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역행하는 고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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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6-10-25 14:39본문
시대를 역행하는 고귀함
잠28:20
2026. 10/25 11:00(성령강림 후 스물두 번째 주일, 종교개혁 기념주일)
성실이라는 단어가 낯선 시대
오늘날 우리는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클릭 한 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고, 타인의 성공담이 초 단위로 업데이트되는 미디어 속에서, 지속성보다 파급력,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성실함은 종종 효율성의 적으로 규정된다. 남들보다 더 일하고, 더 깊이 고민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정직한 시간을 쏟는 이들에게 돌아오는 건 찬사가 아닌 냉소다.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호구’라는 잔인한 말로 묶어버린다. 그래서 성실이라는 소중한 가치가 빛을 잃고 무색해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꾹 참아라. 끝까지 견뎌라. 그 자리를 지켜라!’라는 말은 마치 고루한 꼰대 소리처럼 들리게 된 것이다.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그만큼 지금 우리가 ‘가벼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끔은 요령껏 눈치 빠르게 살지 않으면 금방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이 우리를 엄습한다. 성실하게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어깨가 자꾸만 처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이렇게까지 애쓰며 살 필요가 있을까?’ ‘나만 바보처럼 손해 보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문득문득 찾아온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의 이 계산법과 속도를 그대로 안고 예배의 자리로 나올 때,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성실’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눈에는 미련해 보이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묵묵한 그 ‘성실함’을 가장 귀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본문이 바로 그것이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20).
성실의 의미와 복
본문에서 ‘충성된 자’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에문’(אמון)이다. 이는 조건 없는 신실함, 한결같음을 뜻한다. 사람이 보든 안 보지 않든, 상황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아 겨울처럼 메마른 계절을 지나고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와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 것이다. 이것이 ‘예문’(성실함)이다. 그러니까 성실은 ‘태도의 올바름’이다. 세상은 결과를 전부로 취급한다. 즉, 눈에 보이는 성과와 타이틀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과정을 어떻게 속였든, 결과를 냈다면 영웅이 되고,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르는 세태다. 그래서 남보다 뒤처지면 조급해지고, 부정한 방법이라도 써서 빨리 성공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산법은 다르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섰고, 어떤 태도로 그 결과를 만들어 냈는가?’를 보신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것, 남이 알아주지 않는 골방에서의 기도, 이름도 빛도 없는 섬김의 자리에서 눈물 흘리며 씨앗을 뿌리는 그 ‘태도’를 보신다. 세상은 결과를 묻지만, 하나님은 성실을 물으신다.
본문은 이렇게 성실한 사람에게 복이 많다고 선언한다. 성실한 자가 누리게 되는 복을 몇 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뢰와 존귀의 복이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자산 중 하나는 ‘신뢰’다. 어디서나 믿을 만하고 변함없는 태도를 보이는 성실한 사람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귀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리게 된다. 다음은,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와 동행의 복이다. 성실한 사람이 누리는 가장 큰 복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속에 살아가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견고하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시101:6). 세 번째, 더 큰 사명을 감당하는 위임의 복이다. 하나님은 신실함이 검증된 사람에게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의 기회와 영적 자원을 맡기신다. 삶이 더 확장되고 가치 있는 일에 쓰임 받는 복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마25:21). 끝으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복이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b). 이는 노동의 대가로 받는 삯이 아니라, 주인의 잔치와 기쁨에 온전히 초대되어 함께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영원한 안식이다. 파도와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이 기초부터 견고하게 지어주시는 ‘참된 형통함’이다.
주님이 기억하시는 사람
찬양〈해 같이 빛나리〉의 가사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리.’ 이 찬양 가사에는 우리 기독교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나온다. 섬김,겸손, 믿음, 충성, 순종, 사랑, 찬송, 헌신 등. 사실 이 모든 가치도 성실처럼 요즘 사람들에게 홀대를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성도조차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 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주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평가하든,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주님께서 기억하시면 족하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기억하신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성실이란 가치가 무색해진 시대에 살다 보니 우리 역시 지치고 흔들릴 때가 많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도다.’ 세상은 우리의 신실함을 몰라줄지 몰라도, 세상은 우리의 묵묵한 희생과 한신을 가볍게 여길지 몰라도, 우리 주님은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고 계신다. 이 사실 하나로 식인 문화를 가진 부족을 찾아가 성실하게 복음을 전했던 한 선교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시대를 역행하는 고귀함
스코틀랜드 출신 존 패이튼(John G. Paton) 선교사가 남태평양의 뉴 헤브리디스(New Hebrides 현, Republic of Vanuatu) 원주민 선교를 떠날 때의 일이다. 당시 그 섬은 식인종이 살고 있어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위험한 곳이었다. 주변의 많은 이들이 거기 가면 죽는다고, 너무 무모한 일이라고 말렸다. 그때 한 지인이 물었다. ‘선교사님, 그 위험한 섬에 가면 원주민이 선교사님을 잡아먹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원시림 속에서 쓸쓸히 죽어간다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수고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러자 그가이렇게 대답했다. ‘제 몸이 원주민의 한 끼 식사가 되든, 파도에 밀려 바다에서 고기밥이 되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땅속에 묻히든, 바다에 묻히든, 마지막 날 부활의 아침에 나를 깨우시는 분은 세상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나를 아시고, 주님이 내 정성을 아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불모지에서 묵묵히 피 흘리며 복음을 전했고, 결국 그 섬 전체가 복음화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모두가 빠른 길, 쉬운 길, 편한 길만 찾아 헤맬 때,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이 어쩌면 이 시대의 가장 우아한 반항아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가성비를 말할 때 완성도를 말하고, 눈속임을 권할 때 정직을 택하는 태도는 결코 어리석음이 아닌, 자기 삶에 대한 가장 깊은 존중이다. 성실이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세태 속에서도, 매일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이들, 이름도 빛도 없이 있는 곳에서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이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신의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는 이들이 있기에 교회가 빛난 것이다. 값지고 의미 있는 일은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킨 성실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또한 이뤄지고 있다. 오늘이 종교개혁 509주년 기념주일이다. 종교개혁도 묵묵한 성실함의 결과다. 역사의 거대한 변곡점마다 그 밑바닥에는 티 나지 않게 자신의 몫을 성실히 지켜낸 평범한 사람들의 묵묵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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