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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바라보는 절기, 대강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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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374회 작성일 25-11-3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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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바라보는 절기, 대강절

벧후3:8~13

2025. 11/30, 11:00(대림절 첫 주일)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인생은 기다림이다. 하루하루의 일상에는 작은 기다림이 있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는 아내의 손길에 기다림이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인생 설계에는 큰 기다림이 있다. 밤잠 설쳐가며 공부하는 학생의 포부에도 기다림이 있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에는 크고 작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기다림 중에는 피하고 싶은 끔찍한 것도 있다. 갚을 길 없이 빚쟁이가 정해 놓은 그날을 맞아야 하는 기다림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초조하게 수술 시간을 맞이하는 그 기다림은 그 자체가 두려움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형 집행 시간을 맞이하는 사형수의 그 기다림은 그 자체로 절망이다. 이런 기다림은 피하고 싶은 끔찍한 기다림이다. 그러나 기다림 중에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기다림도 있다. 결혼 날을 잡아놓고 그날을 준비하는 신랑 신부의 기다림은 행복 그 자체이다. 전역할 날을 달력에 표시하며 학수고대하는 말년 병의 기다림은 희망 그 자체이다. 이런 기다림은 정말 아름다운 기다림이다.

  

신앙도 기다림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은 기다림의 책이다. 성경에는 끊임없는 두 가지의 기다림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구약은 이 땅에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고, 신약은 다시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이다. 이 외에도 기다림의 이야기가 많다. 노아는 홍수로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방주를 지으며 무려 120년을 기다렸다. 75세에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25년을 기다린 끝에 100세에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리라는 약속의 씨앗 이삭을 얻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을 기다리며 훈련의 시간을 지난 후 가나안에 들어갔다. 성경 속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모두가 기다림의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 기다림은 계속되고 있다. 약속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시며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하셨다. 신약의 교회와 성도는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기회다.

문제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무척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포기한 사람이 참 많다. 본문은 기다림에 지치지 않도록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8,9).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한 것은 당시에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다 지친 사람이 많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까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이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것, 곧 주님의 재림이 지체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시간 계산법이 다르기 때문이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참으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또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루하게 참고 기다리는 시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9).


유진 피터슨은 그의 메시지 성경에서 이 부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참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종말을 유보하고 계신 것은 한 사람도 잃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들에게 삶을 고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도 지루할 만큼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 이유는 한 영혼도 잃고 싶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이것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기다림 속에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오늘은 대강절 첫 주일이다. 이 대강절은 기다림의 절기다. 그러므로 대강절은 단순한 기다림의 의미도 있지만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는 기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준비의 시간이다. ‘낭비가 아닌 창조의 시간이다.

  

기다림은 축복이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는 세 가지의 귀중한 이 있는데, 그것은 황금’, ‘소금’, ‘지금이라는 말을 듣고 감동하여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여보 이 세상에 세 가지 귀중한 금이 있는데, 그게 뭔지 맞춰 봐!’ 잠시 후 아내에게서 답이 왔다. ‘현금, 지금, 입금!’ 잠시 후 남편이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방금, 조금, 입금!’ 기다림은 지루하고 답답할 수 있으나 우리의 삶에 황금과 같다. 우리가 사는 것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림은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나님의 법칙이기도 하다. 신앙의 근본은 기다림이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성도의 자세다. 특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에게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황금처럼 소중한 시간이다. 주님을 바라보는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삶의 힘을 얻기 때문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40:31).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라는 말을 어떤 영어 성경(KJV)주를 기다린다’(Wait upon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고, 다른 성경(NIV)주를 소망한다’(hope in the Lord)라고 번역하고 있다. 두 번역을 합치면 기다림이 곧 소망이라는 의미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새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바라봄이고, 바라볼 때 새 힘을 얻게 된다. 그래서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소망이다. 소중한 황금과 같은 보배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0~13).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앙적 기다림과 비신앙적 기다림의 차이가 있다. 서론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기다림이 어떤 이에게는 축복이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된다고 말이다. 주님의 재림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재림이 신앙적 기다림에는 최대의 축복이지만 비신앙적 기다림은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이다.

  

간절히 사모하라.

기다림은 쉽지 않다. 특히 초대교회에서 박해를 받던 이들에게 이 기다림이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당시는 그 유명한 네로황제의 박해가 있었던 시기다. 주님께서 속히 오시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당시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던 곳이 지하 무덤(카타콤)이다.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있다. 그 좁은 미로와 같은 지하 무덤에서 신앙을 지키고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교 당하는 고통을 목격할 때마다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도 그들의 삶은 그렇게 비극적이지 않았다. 그들에겐 신앙적 기다림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 순교기를 보면 죽어가는 성도를 바라보며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결국 황제는 성도의 처형을 금했다. 용기 있는 성도의 모습을 보면서 로마 시민이 감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순교의 영광이 아니라 배교의 치욕을 맛보도록 회유하는 자들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순교자 폴리캅(Polycarp: 69-155)도 죽기 전 로마 군인이 그를 회유했다. 주님을 모른다고 한 번만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평생을 사는 동안 주님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부인하리오.’ 그래서 결국 순교를 당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영광과 복을 소망했기 때문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오직 준비된 사람에게 해당이 되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 기다리는 것은 초조하지만 지루함이 아닌 희망의 시간이다. 심지어는 폴리캅처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기다림이 축복임을 알기에 희망을 품고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잘 준비하여 간절히 사모하므로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며 간절히 사모하라.’(11,12a).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앞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다. 앞을 내다보며 한숨짓는 사람은 그 인생은 바로 지옥이다. 그러나 앞을 내다보며 미소를 짓는 사람은 그 인생은 바로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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