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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된 사람, ‘다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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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270회 작성일 13-07-1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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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된 사람, ‘다말’

창38:1-30

2013. 7/14. 08:00, 11:00

봄 길과 같은 사람

삶의 무게에 지쳐서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일어서도록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시(詩)가 있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시인 정호승의 〈봄길〉이라는 시다. 이 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스스로 다짐을 하게 된다. 길이 끝났다 싶었는데, 정말 이제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싶었는데, 그 지점에 또 길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 길이 끝난 막다른 곳인데, 그 지점에서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막힌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 생명이 꿈틀대는 봄 길처럼 주변을 온통 생명으로 물들이며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누구겠는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막힌 곳에서 새로운 길을 만드신 분, 생명이 꿈틀대는 봄 길처럼 주변을 온통 생명으로 물들이며 걸어가시는 분이다. 가시는 곳마다 치유와 회복,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셨다.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문둥병자가 깨끗해지고, 중풍병자가 스스로 일어서서 자신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고, 소경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악한 영이 떠나가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창녀가 성녀가 되고, 세리가 제자가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길, 진리, 생명’이라고 하셨다(요14:6). 그러니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길에서 주님처럼 길이 되는 사람, 주변을 생명으로 물들인 봄길 같은 사람이 되리라. 이것이 곧 세상을 향한 신자와 교회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길이 되어 주는 존재, 특히 봄길 같은 존재가 신자이고 교회여야 한다.

 

레비리트(Levirate) 제도

본문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어 준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주변에 생명을 뿌리며 걸어간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자칫 가문의 대(代)가 끊길 뻔 했는데, 그로 말미암아 대가 이어지고,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룬 가문이 되도록 만든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다. 다말은 가나안 여인인데, 어쩌다 야곱의 네째 유다가문으로 시집을 와서 유다의 장남 엘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그녀의 인생에 뜻하지 않는 큰 풍파가 닥쳤다. 갑작스럽게 남편이 죽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그녀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입에 담기도 민망한 시아버지와의 불륜을 저지른 부도덕한 여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오늘의 가치와 윤리적 판단으로 평가한 경우다. 하지만 당시 고대 중동사회의 관습에 따르면 이는 ‘거룩한’ 희생이고, ‘의로운’ 행위였다. 때문에 이방 여인 다말이 사라나 리브가와 같은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도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족보에 가장 먼저 그 이름이 오르게 된 것이다.

 

당시 고대 중동사회에서는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두 종류의 관습법이 있었다. 하나는 히브리어로 ‘쉬카프’법이다. 임신능력이 없는 불임여성이 자신의 몸종(쉬프카)을 남편에게 씨받이로 주어 그 몸종을 통하여 얻은 자식으로 대를 잇도록 하는 제도다(창16:). 다른 하나는 라틴어로 ‘레비리트’법이다. 이것은 후사를 잇지 못한 책임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일 경우(불임이나 후사가 없이 죽은 경우), 남편의 형제 시동생(Levir)을 통해 그 가문의 대를 잇는 책임을 갖도록 하는 제도다(이스라엘에서는 시동생이 없으면 시아버지라도 수행해야함. -이 판례를 남긴 사람이 다말). 훗날 이스라엘은 이를 하나님의 법으로까지 승화시켜 법제화했다(신25:5~10). 이스라엘에서는 대를 잇는 의무를 감당해 주는 사람을 ‘고엘’(속량자, 대속자)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죄를 속량(대속)해 주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같은 의미다. 레비리트 제도를 하나님의 구원활동과 동등한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비난 받아야 할 다말을 성경이 그토록 존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우리의 눈엔 불륜으로 보이지만 성경은 한 가문을 구하는 구원활동으로 본 것이다.

