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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 ‘구레네 시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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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4,524회 작성일 14-04-06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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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십자가를 진 사람, ‘구레네 시몬’

막15:16~21

2014. 4/6. 08:00, 11:00

인생은 역설이다.

인생은 역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거나 원치 않는 사건을 만나면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불평하고 원망을 한다. 그런데 오래 시간이 지난다음 뒤돌아보면 그 때 그 재수가 없었다고 불평했던 그 일(사건)이 인생의 도움으로 작용한 경우를 흔하게 본다. 오늘의 어려움이 내일의 행복이고, 현재의 역경이 내일의 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뿐만 아니다. 나누었는데 늘어나고, 주었는데 받게 되고, 포기하고 버렸는데 다시 얻게 되고, 내려갔는데 높아진다. 역설은 상식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인생의 섭리는 역설이다.

 

성경은 역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고 고백했다. 힘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어서 가장 약할 그 때 강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는 역설의 진리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그 역설의 절정은 십자가다. 십자가를 통해 수치가 영광이 되고, 위기가 기회가 되고, 실패가 성공이 되고, 죽음이 생명이 되는 것을 보여주셨다. 본문에 이와 같은 역설의 진리를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 나온다.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

 그는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구레네는 현재 북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다. 그는 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디아스포라)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약1,800㎞)가 예수님의 처형장면을 보게 되었다. 끔찍하긴 해도 좋은 볼거리였다. 그래서 그 역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구경하며 십자가 행렬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죄수가 너무 지쳤던지 한 번 쓰러지더니 십자가의 무게에 눌려 일어나지 못했다. 병사들이 채찍으로 후려치면서 일어나라고 재촉하고, 여기저기서 군중이 비난과 야유를 퍼부어도 소용없었다. 그러자 병사 한 사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그를 지목하여 군중 사이에서 끌어냈다. 그리곤 그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 대신 지고 가도록 명령했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그는 정말 재수에 옴 붙은 것이다.

 

여기서 ‘억지로’ 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앙가류오’(άγγαρευω)인데, 군사용어다. 한 마디로 강제차출(差出)과 같은 의미다. 일제시대나 개발독재시대에 공공근로라는 명목으로 걸핏하면 사람들을 불러내어 일을 시켰다. 이것이 ‘앙가류오’이다. 이 단어는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부에서 특명을 받은 전령이 목적지로 갈 때에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강제로 말(馬)이나 사람을 징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 병사가 구레네 시몬에게 이 앙가류오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몬은 자기 뜻과는 달리, 로마병사에 의해 징발되어 죄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된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에게 유익하고 영광을 받는 일에 뽑힌 것은 유쾌하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힘든 일에 뽑히면 싫어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왜 하필 나냐며 항변을 하기도 한다.

 

작은 수고, 큰 은혜

물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차출이 되어 원치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것도 좋지 않는 일에, 많은 사람 중에서 뽑혔다면 정말 재수가 없어서 그리된 것이라고 불평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일이냐를 알게 된다면 태도는 전혀 달라진다. 만약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을 위한 것이고, 그분을 돕는 것이라면 오히려 감사하게 되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겉으론 끔찍한 일처럼 보이지만 지금 시몬은 세상의 구주로 오신 주님을 위해, 그 주님을 돕는 일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세 복음서(마,막,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것만 가지고도 그가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된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게 된 영광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억지로 지게 된 십자가였지만 이 일로 그는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 이 뿐만 아니다.

 

첫째, 그는 안디옥 교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자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여 최초로 세계 선교를 시작한 교회다. 사도행전은 이 교회의 설립배경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11:19~20).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13:1). 여기서 구브로 사람 바나바와 구레네 사람 시므온과 루기오가 이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중 니게르(흑인)라 하는 시므온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다. 이 사건이후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유대인의 박해(행8:1~3)로 안디옥으로 가서 그곳에 안디옥 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둘째, 그의 자녀들은 로마교회의 중요한 일군이 되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본문이 그를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21)라고 소개한 것은 그의 아들들이 잘 알려진 사람이란 뜻이다. 본서에만 이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본서가 로마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기록된 책이기 때문이다(대신 마태는 유대인, 누가는 헬라인을 대상으로 기록). 구레네 시몬이 로마교회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란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의 아름다운 헌신적인 믿음이 자녀들에게 이렇게 복이 된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똑 같다. 그 비결이 보모의 헌신과 섬김에 달렸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 축복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의 아내는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다. 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면서 긴 인사를 남겼는데, 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16:13). 여기서 루포의 어머니는 곧 시몬의 아내를 뜻한다. 아마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을 할 때 시몬의 가정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것 같다. 그 때 시몬의 아내에게서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이런 인사를 남긴 것인데, 그녀는 자신의 ‘영적 어머니’(“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는 것이다. 바울이 훌륭한 목회자이자 선교사, 신학자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좋은 영적 후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고난주간만 되면 그는 어느 제자보다도 신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본받고 싶어 사람이 되었다. 오늘날 예루살렘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주님이 걸으셨던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걸으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던 그를 부러워한다. 이 정도면 그는 재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엄청나게 재수 좋은 사람이다. ‘재수가 좋은 사람은 넘어져도 산삼 밭에 넘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는 넘어지고 보니 삼밭이었다. 대박이 난 것이다. 그가 받은 은혜와 복에 비하면 그의 수고는 작은 것이었다.

 

우연은 없다. 억지로라도.......

살면서 좋아서 하는 일만 있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살다보면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좋아서, 하고 싶어서 하는 일보다 하기 싫은데도 해야 할 일이기에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좋아한 일만 한 사람들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이 성공자이고, 또한 철이든(성숙한) 사람이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은 해야 할 일을 기쁘게 즐겁게 한 사람이다.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일처럼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처럼 한 사람이다. 특히 신앙생활은 억지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다. 억지로라도 기도해야하고, 억지로라도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하고, 억지로라도 찬송을 해야 한다. 억지로라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출석해야하고, 억지라도 순종하며 섬겨야하고, 억지로라도 헌신을 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을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한 것이다. 고난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라고 한 것이다. 때로는 다 집어치우고 도망치고 싶지만 주님을 생각함으로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걷는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억지로 주어진 일에 대하여 불평하고 불쾌하게 생각하는가? 그 일을 ‘우연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수가 없어서 내가 거기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조차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마10:29)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는 뜻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다. 필연적이라면 거기엔 ‘나만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한 특별한 뜻이 있어서 그 일이 내게 일어나게 했고, 그 일을 하도록 내게 주어진 것이다. 주어진 일에 대하여 이러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갖기를 바란다. 설령 당장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라도,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나를 위한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순종하기 바란다. 순종이 있는 곳에 구레네 시몬처럼 주님의 복이 부어질 것이다. 억지로라도 순종하고 섬기면 구레네 시몬의 가족처럼 가정처럼, 명품가족, 명품가정이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옛 성도의 십자가 노래를 소개하겠습니다.

 

주여 오늘은 비가 옵니다.

비오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산이 무너져 길이 막히고

다리가 끊어져 건널 길 없어도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주여 오늘은 바람이 붑니다.

바람 부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물결은 노하여 하늘을 찌르고

가없은 바다에 파선을 하여도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주여 오늘은 눈이 옵니다.

눈 오는 이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갈 길은 만리요 또 아득하고

눈보라 몰아와 앞길을 막아도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주여 오늘은 죽음이 옵니다.

죽음이 오는 날도 주를 따라 가리다.

앞에는 칼이 가로막히고

뒤에는 총이 위협하여도

십자가 지고서 주를 따라 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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