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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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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889회 작성일 13-04-1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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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 ‘요셉’

창39:7~18

 

2013. 4/14. 08:00, 11:00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Empedokles Complex)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라는 말이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네 가지 원소로 세계가 구성되었다고 주장한 그리스 자연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스스로 화산의 분화구로 뛰어 들어간 사람이다. 우리가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로 뛰어들고 싶은 묘한 충동을 느끼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심리적 현상을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라고 한다.

 

그런데 이성간의 유혹에도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가 작용한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결국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특히 요셉의 경우는 형들에게 노예로 팔린 터라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자포자기 심정에 유혹에 더 쉽게 넘어질 수가 있었다. 게다가 젊고 희망은 보이지 않으니까 방탕한 생활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요셉은 그 유혹을 이겨냈다. 그 유혹이 단순히 한 두 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아주 집요하게 유혹하는 눈길을 보내고, 유혹의 말을 하고, 유혹의 행동을 했다. 그것도 자신이 섬기고 있는 여주인이 그랬다. 그런데 요셉은 여주인의 요구에 대한 거절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면서도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요셉은 여주인의 유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거절하였다.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8,9).

 

유혹에 무너지지 않은 요셉

‘미드라쉬’(Midrash, 구약성서에 관한 유대인들의 독특한 해석용법으로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묵상하거나 상상력을 동원하여 재구성한 것)에 나온 요셉의 이야기다. 보디발 아내 이름은 첼리카였고, 그녀는 요셉을 여러 방법으로 유혹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그만 몸져눕고 말았다. 그녀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귀부인 친구들이 문병을 왔다. 과일을 깎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요셉이 시중들기 위해 들어왔다. 그런데 요셉의 용모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요셉에게 넋이 나간 부인들이 모두 과도에 자신의 손을 베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보디발의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 본 당신들도 그러한데 매일 보는 나는 어떻겠습니까?’ 요셉이 비록 노예였지만 다른 사람이 유혹하고 싶을 만큼 빼어난 조건을 가졌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여주인에게까지 유혹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그 유혹을 물리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젊고 외로운 청년 요셉이 어떻게 여주인의 집요한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자신의 한계를 인식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9).

 

잘 나가다가 무너진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망각한 것이다. 성공을 경험하고 나니 자신감이 충천하여 자기가 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고, 그래서 무엇이든 손을 댔다가 허망하게 무너진다. 결국 자만에 사로잡혀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린 결과다. 때문에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경고한 것이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기억한 것이다(8,9). 즉 존재의 한계, 권리의 한계를 잊지 않고 있었다. 요셉은 자신이 보디발의 종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맡겼지만 자기 권리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명확하게 인식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누군가로부터 무조건적인 신뢰를 받고 큰 권한을 위임받게 되면 처음에는 목숨을 걸고 충성하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주인의 자리, 1인자의 자리를 넘보게 된다. 이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심성이다. 그래서 배신은 늘 가장 가까운 곳, 가까운 사람,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제자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로마의 시이저를 죽인 사람은 그의 친구이자 양아들 부르터스였다. 그래서 시어저는 ‘부르터스여, 너 마저!’ 라고 부르짖으며 숨을 거뒀다. 그러므로 자기가 누구이고 자기의 한계가 무엇인지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유혹을 이길 수 있다. 최선의 삶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知不知上) 겸손에 있고, 인생의 가장 심각한 병은 알지 못하면서 안다(不知知病)고 하는 교만이다. 바로 이 교만한 마음이 사단의 통로가 된다.

 

신전의식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

 

‘호손효과’(Hawthorne effect)라는 것이 있다. 이는 근로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감독관이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행동이 변하여 더 높은 효율성을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경건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신전의식’(Coram Deo)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내가 주님 앞에 있고, 주님이 항상 나를 보고 있다는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주님 앞에서 피할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다는 생각, 또한 내가 행한 대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이 경건의 능력을 높이는 영적 호손효과를 가져온다.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이 바로 이 점이다.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 그래서 불륜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큰 악이라고 생각한 점이다.

 

우린 여기서 보디발 아내와 요셉을 통해, ‘사람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의 차이를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을 의식하며 산다.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는 열심히 땀을 흘리며 성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보는 사람이 없으면 하던 일을 던져버리고 늘어져 놀기도 하고, 대충 일을 마무리해 놓고 다했다고 눈가림하고, 심지어 곁길로 벗어난 행동을 하기도 한다. 보디발 아내의 의식과 태도가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보는 사람만 없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집안에서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요셉에게 보는 사람도 없으니 즐기자고 유혹했다(11). 게다가 불륜 자체를 그다지 심각한 죄로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의식이었다. 그렇지만 요셉은 보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인 아내와의 불륜은 자신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긴 주인에 대한 배반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큰 악으로 규정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사소한 죄도 하나님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죄를 무서워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람 앞에서 사는 사람은 그 사람만 보지 않으면 괜찮기 때문에 죄를 가볍게 생각한다. 아무튼 요셉의 이런 생각, 의식, 태도가 보디발의 아내가 날마다 유혹하였으나 (유혹을 물리치는 실제적인 두 가지 방법)상황을 만들어주지 않았고(10, “함께 있지도 아니하리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불이익을 감수하며 그곳을 뛰쳐나왔던 것이다(12,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로 물리친 것이다.

 

유다와 요셉의 차이

요셉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것이다. 문맥상으로 37장에서 39장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왜 38장에 사건 흐름과 어울리지 않는 유다의 이야기가 끼어있을까? 그것도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으면 백번 좋을 낯 뜨거운 내용이 말이다. 그런데 38장과 39장은 매우 비슷하다. 그것은 한 집에서, 한 아버지 밑에서, 한 형제로 자란 유다와 요셉이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 집을 떠나서 생활하게 되었다. 유다는 아버지 집을 떠나 ‘내려가서’(38:1) 가나안 족속과 함께 살았고, 요셉도 아버지 집을 떠나 ‘내려가서’(39:1) 이집트에서 살았다. 물론 유다는 스스로 선택해서 갔고, 요셉은 강제로 팔려갔다. 이렇게 두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자기 공동체를 떠나 생활해야 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다는 이방여인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는데, 두 명이 하나님의 저주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아내가 죽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창녀의 집을 들락거렸고, 며느리 다말은 가문을 잇기 위해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그와 동침하였다. 그리하여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자식까지 낳았다(30). 그야말로 38장은 인류사에 나타난 온갖 죄악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다는 몸은 자유인이었으나 육체의 노예가 되어 정욕이 이끄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 반면에 요셉은 노예지만 충실하여 주인의 신임을 받았고,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는 아름다운 삶,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다. 이와 같이 자유인 유다보다 노예 요셉이 더 훌륭하고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38장과 39장은 누구의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이 더 형통한 삶이고, 형통함을 보여주는 삶이고, 형통하게 하는 삶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인생의 유혹 앞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삶인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래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요셉이다. 이런 사람이 형통하고, 형통함을 보여주고, 형통하게 한다. 또한 어떤 시련과 유혹에도 무너지지 않고 승리할 수가 있다. 지금 우리는 유혹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고, 수많은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요셉처럼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인정하며, 매사 주님께 초점을 두고 주님을 의식하는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형통의 길,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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