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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믿는 아내의 모델,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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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665회 작성일 13-06-0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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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믿는 아내의 모델, ‘사라’

창18:9~15(구21면)

2013. 6/3. 08:00, 11:00

참 잘했어요, 훌륭해요.

 어느 날 농부가 아내에게 자기가 키우고 있는 말을 시장에 가서 좋은 것으로 바꿔오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잘 생각했어요. 좋은 것으로 바꿔오세요.’라고 말했다. 농부는 말을 몰고 가는 길에 소를 가진 사람과 만났다. 소가 좋다는 그의 말만 듣고 농부는 말을 소와 바꿨다. 그리고 소를 몰고 가다가 양을 가진 사람과 만났는데, 그가 양 자랑을 하니까 이 농부는 다시 소를 양과 바꿨다. 양을 몰고 가다가 거위를 가진 사람을 만나 거위와 바꿨고, 그 거위를 암탉으로 바꿨다. 결국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썩은 사과 한 봉지였다. 농부는 흐뭇한 마음으로 썩은 사과 한 봉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다 피곤한 몸을 쉴 겸 잠시 주막에 들렀다. 그는 그 주막에서 만난 한 귀족에서 오늘 하루 자신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귀족이 말했다. ‘당신 아내는 틀림없이 화를 낼 겁니다.’ 그러자 농부는 오히려 자기 아내는 틀림없이 ‘잘했어요. 훌륭해요.’라고 말 것이라고 장담했다. 귀족은 만약 당신의 아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금화를 모두 주겠다고 내기를 했다. 마침내 농부와 귀족이 함께 농부의 집에 도착했고, 농부가 아내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아내가 남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참 잘했어요. 훌륭해요.’라고 받아주었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귀족이 ‘이런 가정이라면 내 돈을 다줘도 아깝지 않다.’고 하며 자기 돈주머니를 그 집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따뜻하게 맞아주는 태도다. 누군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악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연약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잘했어요. 훌륭해요.’라고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축복의 사자가 ‘이런 사람이라면 축복을 마음껏 전달하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슬기로운 아내로 인해 남편의 어리석음이 극복된 감동적인 이야기다. 그래서 성경은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19:14).

 

남편을 세운 여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의 아내 ‘사라’가 바로 이와 같은 존재였다. 이 시간에는 그 사라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한다. 사라의 원래 이름은 ‘공주’라는 뜻의 사래였는데, ‘열국의 어미가 되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고처주신 이름이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가문을 세운 위대한 인물이라면, 사라는 그 아브라함을 세운 인물이다. 언뜻 보면 성경에 사라의 존재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라는 아브라함을 움직인 인물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받아야 하다면, 사라 역시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사라가 무슨 존경받을 만 한 일을 한 것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을 세워 그의 가정과 가문을 세운 것이다. 9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대접을 받은 천사들의 질문(“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에 아브라함의 대답(“장막에 있나이다.”)으로 된 이 구절은 평범해 보이지만 아주 중요다. 이 접대에서 진짜 칭찬과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사라임을 강조한 것이다. 사라의 내조가 있었기에 아브라함의 섬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록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을 반영한다. 지금 사라가 있는 위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라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셨을까? 아니다. 아시면서도 물의셨다. 어디에 있는지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라는 지금 장막에 있다. 즉 안방에 있다는 말이다. 아내가 안방에 있으면 복 있는 가정이다. 시편 기자는 복 있는 가정의 모습을,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128:3)고 했다. 안방에 있다는 것은 가정적인 아내를 말한다.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살림을 맡아서 하는.......그러니까 아내로서 어머니로써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복이 흐르는 중요한 통로다.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복을 주신다. 개인이 출세하고 성공했어도 가정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결코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없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는 이 말씀이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나에게 큰 은혜와 도전이 되었던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더니 당장에 공격이 들어왔다. ‘당신, 지금 나 어디 있는지 알아?’ 솔직히 저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고민이나 아픔,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앞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 한다). 사실 이 물음은 모든 남편들에게 도전을 주는 말씀이다. ‘당신의 아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물론 아내들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다. ‘내가 지금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가장 완벽하게 출발했으나 비참하게 무너졌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면 아브라함의 가정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은 아내가 있는 곳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아내 사라 또한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남편을 주인으로 섬김

그러면 사라가 남편을 세우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한 일이 뭘까? 베드로 사도는 그의 첫 번째 책에서 믿는 여성의 모델로 사라를 소개하고 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벧전3:6).

