에 의해서 신앙은 완전히 두 갈래로 갈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또 그렇게 갈라져 내려왔다. 전자의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신앙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을 유익하고 의미 있게 하기 위해 존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신앙이 삶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반면에 후자는, 신앙은 인간 편에서 무엇을 얻고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 그 자체를 위한 것, 즉 ‘신앙만의 신앙주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신앙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기적인 인간에게 신앙 그 자체가 목적인 신앙생활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신앙의 도구(수단)화’는 심각한 문제다. 흔히 비판을 받고 있는 기복신앙이나 자주 발생하는 종교분쟁도 신앙의 도구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교(신앙)의 상업화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세속화, 혹은 교회의 세속화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신앙의 도구화는 하나님을 자신이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나 정치적인 권력, 세속적인 부와 같은 이기적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즉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 결과 자신이 지향하거나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린 결과를 초래한다. 신앙은 살아갈 내용이지 도구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신앙 그 자체로 끝나야 하는 것이다. 부모는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믿어야 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신앙이 도구화되는 순간 신앙은 악마의 전신갑주를 입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도구화된 신앙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야곱 가정에 닥친 아픔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우리의 아픔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다.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아픔과, 당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그것이다. 삶의 후회는 주로 당하지 않아도 될 아픔에서 비롯된다. 과속만 하지 않았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을,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다툼이 없었을 것을. 그곳에 있지만 않았다면 괜찮았을 것을.......그런데 이와 같은 후회가 우리의 삶에 참 많다. 이는 우리의 삶에 당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다. 창세기 34장은 당하지 않아도 될 야곱의 아픔에 대한 기록이다. 야곱이 그의 인생에서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는 아픔의 현장이다. 형 에서와 화해를 한 야곱은 곧장 베델로 가지 않고 세겜성 근처에 장막을 치고 짐승들의 우리를 만들고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숙곳이란 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의 하나밖에 없는 딸 디나가 세겜성 여자들을 보러갔다(1)가 그 성(城) 성주의 아들 세겜에게 겁탈당한 사건이 발생했다(2). 그리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의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와 재물을 약탈했다. 야곱은 참으로 끔찍한 사건들로 인한 큰 아픔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야곱 자신이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당하지 않아도 될 아픔이라고 한 것이다. 야곱은 20년 전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면서 루스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꿈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약속을 받았다(창28:12~15). 그래서 그는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하고 서원을 했다(:21,22). 하나님은 야곱과의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갑부가 되어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했으나 문제는 야곱이었다. 그는 곧장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성 근처에 머물렀다. 하나님과의 약속(창28:21,22)을 뒤로하고 가야할 목적지(벧엘)를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그가 당한 아픔의 첫 번째 이유다. 다른 하나는 디나의 태도다. 디나가 세겜성 여자들을 보러갔다고 했는데, 여기서 ‘보다’는 ‘세심히 관찰하다’, ‘배우다’, ‘즐기다’는 뜻이다. 디나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구경을 간 것이 아니라 그들과 교제하고, 그들의 풍습을 배우고, 즐기려는 의도에서 간 것임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디나의 태도가 이런 아픔을 부른 것이다. 이 역시 그가 벧엘로 곧장 가지 않았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지시하신 곳으로 가야하고 그곳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형통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야곱처럼 당하지 않아도 될 아픔을 겪게 된다. 사랑스러운 딸 디나가 수치와 부끄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스러운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순종하지 않으면 축복도 저주가 된다.

 

신앙을 수단으로 만든 사람들

비록 못된 짓을 저지르긴 했으나 세겜은 디나를 사랑하였고,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3). 그는 아버지 하몰을 통해 야곱에게 디나와 결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하몰은 야곱에게 자기 땅이 넓으니까 이참에 서로 혼인동맹을 맺어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8,9). 이에 대해 야곱의 아들들은 일거에 거절했다. 이유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혼인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14). 그렇지만 세겜의 모든 사람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고려해보겠다고 했다(16~17). 그러자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들은 성민을 설득하여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도록 했다(18~23).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이 할례를 받고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3일 째 되는 날, 성을 쳐들어가서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부녀자와 재산을 약탈하였다(25~27). 누이의 수치를 빌미로 엄청난 피의 복수가 자행된 것이다. 누이를 더럽힌 죄에 대한 복수라고 하지만 참으로 끔찍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종교적 상징인 할례를 상대방을 속여서 복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다.

 

할례는 ‘하나님과 언약의 징표’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징표로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셨고, 후손도 영원히 지킬 규례라고 하셨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17:10).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 특히 시므온과 레위는 복수에 눈이 멀어 언약의 징표 할례를 복수를 위한 도구로 잘못 사용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복수를 핑계로 세겜 사람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탐욕스러움까지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거룩한 할례의식을 복수와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만 것이다. 한 마디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신앙을 수단화(도구화)시킨 최초의 사례이고, 최초의 사람이다. 이는 세속화된 신앙, 세속화된 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옛날에 경건한 사람들은 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자세로 살다보니 길을 걷다가 이마가 나무나 벽에 부딪쳐 피를 흘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마에 피가 흐르는 사람을 보면 경건한 사람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그러자 사람들 중에 경건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집에서 이마에 피를 내어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 마디로 경건생활을 자기명예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성경에도 구제와 기도, 금식과 같은 경건생활을 이렇게 이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이러한 신앙의 도구화, 경건생활의 수단화는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주님께서 구제를 하려거든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를 만큼 은밀하게 하고(마6:3), 기도는 골방으로 들어가서 하고(:6), 금식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하라(:17)고 하신 것이다. 경건생활이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이런 태도를 주님께서 크게 꾸짖으셨다.

 

주님을 이용하지 말라!

신자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최고의 전략이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사단에게 3가지 시험을 받으셨는데(마4:1~11), 그 내용도 결국은 신앙을 수단화하라는 것이다. 돌을 떡이 되게 하여 먹으라는 것은 재능(능력)을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선전과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영예(인기)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온 천하를 주겠다는 것은 쉽게 성공하라는 것인데, 성공을 위해 경배의 대상을 바꾸라는 의미와 함께 경배를 성공의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공생애 마지막에 있었던 성전 정화사건은 바로 이런 신앙의 도구화, 성전의 수단화(상업화)에 대한 강한 경고이자 심판이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신앙의 도구화는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발생했다. 오늘날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도구화된 신앙과 교회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독교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키워드 ‘네 가지’(배타성, 성공지상주의, 극우반공, 친미성)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시민K, 교회를 나가다」). 사람도 이용당하는 것 원치 않는다. 그래서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결국은 그 사람을 놓치게 된다. 신앙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신앙이나 교회나 경건생활을 이용하지 말자. 이들은 도구가 아니라 살아야 할 내용이다. 특히 주님을 이용하지 말자. 나의 ‘성공의’ 사닥다리로 주님을 이용하지 말자. 주님은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신앙을 수단으로 삼고 주님을 도구로 삼아 이용한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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