 

사명을 회피한 유다

본문은 이 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화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불륜을 저지른 음탕한 며느리가 아니라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래서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지는 가문의 고엘이 되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은 중요한 책임이고, 사명이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보다 더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레비리트를 하나님의 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일을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공동체에서 철저히 매장시켰다.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 또한 그 가문은 두고두고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팻말을 달고 수치를 당했다. 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문을 허무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다는 이 의무를 교묘히 피해가려고 했다. 11절에 이런 유다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유다는 다말에게 셀라가 아직 어리니까 친정에서 정절을 지키고 기다리라 했지만 실은 셀라도 형들처럼 죽을까 염려했다. 이는 유다가 다말을 자식을 잡아먹은 재수없는 여자로 여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막내아들 셀라라도 살려보고자 이런 얄팍한 수를 부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유다의 두 아들 엘과 오난이 죽은 것은 다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이셨다.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7).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10). 그런데도 유다는 가문의 대를 잇겠다는 생각은커녕 모든 책임을 다말에게 뒤집어씌우고 가문의 대표로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

 

다말의 선택

 아무튼 “수절하고......기다리라.”(11)는 시아버지의 꼼수에 걸려 다말은 지금 길이 끝난 막다른 곳에 서 있다. 이런 상황에 놓일 때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로 반응한다. ①유다처럼 회피하거나 ②좌절하여 포기하거나, ③어떻게든 그 상황을 뚫고 길을 내는 것이다. 다말은 이 위기 앞에서 도망치거나 좌절하여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던져서 정면 돌파하였다. 그 내용이 12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설명생략).

 

지금 다말이 막다른 곳에서 선 것은 단순히 한 여인의 길이 끝난 것뿐만 아니라 한 가문의 길도 끝날 위기였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에 하나가 문을 닫아야 하는 기로에 있다. 그런데 유다는 비겁하게 그 책임을 며느리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다. 하지만 위기의 장본인은 가문의 대표 유다 자신이다. 1절에 그 단서가 나온다.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사실 이 모든 일은 유다가 자신의 공동체를 ‘떠나 내려간’ 데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결국 공동체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다. 이 때문에 자식들이 객지에서 비명횡사하였고, 그의 가문 또한 대가 끊기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유다는 어떻게든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노력보다 이 모든 책임을 며느리에게 전가시키며 꼼수를 부렸다. 그래서 다말이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계획하여 실행한 것이다.

 

만약 다말의 이 행동이 육적 욕정 때문이었다면 마땅히 정죄를 받았을 것이고(레18:15), 성경에 그녀의 이름이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정죄 대신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26). 사욕 때문이 아니라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시아버지 유다가 건강하게 세워지고, 그 가문의 대가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유다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형제들 중에서 가장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되었고(창43:, 44:), 그의 가문 유다지파는 형제들보다 희생하며(수14:6~15) 솔선하였고(삿1:1~2), 자손이 가장 번성한 지파가 되었다(민26:22). 이 유다지파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목자(왕)가 끊이지 않았고, 마지막에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다. 한 사람 다말의 지혜와 희생이 이런 놀라운 복을 부른 것이다. 본문의 다말사건은 한 사람의 지혜, 한 사람의 희생적인 선택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보여준다. 정호승 시인의 시 〈봄길〉 마지막 부분처럼 다말은,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 스스로 사랑이 되어 끝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었다.

 

공동체를 세우라!

본문에 유다의 둘째 오난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잠간 언급되고 있다(8~10). 하나님께서 오난을 죽이신 것은 가문(공동체)을 세워야 할 책임이 있는데, 자기 이익만 앞세워 그 책임을 회피한 것에 대한 심판이다. 한 마디로 공동체를 허무는 죄를 물어 심판하신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오난처럼 공동체를 허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다말처럼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이 있다. 자기 이익에만 눈이 멀어 공동체의 이익은 뒷전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고, 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이 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고,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다말은 길이 끝난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었다. 길이 막히니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사랑이 끝난 곳에서 마지막까지 가문을 사랑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가문의 대가 끊길 길목에서 예수님까지 가는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다말이야말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진정한 이정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가는 길목에서 방황하고 있다. 신자와 교회는 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이웃의 길이 끝난 곳에서 이웃을 세우고 그 이웃에게 길이 되는 사람, 가정의 길이 끝난 곳에서 가정을 세우고 자기 가정의 길이 되는 사람, 교회의 길이 끝난 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길이 되는 사람이 여러분과 저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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