 

사라가 남편인 아브라함을 일평생 주님처럼 섬겼다는 것이고, 믿는 여성들은 사라의 딸이니 사라처럼 살라는 것이다. 현대적 정서로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베드로의 주장처럼 사라는 일평생 가정에서 남편을 주님처럼 섬기며 복종을 했다. 성경에서 그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가야할 곳이 정해지지도 않는 상황에서 고향과 친척, 부모를 떠나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그래서 고향과 친척을 뒤로 하고 하란을 거쳐 돌과 모래와 뜨거운 태양만 이글대는 가나안 땅 유대사막까지 왔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순례가 가능했던 것은 사라의 말없는 순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써 찾아온 가나안 땅에 불행이 겹쳤다. 흉년이 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과 문화, 번영을 자랑하고 있는 풍요의 땅 이집트로 갔다. 이집트에 도착한 아브라함에게 뜻하지 않는 걱정거리가 생겼다. 사라의 미모 때문에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되었지만 원래 이복 남매였으니까 이곳에 머무는 동안만 부부가 아닌 남매로 살자고 했다. 정말 사라의 미모에 이집트 왕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하니까 왕이 사라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고 싶어 했다. 순간의 어려움을 모면하고자했던 거짓말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사라는 이집트 왕의 후궁에 간택되어 왕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열하고 비겁하게 아내를 팔아 목숨을 부지하고, 이런 굴욕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고 아내를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못난 남편을 위하여 사라는 묵묵히 순종했다. 아마 일반 가정 같으면 이미 끝장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한 번이 아니었는데도 아브라함의 가정은 여전했다. 모두가 남편을 주님처럼 여기며 섬기는 바보 같은 아내 사라의 순종 때문이다.

 

아내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 중에 하나가 갑자기 손님을 청해놓고 음식을 해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을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요구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7). 한 낮에 지나가는 손님을 자기 맘대로 집으로 들여놓고 사라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한 것이다. 이 시간은 사라도 종들도 모두가 낮잠을 자면서 쉬는 시간이다. 그런데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없이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하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사라는 아무 불평도 없이 그저 그가 지시하는 대로 따랐다.

 

순종의 결과

사실 아브라함은 남편으로써 존경스럽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비열하고 비겁하게 아내를 팔아 목숨을 부지하고, 굴욕적인 상황으로 끌려가는 아내를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못난 남편이다. 그래도 사라는 그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며 주님처럼 섬기고 순종했다. 중요한 것은 사라의 무조건적인 순종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을 세우고, 그의 가정을 세우고,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만들고, 그의 가문을 세워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족한 남편을 주님처럼 섬기는 사라의 무조건적인 순종을 다 보셨고 아셨다는 뜻이다. 10절을 보라.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하나님께서 사라를 축복하셨다. 그녀에게 인생 최대의 선물을 주셨다. 당시 사라의 나이는 89세, 아브라함은 99세, 아직 둘 사이에 가문을 이를 자녀가 없었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11). 그런데 하나님은 사라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사라는 장막 뒤에서 이 말씀을 듣고 웃었다(12). 인간의 상식과 경험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를 진정으로 웃게 하셨다. 인생 말년에 내내 웃는 여인이 되었다. 그들이 낳은 아이가 ‘이삭’인데, ‘웃음’이란 뜻으로 사라는 이삭 때문에 평생 웃었다. 이 모두가 남편이 모자라고 부족해도 그 남편을 주님처럼 섬기며 순종한 결과다. 그래서 장막의 여인이 가문의 여인이 되고, 민족의 여인이 되었다. 가정에, 그리고 남편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아내이다. 사라처럼 남편을 주님처럼 섬기며 순종하는 아내가 오늘 우리 가정과 남편들에게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런 아내가 결국은 좋은 며느리가 되고, 훌륭한 어머니가 되어 가정과 가문은 물론 교회와 사회까지도 빛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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